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의 시대조류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견해들이 분분하게 논의되었지만, 지금은 이미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깊숙이 받아들여지고 또 자리잡고 있기에 문제의식을 갖기보다 그 수용적 태도를 당연시함과 동시에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시류를 어떻게 우리 자신들에게 유익하게 적용할까 하는 머리싸움까지 하는 세태에 이르렀기에 사실 새삼스레 이 문제를 꺼내는 것은 무척 진부한 생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가 쇠퇴해진 이유에서 우리 자신들의 자체 반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와 문화 및 철학적 양상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으로 파급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시대를 영적인 안목으로 관찰하며 영적 분별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자유를 표방한 부자유함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주로 철학부문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단순히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 예술 문화 건축 등을 비롯한 현대문화 전반에서 서로가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고 대두되기 시작한 하나의 시대적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카르트의 철학사상을 기조로 한 근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출현과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형성된 서양의 근,현대문화 주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반성하고 전통적인 지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운동으로, 이것은 궁극적으로 근대화 산업화 과학기술화 등으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삶의 양식을 탈피하여 이른바 분석보다는 총체적 체험, 인간중심주의보다는 자연중심주의, 획일과 동일보다 다양함, 효율성과 업적보다는 삶의 연대성과 공존을 동양적 지혜를 통해 다시 찾아보려는 몸부림이라 하겠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적 질서를 부정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피해야 한다. 우리가 그 어떤 사물을 대하게 될 때 그 사물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물의 실체를 접하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 한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젊음들을 사로잡았던 히피족들의 생태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객관적 명증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는 현대문화 자체에 대한 근본으로부터의 부정이고 이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정면 도전이었던 셈이다. 행위예술과 같은 표현법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언뜻 생각하면 굉장히 민주적인(?) 사고와 생활 및 표현방식의 한 형태라서 그 안에 참 자유가 내포될 수 있어 무척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존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적 파괴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을 지으실 때 하나님 나름대로의 그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본적 틀’ 속에서 이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감히 그 모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이건 누구건 간에 이미 쌓아 놓은 바벨탑을 허물고자 하나, 실상 그 이면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바벨탑을 자신들의 내면세계에 새롭게 쌓아 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우상인 ‘인본주의’와 ‘과학에의 맹신’을 부정한다.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일상의 삶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기독교는 바로 위의 두 가지 우상을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마저도 퇴치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위험한 함정은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가운데 그 어느 경전을 토대로 하여 이미 제도화되고 규범화 된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도 부인한다는 것이다. 미신적이며 샤머니즘적인 종교를 부정하는 것까지는 좋을지 모르나,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마저도 이미 경전화(經典化)되어 있으므로 거부한다는 논리이다. 비록 이러한 점이 아주 교묘한 사단의 고차원적 전략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표현방식에 있어(특히 문화적인 면) 그 모든 다양성을 수용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학에서 그 성격을 규정하는 장르의 경계를 무시하고 그 모든 규범화된 제약을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 또는 무대와 객석의 공간을 뛰어 넘어 그 자리에 함께 모인 사람 모두가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 행위로서 표출되어지는 역할 분담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의 참여’가 그러한 양상인데, 이는 인간을 주체적 존재보다는 상대되어지는 상호관계(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사물에 이르기까지) 속에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 하나의 일치감을 맛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히 상대방과 연합하고 일치하려는 시도에 따라 혼합주의(syncretism)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서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서로가 하나가 되고자 일치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결국 이것은 진리의 변질을 가져오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
첫째, 예전 한 때 우리가 서구지향적인 생각들에 대해 재평가를 하였듯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거의 무조건적인 ‘반(反) 서구’ 비판의식에 대하여도 다시 조심스럽게 재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최근의 시대흐름은 그 반동으로 ‘동양 지향적’이 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잘못이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냉정히 성찰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탈 현대주의=탈 이성주의+탈 서양주의’ 라는 공식이 성립될지 모르겠으나, 동양화(東洋化)가 된다는 것이 그 어떤 사교와 같은 신비주의로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민속(民俗)문화와 무속(巫俗)문화를 엄격히 구별할 수 있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째, ‘의’와 ‘불의’ 그리고 ‘예’와 ‘아니요’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현대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시대가 없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말투를 들어보면 그 말미가 거의 “...같아요”라고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꿈이 많은 시절의 나이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변하고 있어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성공관도 수시로 자주 변하기 때문에 미래의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기가 겁나는 것이다.
유니섹스(Uni-sex) 모드는 이러한 심리현상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은 물론 심하면 스스로 남성이기를(여성이기를) 고집하지도 않고 또한 거부하지도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이 각 인간에게 천성적으로 부여하신 고유한 성(性)마저도 그 구별을 애써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지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밖에서인가 하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우리는 특히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동안 정형화되다시피 이어져 왔던 이원론(二元論)에 대한 잘못된 사고의 틀을 고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마땅히 구별하고 분류해야 할 신앙적 틀마저도 부인하는 오류는 없는지 냉정히 짚어봐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聖徒)는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강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흑백논리(黑白論理)의 모순과 맹점을 비판해야 하지만, 또한 흑백논리가 갖는 당위성마저 부인하면 안 된다. 백조는 오리새끼들 틈에 끼어 있지만 그 근본이 백조이므로 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 다른 오리새끼들로부터 ‘미운 오리새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리새끼들 틈에서 미움과 왕따를 당해서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라, 근본이 다른 백조이기 때문에 미운 오리새끼가 될 수밖에 없다. 죄를 지어 죄인이기 전에, 원초적으로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논리와 같다.
서로가 가까워지기 위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다양성 가운데 일치점을 찾는 노력이 있는 것처럼, 반대로 우리 자체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다름’을 확연히 드러내어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나와 다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와 뜻이 다를 때에는 결국 함께 한 길을 갈 수 없이 계속하여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타종교가 기독교와 다르다고 하여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이 그 기본출발부터 다르기에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 -what for?)
이상적 배합색(配合色)인 회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한 흑과 백의 구별이 먼저 선행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적그리스도의 영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세상에서 오래 전부터 활동하고 있는(요일4:1-3)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지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고후11:1-3)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우리 마음을 지킬 것은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이다(잠4:23).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 때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우리 안에 침입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고후11:3-4). 그리가 위해 ‘영분별의 은사’를 무엇보다 사모할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빌2:3,5)을 지녀야 할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시며, 반대로 사단은 그 마음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실족케 한다.
자신은 실제로 민중을 떠나 민중 밖에 있어 민중이 아니면서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양 민중연(民衆然) 하지도 말 것이며,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의식 있는 지성인의 자리에 있는 양 지성인연(知性人然) 하지도 말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렇게 잘못된 의식의 지성인들이 추구할 수 있는 한 시대의 문화병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