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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믿음의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野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한국신학적 모색
- S. McFague와 동학의 여성상을 중심으로
김 영 선
감신대 신학대학원 卒
제1장 서 론
오늘날의 신학의 과제는 변화된 세계의 경험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의 새로운 모형’(A new paradigm of theology)을 모색하는 일이다. Hans Küng and David Tracy, ed., Paradigm Change in Theology, New York: Crossroad, 1989, Introduction, ⅹⅴ.
서구 기독교 문화는 너무나 오랫동안 뉴우튼-데카르트적 주객 분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모든 문화를 그 개념 위에 정초시키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에, 현대 문명은 지구 차원의 위기, 곧 고도의 인플레이션과 실업, 폭력과 범죄의 증가, 핵무기의 경쟁적 증가, 생태계 오염, 제3세계에 대한 억압과 착취, 인종 차별과 성차별의 심화 등을 결과하는 데 기여하였다.
오늘날의 이러한 위기 상황을 가져온 기독교적 서구 문화가 실상 기계론적이고 분석적이며 남성적인 특징을 지닌 것이라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에 새롭게 요구되는 세계관은 유기체적이고 종합적이며 여성적인 형태를 지녀야 할 것이다. 생태학적 여성신학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모형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여성신학자 맥훼이그(Sallie McFague)는 전통적인 가부장적-군주적 모델을 대치하는 ‘하느님의 몸으로서의 세계’의 생태학적 신관(Models of God)을 통해 오늘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연대적 투쟁을 제안한다. (세계의 신학 93·겨울)
맥훼이그의 이러한 신학적 제안은 오늘 한국 사회 속에서 새로운 신학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 동안 한국적 신학으로서 시도되어 왔던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이 한국의 주체성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해 왔으나 정치 경제적 억압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 억압 속에서 이중 삼중의 차별과 질곡을 겪어 왔던 여성의 문제와 인간중심적 사고 속에서 파괴당해온 자연의 문제를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 해방의 문제는 곧 피조물 전체의 해방의 문제라고 보고 이를 여성적 관점에서 풀어 나가려고 시도하는 맥훼이그의 노력은 본 논문이 다루려고 하는 한국적 여성신학의 모색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동학 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동학 사상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侍天主) 때문에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 노예와 주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똑같은 사람으로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우주적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의 평등 사상과 살림의 세계관, 곧 우주적 생명의 세계관은 한국적 여성신학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본 논문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성의 이야기와 한국의 전통적 역사 속에서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전통을 여성과 자연의 해방을 통한 피조물의 해방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이 합류시키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원론적 가부장제로부터의 여성의 해방과 오염과 파괴로부터의 자연의 해방을 통일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한 연대적 실천을 통하여 모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한국적 여성신학의 한 가능성을 논증해 보고자 한다.
1.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배경
1) 인류 문명에 있어서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역사
(1) 여성 억압의 역사학생논단
선사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생명의 여(女)창조자(Creatress of Life), 또는 하늘의 여주재자에게 기도를 드렸었다. 종교의 태동기에 신은 여성이었다. 머얼린 스토운, “신이 여성이었던 시대”, 이우정 편, 여성들을 위한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5, 17-18쪽 참조.
그러나 가부장 문화의 출현은 어머니 여신을 폐위시키고 남성신들로 그 자리를 대치함으로써 여성신들을 남성신들에 종속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부족사회부터 계승되어 왔던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공동체적 세계관이 붕괴되고 문명의 종교적 세계관을 재형성한 변화는 자연과 여성을 멸시하는 세계관으로 정착되었다. 사유재산과 노동의 분화, 인간 전체에 대한 왜곡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
고전철학에서 보면 본래적 자아란 육체적 존재를 넘어선 영혼 혹은 초월적 이성으로 간주된다. 육체에 대한 정신의 관계는 억압과 예속과 지배의 관계이다. 물질적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볼 때 정신보다 열등하며 도덕적 악의 근원이 된다. 좀 더 나아가, 위계체제적 이원론의 언어는 사회적 위계질서와 동일시된다. 정신과의 관계에서 열등한 육체의 존재론적, 도덕적 특성은 곧 열등한 여성의 정신생물학적 ‘본성’과 열등한 피지배 계급의 정신생물학적 ‘본성’과 동일시된다. 게다가 기독교 교리는 여성과 남성과의 차이를 악의 관점에서(여성이 남성보다 죄를 지을 경향이 더 많으며 하느님의 이미지인 남성을 멸망시킨 자) 형성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문제란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시키고 발전시킬 수 없게 된 여성들의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여성이 해방되기 전에는 결코 해방될 수 없는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느 한쪽만으로 존립할 수 없는 인간 전체의 해방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여성의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 바로 생태학적 여성학(Ecofeminism) Ecofeminism이란 Ecology와 Feminism의 합성어로서 자연에 대한 소외와 착취가 근본적으로 여성 억압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고 근원적인 억압의 조건들을 파헤쳐 보려는 생태학적 여성해방운동을 말한다.
으로서, 이는 여성 억압의 가장 중심적인 이유가 자연 경멸의 자세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서 이 연결점에서 여성 운동과 생태학이 서로를 필요로 하여 만난 것이다.
(2) 자연 억압의 역사
여성에 대한 억압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인 착취가 파괴된 관계성으로 나타나 전 생명체를 죽임으로 몰아가고 있다.
해리슨(Beverly W. Harrison)은 영·육 이원론과 성차별적 이원론에 덧붙여 여성해방신학이 기독교의 과거 속에서, 특히 서구 전통 속에서 뿌리깊은 자연/역사 분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everly W. Harrison, Making the Connection : Essays in Feminist Social Ethic, Carol S. Robb, ed., Boston:Beacon Press, 1985, 230-231쪽.
아직도 현대의 기독교 신학은 인간성[남성]을 자연적/역사적 관계의 주체들로서보다는 역사를 만드는 자들로서 해석함으로써 자연/역사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이러한 강조는 인간[남성] 중심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자연[여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죌레(Dorothe Sölle)에 따르면, 하느님의 절대 타자성은 땅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도 땅을 단순하게 객체화시켰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제국주의의 성립을 가져왔다. 절대 타자인 하느님이 자연을 향한 인간의 역할에 제국주의적 태도를 가지게 했으며 이는 공동 운명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2) 서구적 이원론의 신학
박재순은 오늘날의 생태계의 파괴, 핵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사상적 기원의 하나인 서구 전통 신학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서구의 전통 신학은 하느님과 피조 세계, 인간과 자연을 주객 이분법적 사고로 이해함으로써 생명 세계를 대상화하고 도구화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를 논리적으로 가능케 했다. 둘째, 서구 전통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하느님의 가부장적이며 초월적인 전능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적 책임을 약화시켰다. (박재순, “JPIC 대회 이후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제170집, 1990, 가을696-697쪽.)
우리의 의식 구조를 지배해 왔던 뉴우튼-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서, 인간을 주체로 세우고 자연을 객체로 세워서 무한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 왔다. 정신-육체, 빛-어둠, 나-타자, 객관-주관, 초월-내재, 인간-자연, 또는 남성-여성 등의 이원론적 사고는 전자는 우월한 것으로, 후자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구조를 낳았으며, 이러한 대립적 이원론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지배와 종속의 가부장주의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성- 여성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영-육의 관계로 보는 이해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주객 관계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영-육 관계는 주체와 --‘사용하기’위한 ‘물건’의 생태로 해소되는-- 외부 현실 사이의 주객 관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주객 관계는 타자를 ‘당신’ 혹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 기본 특성으로 하며,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가 상호성(mutuality)과 상호 주체성(intersubjectivity)의 관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시킨다. (로즈마리 R. 류터, “그리스도교는 여성 혐오의 입장에 서 있는가”, 이우정 편, 여성들을 위한 신학 , 265쪽.)
종교에 있어서 인간 이해나 세계 이해는 가장 주요한 인식론적 근거가 되고 있어서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의 변화가 수행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기독교의 인식론적 전제는 남성 중심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다. 전통적인 신학이나 철학의 이원론적 인간 이해와 세계 이해는 여성과 남성, 그리고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등 모든 존재의 삶을 왜곡시키고 분리시켜 왔다. 전통적인 이원론은 초월/내재,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을 대립구조로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을 ‘위에’(above) 계신 초월적 존재이며 남성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성을 여성보다 ‘위에’ 있는 초월의 영역에, 그리고 여성을 그보다 열등한 ‘아래’(below)의 내재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구분짓는 계층적 이원론으로 된다. 이러한 인식 구조가 결국은 자연이나 여성을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중심적 이원론의 극복이야말로 현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억압의 문제, 즉 성차별, 인종차별, 자연의 파괴를 초래한 자연의 억압, 그리고 제1세계의 제3세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시급하고 근원적인 과제이다.
2. 이원론적 세계관의 극복으로서의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새로운 세계관
1) 가부장적·군주적 모델에서 여성적·관계적 모델로의 전환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다. ‘관계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을 정신/육체, 나/타자, 인간/자연, 남자/여자 등의 이원론적인 사고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양극이 사실상 철저히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립적 이원론에 있어서는 언제나 ‘양자택일’(either/or)의 윤리적인 선택이 요구되며 결과적으로 ‘지배와 종속’의 계층주의적 현실이 된다. 이러한 대립적 이원론적 구조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할 뿐더러 ‘나’와 다른 것은 틀리거나 나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관계에서의 폭력과 언어의 폭력, 더 나아가서는 육체적 폭력과 살생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대립적 이원론적 사고는 개인적인 문제로 제한될 수 있지만, 이러한 사고 구조가 집단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연결될 때는 유태인 학살이나, 흑인의 노예제도나, 제1세계의 제3세계에 대한 착취나, 또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비하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강남순, “현대 여성신학 연구”, 「기독교사상」 1992,8., 164쪽.)
맥훼이그에 따르면, 서구 세계, 서구 문화·종교는 여성이 배제된 남성에 의해 명명된 세계이며, 이러한 서구 종교적 언어는 가부장적 성격을 지닌다. 신적 실재와 이미지가 동일시되며, 따라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왕이나 주, 아버지나 계시자라는 은유·상징·모델은 신의 초월성과 세계 사이의 먼 거리만을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맥훼이그는 생태계의 파괴와 핵 위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신의 세계 내재성과 신과 세계의 상호 의존성을 밝혀주고 터잡아주는 새로운 은유로서 신의 몸으로서의 세계(우주·자연)를 말한다. 신은 온 세계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 몸으로 현존하며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듯이 신의 몸인 세계를 사랑한다. (S. McFague, "Imaging a Theology of Nature: The World as God's Body", Liberating life, Orbis, 1990, 213쪽.)
하느님의 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영혼(정신)과 몸(육체)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 유기체적인 완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잘못된 이원론을 시정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S.Mcfague, Models of God : Theology for an Ecological, Nuclear Ag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74쪽.)
실제로 분열적이고 변형적이며 이원론적인 관점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통전성을 침해한다. (Vandana Shiva, "Development, Ecology and Woman", Staying Alive : Ecology and Development, London:Zed Books, 1989, 김진서 역, “개발, 생태학, 그리고 여성”,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편, 여성·평화, 평화사, 1990, 294쪽.)
이원론적 가부장적 제도 속에서 여성과 자연은 도구적 수단으로서 취급당해왔다.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과 자연의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야 하며, 따라서 여성해방신학은 생태학적인 관점이 포함되어야 하고, 그러한 관점은 생태학적인 해결책의 한 부분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주장이다.
급진적인 여성신학자들은 남성적 상징으로서의 왜곡된 하느님 이미지가 지배, 정복, 억압, 전쟁 등을 정당화시켜서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사랑하는 서구의 가부장적 문화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 온 것을 비판하면서 데일리는 이러한 왜곡된 하느님의 권력을 강간, 살인, 전쟁의 ‘부정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라고 표현하고 있다. (M. Daly, Beyond God the Father, 114-122쪽.)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느님의 여성 상징을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여성의 수태 능력 등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힘에 대한 긍정이며, 스스로를 나누어 줌으로써 우주적 생명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실천적 힘에 대한 긍정이다.
생태학적 여성신학은 모든 자연에 대한 생존 경쟁을 여성 자신의 생존 경쟁으로 받아들이고 존재의 최고 상층에 인간을 설정하는 피라밋형 체제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상호 연결되어 있는 그물 모양의 생명 체제를 긍정하고 생태학적인 단일화 획일화를 부정한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다양성을 기념하고 폭력과 지배의 온갖 형태를 반대한다. 따라서 여성 운동의 목표는 지배와 예속의 사회적 양식을 완전히 철폐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사회 윤리를 확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인간·역사중심적 사고에서 생태학적·우주론적 사고로의 전환
생태학적 신학이란 생태학이 관심하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생태학이란 “모든 것은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한다”는 것을 기본 원리로 삼는생태계(Oikos)의 4법칙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것은 다름 모든 것과 관계한다. ② 어떤 것도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머문다. ③ 자연이 인간보다 상황을 더 잘 진단한다. ④ 자연 회복을 위해서는 댓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 (이정배, “창조에 대한 신학적 이해”, 기독교사상, 1987, 6, 19-21쪽 참조.)
생명 공간에 대한 학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우주, 즉 인간 존재 양식의 우주적 각성을 의미한다. (이정배, “종교다원주의와 생태학적 신론”, 씨알의 소리, 97쪽.)
그러므로 생태학적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전일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고 자연이 소외되지 않는 우주론적 신학을 모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생태계의 물, 공기, 토양 등 무생물적인 요소들이 건강할 때 비로소 생물적 요소들-식물, 동물, 미생물, 곰팡이 들도 건강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생명체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생태계에서 각각 독특한 생태적 역할을 하면서 생태계라는 공동체를 이룩하고 있다.
지구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 살아 있는 지구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적인 무책임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우주 중심적 사고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여성을 지배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힘 자체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생태학적 문제들은 사회 정의 차원의 문제이며, 특히 가난한 자들과 여성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힘의 관계와 우리를 분열시키고 불평등케 하는 계급제도를 변형시켜야 한다. 즉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지배의 관계에 도전해야 하며,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인간 중심적 개발 음모에 대하여 도전해야 한다. 즉,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한 저항과 생명을 길러 내고 회복하는 운동은 정치·경제적 억압에 대한 투쟁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파괴 행위에 대한 총체적 투쟁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멕훼이그는 우리 시대에 신학이 취급해야 할 과제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느님-세계 관계의 상상적인 구성(imaginative construal)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는 비신화화(demythologize)가 아니라 재신화화(remythologize)라고 본다.
오늘날의 믿을 만한 신학의 상상적 구성은 모든 형태의 생명과 우리 자신의 내재적 상호 의존성(intrinsic interdependence)에 대한 감수성과, 억압적인 위계 질서를 파괴하고 여러 형태의 생명을 양육하고 완성시킬 책임성과, 변화와 새로움에 대해 열려 있는 포괄적인 비젼을 담고 있어야 한다. (S. McFague, Models of God, 32쪽.)
그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신의 몸으로서의 세계라는 은유를 통하여 여성들의 생명 해방과 전 우주를 포함하는 구원에 대한 통전적 지평을 모색한다.
제3장 McFague의 생태학적 여성신학
1. 생태학적, 핵 위기 시대의 신학적 반성
1) 새로운 시대와 신학적 패러다임 변화
오늘의 인류가 맞고 있는 최대의 위기이자 지구상의 생명계 전체가 맞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의 현실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세계 종말의 문제’이다. 만일 현대 사회가 이 악순환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그의 가치 체계와 의미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2, 39쪽.)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생태학적, 핵 위기의 종말론적 상황에 적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이제 위계적, 이원적, 외재적, 결정론적, 불변적, 원자적, 인간 중심적 모형은 개방적, 포괄적, 상호 의존적, 가변적, 우주 중심적 모형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S. McFague, Models of God, 13쪽.)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신학 모형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적이고 정치, 경제, 역사 중심적인 정치신학적, 해방신학적 모형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내포한다. (위의 책, 17쪽.)
모든 형태의 정치신학, 해방신학은 복음(신학)의 ‘비사사화’(deprivatizierung)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인간에 한정되고 우주의 운명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정치·경제적 억압의 상황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인간·역사의 근원이자 터전인 자연에 대한 지배와 파괴라는 생태학적 위기 상황에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역사 또는 자연·우주를 포함하는, 여성·자연의 해방과 구원을 문제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것이다. 생태계의 문제는 특히 정치·경제적 억압의 문제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비실제적’(unreality)인 것으로 종종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참으로 실제적(real)인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형대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위의 책, 15쪽.)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계론적이고 분석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남성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유기체적이고 종합적이며, 직관적이고 여성적인 세계관을 지닌 패러다임인 것이다.
2) 하느님과 세계의 새로운 관계 규정
전통적 관념체계의 이원론과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기독교 고전 신학은 남성중심주의로 왜곡되어 왔다. 여성해방론적 신학은 남성을 상징하는 표상들, 남성 본위의 언어, 여성과 남성의 계급적 문화를 우리의 언어와 사고의 세계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 보는 통념에 도전한다.
맥훼이그는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시켜 주는 그러한 하느님은 우리 시대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면서, 몸의 유비를 통해 유기체적이고 통전적인 신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신이란 군주적 권위를 지닌 자족적인 실체로서 세계 내에서 자신의 왕권을 실행에 옮기는 어떤 타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 우주를 위한 자발적인 고난을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S. McFague, "Imaging a Theology of Nature: The World as God's body", Liberating Life, 70쪽.)
세계를 하느님의 몸으로 바라볼 때, 그 몸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인간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포함한다. 신의 몸으로서의 세계의 모델은 상처받기 쉽고 억압당하는 것들에 대한 책임과 보살핌의 전체적 태도를 고무한다.
2. McFague의 생태학적 신관
1)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맥훼이그는 어머니로서의 신의 모델을 제시하여 전 우주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근본적 경험을 대변하고 이 세계에 대한 신적 관계성을 유기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 Models of God in the Religious Language,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2, 91쪽.)
이는 자신과 자연을 동 근원적으로 보는 여성들의 생명 해방을 위한 시도이며 전 우주를 어머니로서의 신의 몸(body)으로 보는 새로운 종교 언어를 통해서 전 우주를 포함하는 구원에 대한 통전적 지평을 열어 주는 것이다. (이정배, “생태학적 신학의 과제”, 기독교사상, 1991, 9, 33쪽.)
맥훼이그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살던 삶의 환경으로부터 고백된 인격신의 개념은 그 성격상 이원적이며 정복적인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아버지, 왕 등의 가부장적 형태로 고백되었으며, 인간의 책임이 자연과의 통합된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이고 의지적인 인간 행위에 강조점을 둔 유대 기독교적 정신 세계의 산물이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3-4쪽.)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관계의 상(像)에서 지배적인 서구의 역사적 모델은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는 절대적 군주의 모델이다. (Ian G.Barbour, Myths, Models and Paradigms : A Comparative Study in Science and Religion, New York: Harper & Row, 1974, 156쪽.)
가부장제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모델은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우월성을 고집하며, 이 모델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 표현되는 예외를 다루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맥훼이그는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모델이 가부장적 모델의 억압적 요소를 극복하고, 유기체적 감수성과 포괄적인 완성의 비젼으로서의 기독교 신앙 이해에 핵심적인 구성 요소인 모든 생명의 상호 의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이미지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아버지’가 종교에 있어서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자연스런 지배적 모델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그렇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167쪽.)
단지 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 속에서 배제되어 왔으므로, 여성 이미지가 중심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여성적 이미지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위의 책, 169쪽.)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낳고, 젖을 먹여 기르고, 음식을 먹이고, 안전하게 해 주며,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어 주기 위해 옷을 입혀 주는 어머니로서 인식되는 그런 하느님과 관계 맺는 이스라엘의 경험에 관한 것으로 사용된다. 이런 여성적 은유는 남성적 은유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근본 경험은,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양육받는 것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탄생에 있어서도, 생명을 부여하고 양육하고 안전하게 하고 보살피는 어머니적 이미지에서 그 신비에 대한 표현을 발견한다. (위의 책, 175쪽.)
더우기 세계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자이며 양육자로서의 하느님과 관련하는 이런 방식들은 크리스찬 경험의 여백적인 부록이 아니라 중심적인 것이다.
이 모델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시초와 생명의 양육과 생명의 공평한 완성에 가장 가깝도록 인도한다. 우리의 몸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때, 우리는 공동 창조자(co-creators)가 되는 느낌을 가지며, 적어도 수동적으로라도 거대한 존재의 사슬에 참여함을 느낀다. (S. McFague, Models of God, 104-105쪽.)
생명의 수여자, 모든 존재 중의 존재의 힘인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시고 우리와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점에서 무동기적(unmotivated)이거나 초연한(disinterested) 사랑이 아니라 통합하고 재결합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류터가 지적했듯이 하느님을 기본적으로 부모에다 유비시키는 사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언어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을 다 말해 주지는 못한다. 부모로서의 하느님 표상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의존 상태에서 하느님과 관계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로서의 하느님에 관한 언어를 다른 표상들과 조화시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맥훼이그의 연인으로서의 하느님 상과 친구로서의 하느님 상은 의미 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
2) 연인으로서의 하느님
전통적인 가부장적 은유는 위계질서를 정당화한다. 위계적으로 배열된 전체적인 ‘창조의 질서’는 우월과 열등의 유형을 발전시켰다. 콜린즈(Sheila D. Collins)가 주장하듯이, ‘우월성에 대한 복종의 패러다임’은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성직자와 교구민,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Sheila Collins, A Different Heaven and Earth, 67쪽,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148쪽에서 재인용.)
그것은 잘해야 가부장적 온정주의이며, 최악에는 전제정치가 된다고 콜린즈는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맥훼이그의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의 모델은 지배와 복종의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상호성과 상호 작용의 수평적 관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모델이 된다.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떤 세계에서 개인적으로 정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몸과 정신을 여기서 지금 사랑한다. 따라서 개인주의적, 이원론적, 내세적 관점들은 해소된다.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우주 안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힘이며, 사랑받는 모든 것과 연합을 이루려는 바램이며, ‘살아서 고동치는 땅’을 둘러싸는 열정적인 껴안음이다.
세계의 연인으로서의 하느님 모델에서 구원은 사랑받은 세계가 그의 연인인 하느님과 재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135쪽.)
구원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행하는 유일회적인 봉사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공동으로 분열된 세계의 몸을 치유하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치유는 세계 곧 하느님의 몸의 건강을 주장하며, 상처받은 몸의 찢김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저항(resistance)과 고난받는 자들과의 하나됨(identification)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자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에로스적 사랑의 영원한 특징이다. 구원이 생명과 죽음의 문제라면, 오늘날 구원에 필요한 것은 세계를 도외시하고 우리 자신만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세계의 전체적인 몸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의 방향 전환, 즉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위의 책, 146쪽.)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다.
3) 친구로서의 하느님
오늘날 하느님의 초월에 대한 의미 있는 이해는 ‘위에 계신’(above) 하느님이 아니라 ‘곁에 계신’(alongside) 하느님 - 수직적 관계라기보다 수평적 관계 -이다. (Ruth Page, “Human Liberation and Divine Transcendence”, Theology 85, 1992, 184쪽,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183쪽에서 재인용.)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는 우리와 함께 삶을 여행하며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로서의 하느님이다.
친구로서의 하느님의 이미지는 성서 속에서 현저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군주적이고 가부장적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 왔다.우리는 성서 속에서 친구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11장 19절(눅 7, 34 병행)에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우 며, 요한복음 15장 12-15절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은 이제 종이 아 니라 친구라고 말한다. (요한1서 1장 3절, 고린도전서 3장 9절 참조.)
예수는, 그의 삶을 통하여, 또한 특별히 그의 죽음에서 타자를 위한 고난과 그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의 우정에 대한 비유가 되었다. 마태복음 11장 19절에서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언급된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 큰 잔치와 같은 비유들에서 예수의 이 러한 자기 동일시를 본다. 거기서는 버림받은 자가 환영받고, 관습적으로 의롭다고 여겨지는 자가 제쳐진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180쪽.)
모든 생명이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라면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존재론적 장벽을 넘어서 친구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보전하는 사랑(God's sustaining love)은 생명의 기쁨을 강조한다. ‘동료’란 문자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들은 음식을 나누며 그들이 식사할 때에 함께 하는 것의 기쁨을 나눈다. 따라서 ‘밥’을 나누는 공동체는 기쁨의 공동체이며 포괄적인 우정의 공동체이다. 이것은 예수라는 범례전적 인물의 밥상공동체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초대된 식사는 친구로서의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에 대한 은유이다. (C.S.Lewis, The Four Loves, New York: Harcourt, Brace & co., 1960, 172쪽.)
친구로서의 하느님 모델의 윤리적 함의는 연대적인 우정(solidarity friendship)의 교제이다.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들에게 열려진 공동 식사의 상(image)에서 우정은 비사사화되고 정치화되며, 또한 전우주를 포함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구원은 우리가 친구로서의 하느님의 바램에 응답할 때 성장하는 우리와 우리 세계에 대한 ‘관계’이다. (S.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 87쪽.)
죄인과 버림받은 자의 친구로서 예수는, 하느님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며’,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 왔고,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 것임을 말씀과 행위로써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세계의 친구로서의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보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세계를 뒷받침하고, 즐거움과 고난 속에서 동료가 되는 것이다.
맥훼이그가 은유로서 표현하고 있는 우주적인 신 관념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의지적이고 인격적인 신 개념을 극복할 수도 있는 것은 동양적 사고 유형의 관점으로서, 그것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무변광대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이것, 곧 불교의 심(心), 노장사상의 도(道), 역학의 기(氣)”라고 부른 바, 곧 생명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힘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도 아니고 또한 강인한 의지와 욕구를 지니는 인격성의 이미지도 아니며 오히려 자연 가운데서 인간을 안아 주는 어머니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야말로 우주적 생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 동학 사상의 여성 이해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적 여성신학의 새로운 모형/가능성을 모색해 보자.
제4장 동학의 여성 이해
1. 동학의 배경
동학은 국내외로 혼란을 거듭하던 봉건 왕조의 말기적 상황 속에서 당대 민중의 한(恨)을 절감한 잔반(殘班) 최수운에 의해서 창도되었다. 동학은 유·불·선과 민간신앙 뿐만 아니라 서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단순히 종합한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주체적 사상으로 형성 발전시켰다. 동학 출현의 정신사적 의의는 현편으로 동양 문명의 붕괴와 다른 편으로 서세동점이라는 ‘이중 구조 속의 상태’에서 환상적 도피 아니면 집단적 정신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민중의 보편적 반(反)생명 상황을 뚫고 하나의 ‘활인 처방’(活人處方), 즉 생명을 살리는 운동으로 부각된 데 있다. 김지하는 ‘이중 구조 속의 상태’라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사회 생활 전면에서 일어나는 반생명적 현상을 기술한다.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동광출판사, 1991, 170쪽 이하 참조.)
2. 동학의 남녀 평등 사상과 우주적 생명의 세계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동학의 출현은 뿌리 깊은 봉건 사회의 차별관을 혁파하고 남녀 평등을 자생적으로 창출하는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당시 동학이 본원적으로 구유하고 있는 평등 사상은 반상(班常), 노주(奴主), 적서(嫡庶), 남녀(男女)의 엄격한 차별을 전제로 하는 주자학적 가치관에 맞서는 혁명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압제받던 민중들 스스로가 역사 추진의 주체임을 자각케 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자담케 했다. (김응조, 천도교여성회 60년사, 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1984, 23쪽.)
또한 동학은 자연과 생명을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보고, 생명을 살리는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우주적 생명 공동체 건설을 필연적인 것으로 현실화시키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동학의 이러한 남녀 평등 사상과 우주적 생명의 세계관은 동학 사상의 요체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에서 비롯된다.
1)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수운은 1860년(庚申年)에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체험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는 신비스러운 체험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영부(靈符)를 받아 사람들을 병으로부터 건져 주고,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하느님을 위하게 하라는 것이다.
영부란 하느님의 신령한 부작이다. 수운이 ‘활인부’(活人符)라고 말한 이 영부는 신기의 불통 또는 기의 막힘으로 은유되기도 하는 생명의 억압, 분열, 폐쇄에 대한 생명의 해방, 통전, 개방의 상징이다. 수운은 영부를 치고 나서 그것을 불로 사름으로써 영부가 또다시 숭배 대상이 되어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살라진 영부의 재를 불에 타 먹음으로써 영부의 신통력이 철저하게 생명의 억눌린 순환을 활성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수운은 소수의 독점물로 삼지 않고 온 민중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활인 처방이 되게 한다. 신분의 고하와 남녀의 구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생명을 살려 내는 일에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적 신분제도로 인하여 반상의 차별과 적서의 차별을 당해야 했던 당시 민중들, 또한 여기에 더하여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성차별의 질곡을 겪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이것은 해방의 소식, 곧 복음이 된다.
수운에게 있어서 ‘모신다’는 말은 정성을 다하여 받든다는 것을 뜻한다. 만물의 성(性)과 마음(心)이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신다고 말한다. 사람 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원리 혹은 근원을 뜻한다. 따라서 수운에게 있어서 신은 서구적 신관념인 가부장제적 권위주의의 문명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통치자, 절대자, 군림자로서의 한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생성 자체로서, 이 “생성 자체는 한 존재(a being)이거나 한 생성(a becoming)이 아니라, 그것들의 전체를 포용하면서 그것들을 개체 개체로 살려 내는 무궁한 생명 자체” 이다.
(김경재, “최수운위 범재신론”, 김경재·김상일 편, 과정철학과 과정신학, 전망사, 1988, 109쪽.)
수운이 받은 주문의 뜻은 잃어버린 우주의 생명을 자기 안에서 다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에 일치해 살며, 타인 속에도 이웃 속에도 그와 같은 무궁한 우주 생명이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 공경하며, 동식물 속에도 우주 생명이 살아 있음을 인정하고 동식물을 공경하며, 흙이나 물과 같은 무기물 속에도 생명이 살아 있음을 인정하고 또한 공경하는, 그리하여 우주 생명과 일체로 천지를 공경함으로써 천지와 일체가 되는 그러한 사상이다.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39쪽.)
수운은 조화(생성)와 하느님(천주)을 동일시함으로서 자연의 합리적 질서와 생명의 출현 진화 발전이 극적인 맹목적 우연이라고 보는 무신론적 세계관과 세계를 신의 의지에 의한 과거 일정 시점의 창조 결과라고 보는 유신론적 세계관과 신의 세계 내재성만을 보고 경외해야 할 주로서의 천주를 보지 못하는 범신론을 극복하려 한다. (김경재, 한국문화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3, 232쪽.)
수운은 시천주의 평등관에 따라 천민이나 서자 등 이조 말기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계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유교의 가부장제도에서의 여성들의 위치는 남편의 예속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굴레 속에서 여성은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받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의 화목은 남편과 부인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에서보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순종, 복종함에 따라 형성,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 결과 항상 부인들에게 가정의 화목을 위해 인내를 요구하여 인격적인 억압과 고통을 인내로써 감수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들의 고통에서 가정의 화목이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 유교에 의한 전통적인 가족관이었다. 그러나 수운은 가화론의 설법을 통해 당시 사회적인 인식에서 제외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로써 남편과 사회로부터 학대와 천대 속에서 살고 있던 여성들을 남편으로부터 한울님이라는 개념으로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수운은 평등 사상을 실천에 옮겼던 바, 여종 두 사람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았다. 이는 계급타파의 혁명적인 모범을 보여 준 것으로, 여자도 똑같이 시천주하는 주체이며, 따라서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사상의 실천인 것이다.
2) 최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생명 존중 사상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해월의 양천주(養天主) 사상으로 발전된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키움(養天主)이다. 태아를 모심은 태아를 ‘가두어 둠’이 아니라 ‘키움’이다. 시(侍)란 생존적 섬김 즉 양(養)이다. ‘모심’은 단순한 소유 또는 보관과 구별된다. 모심은 살아 계시는 것을 섬김이다. 살아 계시는 것을 섬기는 것은 보존이 아니라 키움(養)이다. 키움은 살아 있게 함, 생존시킴, 자유롭게(해방) 함이다. (윤노삼,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 이현희 엮음,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청아출판사, 1984, 149-150쪽.)
해월은 남편과 아내를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는 부화부순(夫和婦順)의 사상을 통하여 가사노동과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재평가하였다. 베를 짜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짜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칠거지악과 삼종지도에 짖눌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긴 채 부엌데기로서 살아 온 여성들의 노동을 하느님의 노동으로 본 것이다. 이로써 노동하는 여성들은 천한 부엌데기가 아닌 하느님으로 모셔지고, 여성들의 살림살이는 생명을 살려 나가는 하느님의 노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 도덕이다.
해월은 수운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천지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다”고 함으로써 인간의 평등사상을 천지만물에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내수도문 등을 통하여 생명 존중의 사상을 역설하였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가 일체” 海月神師法設, “天地父母”.이며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라 “부모와같이 섬기는 것이라”(위의 책) 는 이 가르침은 오늘날 생태계 회복의 문제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법에서 해월은 생명과 생이 얼마나 중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생도 자기의 것과 같이 중요한 것임을 인식시켰다. 동서고금의 인류문명사, 인류 정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역사였다. 벽 쪽으로 위패를 놓고, 멧밥을 벽 쪽으로 놓고 상제가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비는 제사 방식의 역사였다. 이 제사 방식은 인간의 노동과 사회 생활 전체, 인간의 희망과 꿈, 욕구 그리고 고통, 온갖 형태의 인간의 감정과 이성적인 활동, 우주와 자기와의 관계, 이웃 사람들과 자기와의 관계, 모든 타생명체와 자기와의 관계들을 포함하는 일체의 것을 이 제사 속에 의탁해 왔음을 말해 준다. 향벽설위는 저 벽 쪽에, 내 시선의 저쪽,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내일에 신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고, 행복된 낙원이 있다는 제사 구조이다. 따라서 자기 노동의 결과와 자기의 꿈과 모든 희망을 미래에로, 저 벽쪽으로 갖다 놓고 그 쪽에 절하면서 오늘을 견디고 오늘을 희생하는, 오늘을 없이하는, 오늘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생활을 하도록 민중에게 요구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향벽설위는 해월의 향아설위에 의해서 허구임이 밝혀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제사드리고 있는 상제 즉 사람, 나,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신,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우주 생명, 우리 속에 지금 여기서 마치 작은 씨앗처럼, 비록 낮은 차원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무궁한 우주 생명, 이것에 대한 확신이다. 더욱이 죽은 귀신의 시간인 밤이 아니라 산 한울님인 사람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대낮 정오에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종교와 사상의 ‘피안’을 ‘차안’으로 혁파한 것이며 살아 생동하는 산 사람, 산 민중의 생명 종교의 창조를 뜻한다.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47쪽.)
향아설위에서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변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노동의 결과를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노동 주체인 한울님에게 되돌리는 것이며, 우주 생명이 우주 생명에게 되돌리는 순환을 실현하는 창조 행위, 확대 재생산 행위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인 동시에 노동이며 사회 정의 실현이며, 사회 정의의 실현인 동시에 문화적인 자기 실현인 것이다. (위의 책, 47쪽.)
제5장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실천적 의미로서의 ‘일하는 하느님’
1. McFague의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동학의 여성관 비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학 사상은 온 우주의 삼라만상을 한몸으로, 하나의 유기체이며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봄으로써,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을 극복하고 모든 피조물의 해방을 추구하는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한 전형성을 내 포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 사상은 또한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가능성을 탁월하 게 제시한 맥페그의 모델과의 합일점 속에서,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일하 는 하느님’의 모습을 여성신학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 준다. 본 논문의 목적은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 상황 속에서 한국적인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한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학 사상과 맥페그의 모델과의 합일점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논증하고, 양자 간의 차별성에 대한 논의는 논외로 한다.
1)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하느님-어머니로서의 하느님과 양천주
인간은 ‘세계 안에서’ 마치 모태 속의 태아와 같음을 느낀다. (J.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91, 351쪽.)
세계는 어머니의 몸처럼 인간을 포옹하고 보호하고 양육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세계 어머니로부터 나서 그에 의해 양육된다. 우리는 시편 104편과 같은 성서의 귀절들 속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해월도 세계를 어버이에 비유한다. 특히 “젖이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곡식이요, 곡식이란 것은 천지의 젖이니라” 海月神師法設, “天地父母”.
고 함으로써 생명 활동의 결과인 곡식, 즉 밥을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몸에서 나는 젖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과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여성관으로서의 어머니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하느님은 맥훼이그가 말하듯이 우주의 어머니로서, 모든 형태의 생명에 관심한다. 어머니인 하느님은 생명을 주고 실존케 하는 의지와 성취를 주는, 즉 ‘삶을 주는 하느님’이다. 생명이신 하느님은 “사물들의 순전히 맹목적인 ‘연속’(ongoingness)이 아니라, 가치를 위한 우주적 목표”이다. (Charles Birch and John B.Cobb,JR., The Liberation of Life : From the Cell to the Commun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196쪽., 박종천, “더불어 살기 위한 계약 : 창조 보전을 위한 한국신학적 기여”, 한국기독교학회 편,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 창조의 보전과 한국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2, 162쪽에서 재인용.)
또한 생명이신 하느님은 목적지향적일 뿐 아니라, ‘생명체들 속에서 모든 지엽적 목적들의 원천’이시다. (Charles Birch and John B.Cobb,JR., The Liberation of Life : From the Cell to the Community, 197쪽.)
수운은 이 하느님을 사람이 마음 속에 모시고 있다고 말한다. 해월은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고 표현한다. 즉, 생명은 끊임 없이 일하고 창조함으로써, 끊임 없이 어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것, 그래서 탄생된 새로운 생명체가 본래 적극적으로 그 생명을 움직이고 일을 통해서 다른 생명체에 접촉을 시도했던 그 좀더 적극적인 생명 활동의 주체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김지하, 밥, 분도출판사, 1984, 54-55쪽 참조.)
이러한 우주적 순환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운동 속에서 창조적으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이 바로 맥훼이그가 말하는 진화하는 모든 것의 모체이며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의 완성을 위해 일하는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인 것이다. 이것을 맥훼이그는 “하느님이 자연 세계에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생명을 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 하느님은 또한 생명의 완성을 가져 오도록 역사를 질서 지우는 것에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S. McFague, Models of God, 114쪽.) 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느님이 생명의 양육과 보전을 위해 우리에게 밥을 준다. 해월은 “밥 한 그릇이 만고의 진리다”라고 하였다. 밥은 하느님의 일, 즉 생명 활동 그 자체이며 그 생명 활동의 결과요 결정이므로 진리라는 말이다. 이 밥은 “변하여 화하고, 화하여 나고, 나서 성하고, 성하였다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나니” 海月神師法設, “開闢運數”. 라고 하는 우주의 순환 싸이클을 나타낸다. 밥을 생산하기 위해서 민중이, 여성이 수행하는 일, 일에 의해서 생산된 밥, 밥이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 활력소가 되어서, 생명력이 되어서, 그것이 다시 노동을 통해서 밖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와 일로 되고, 일이 다시 밥을 만들고, 밥이 다시 사람 속으로 들어가 힘을 만들고 힘이 다시 일로 순환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생명력이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그것이 다른 생명체와의 접촉을 통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인 가치 즉 생산물이 다시 생산 주체, 노동 주체에게로 돌아와, 그것이 다시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질적으로 높아진 심화된 생명력이 되어 밖으로 다시 나가서 또 다시 창조적 노동에 투입되는 …… 바로 이러한 순환, 창조적 순환 - 그것이 바로 ‘진리’요, ‘도’요, 생명의 운동이며 운동하는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김지하, 밥, 53-54쪽.)
생명의 탄생, 양육, 완성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노동의 주체는 민중이며, 또한 여성이다. 이 세계에서 하느님은 일하는 사람을 통해 일한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끊임없이 생동하는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은 바로 일하는 하느님이다. 그 중에서도 생명의 직접적인 출산자요 양육자요 보호자인 어머니, 여성은 바로 새 세계 건설과 보존의 주체이다. 밥을 생산하는 주체이면서 밥상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어머니, 여성은 새로운 창조 속에서 밥상 공동체에로 회복되어야 한다.
2) 파괴된 세계를 치유하는 하느님-연인으로서의 하느님과 십무천
연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혹은 모든 조건들을 넘어서서 서로 사랑한다. 그들은 서로가 단지 서로이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가치를 발견한다. 맥훼이그에 따르면,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우리의 공로를 보아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와 똑같이 해월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이기에 선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시(侍)하고 있기에 선한 존재라고 말한다.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 몸과 정신을 전체적으로,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 완성을 기뻐한다. 또한 피조물의 고난 가운데서 함께 고난당하시며 모든 피조물, 세계가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갈망하신다.
해월은 모든 생명이 하느님의 무궁한 창조 세계 속에서 태어나 무궁한 미래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어떠한 생명체도 생명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다. (김지하, 살림, 동광출판사, 1987, 183쪽.)
그러므로 모든 생명 가진 것에 대하여 생명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을 살려내는 살림 활동을 구체적으로 집약한 것이 해월의 십무천(十毋天)이다. 1.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2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라, 3. 한울님을 상하게 하지 말라, 4. 한울님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5. 한울님을 일찍 죽게 하지 말라, 6. 한울님을 더럽히지 말라, 7. 한울님을 주리게 하지 말라, 8. 한울님을 허물어지게 하지 말라, 9. 한울님을 싫어하게 하지 말라, 10. 한울님을 굴하게 하지 말라.
(홍장화, “해월신사의 십무천”,신인간 495호, 1991년 6월 10-11쪽)
십무천을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고 완선되어야 할 하느님의 몸으로서의 세계를 본다.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치유의 윤리는 곧 사랑하는 자의 고난과의 동일시와 그 고난을 낳는 죽임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홀로 고난당하지 않는다.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사랑받는 자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함께 일하는 것을 통하여 세계의 분열된 몸을 계속해서 치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바라는 몸의 모든 부분의 재결합을 가져오도록 돕기 위한 협력자로서, 치유자로서 우주적 연인에게 응답할 수 있는 의식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인간은 시천주(侍天主)를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인간성은 신성의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절제한 사용에 의해 병든, 죽음과 단절에 의해 위협당하게 된 사랑하는 우주 전체를 통합하고 구원하는 것에 나서야할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개인적 책임이 아니라 전체적, 우주적 책임이다.
3) 새세계 공동체를 건설하는 하느님-친구로서의 하느님과 동귀일체
친구로서의 하느님의 우정의 사귐은 인간만이 아니라 총체적 세계와의 사귐이다. 친구로서의 하느님은 세계를 보전하는 일에 관여한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기쁨과 고난을 나누는 동료가 된다. 보전자로서의 하느님은 기쁨의 공동체, 포괄적인 완성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바, 그것은 바로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이다. 밥을 나누어 먹는 것, 그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비위계적이고 상호적이며 포괄적이다. 여기서 우정은 하느님과 인간 개개인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결합된 모든 것들(all those)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 모두는 정의와 관심의 맥락에서 서로와 함께 생명의 밥을 나누어 먹을 때 함께 ‘동료’가 될 수 있다. 이 동료적 감수성은 모든 생명의 상호 작용을 통한 완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생명의 회복과 완성을 추구하는 생명 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공동체 운동이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 운동이 된다. 그것은 밥상 공동체 속에서 나 속에 남이 계신다는 것, 나는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앎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신령(神靈) 기화(氣化)하는 새 세계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귀일체(同歸一體)로서의 새 세계를 선험적으로 본다. 동귀일체의 세계는 모든 대립과 부조리가 조화와 일치점을 찾고 모든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는 통일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이다. 각자위심(各自爲心)에서 벗어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 되어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다양한 가운데 마음가짐이 동일한 목적을 향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함을 뜻한다. (홍장화 편저, 천도교 교리와 사상, 71쪽.)
이것이 바로 ‘밥상 공동체’로서의 새 세계이다.
2. 한국적 여성신학의 가능성 - ‘일하는 하느님’
어머니로서, 연인으로서, 친구로서의 하느님의 사랑-창조, 구원, 보존-은 일치에 대한 바램으로 묶이며, 완성에 대한 포괄적 비젼 속에서 이해된다. 맥훼이그의 모델들은 하느님이 세계와 거리가 멀고 세계와 무관한 단독의 유일한 신도 아니고, 세계 속에 침몰되어 분리되지 않은 어떤 하느님도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몸으로서의 세계의 어머니로서, 연인으로서, 친구로서의 하느님은 세계를 초월하며(우리가 우리 몸(신체)을 초월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 내재한다(우리가 우리 몸(신체)과 함께 있는 존재인 것처럼) (S. McFague, Models of God, 183쪽.) 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세계의 몸에서 만나는 하느님은 바로 동학의 베짜는 하느님, 일하는 하느님이다. 비천한 아낙네가 ‘살림살이’를 통하여 살림을 실천하는 노동, 밥상을 차려서 밥상 공동체를 창조하는 노동,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노동이다. 이러한 ‘일하는 하느님’의 표상에 대하여, 남성들에 의해 이상화된 여성의 비인간적 삶의 모습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베짜는 여성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일(노동)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여성의 일에 대한 혁명적 재평가이며, 이러한 입장에서 여성의 일은 생명을 죽이는 모든 반생명적 상황에 저항하는 실천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과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만남을 통한 한국적 여성신학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1) 하느님의 노동으로서의 창조
“태초에 하느님이 계셨다.
태초에 존재하는 만물의 원천이며,
가장 최초의 애틋한 그리움인 하느님이 계셨다.
하느님 - 신음하는 여인,
하느님 - 해산의 고통 속에 있는 여인,
하느님 - 출산하는 여인
하느님 - 기쁨에 설레이는 여인,
하느님은 그녀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 넘쳐서 말씀하셨다. 좋구나!
그리고 나서 하느님은 모든 좋은 것이
고루 나누어지기를 바라면서
땅을 부드럽게 두 팔로 껴안았다.
하느님은 하나로 결속됨을 사모했다.
하느님은 좋은 땅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갖기를 원했다.
인류는 하느님의 이 바램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땅을 나누어 가지려고 태어났다.”
(카터 헤이워드가 만든 예배의식문, 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 한국 신학연구소, 1987, 41쪽.)
하느님은 ‘보시기에 좋은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창조적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다. 피조물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은 전적 타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창조하며 피조물에 내주하는 하느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초월성은 그 자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 밖의 창조주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이 세계 안에 하느님의 나라의 성장을 위해 일하는 공동 창조자들의 사회적 실천 속에서 달성될 것이다. (D. Sölle, Thinking about God, London; SCM Press, 1990, 52쪽.)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는 모든 피조물들이 한몸을 이룬 가운데서 모든 기쁨과 고난을 함께 나누는 세계이며, 인종과 인종,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 자연의 피조물들 사이에 한몸을 이루면서 밥을 나누어 먹는 세계이다. 거기에서 모든 피조물은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 그 세계에는 명령과 복종,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눌림 대신에 사귐과 협동과 나눔이 있다. 자연의 균형이 인간에 의하여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다.
하느님은 이렛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창 2,2). 이 세계의 완성은 하느님의 쉼 속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쉼은 어떤 일을 그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성서와 함께 편집부, 보시니 참 좋았다, 성서와 함께, 1987, 63쪽.
따라서 창조의 완성은 하느님의 쉼에 있다. 안식은 바로 무위(無爲)이며, 모든 번거로운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 비우는 것, 공(空), 허(虛)이다. 인공적이고 작위적이며 반생명적인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텅 비워버린 비움, 참다운 의미에서의 모든 변화, 창조적 생산적인 일체의 활동, 순환 활동 속에서 공동체적인 생산과 분배, 민중 공동체적인, 생명 공동체적인 참다운 창조적 변화가 일어난다. 비움으로써 진정한 생명 활동이 생기발랄하게 생동하고, 신명나게 끊임없이 무궁하게 활동하게 되는 것, 이것이 안식의 의미이며, 하느님의 활동 원리이며, 생명 활동의 본성이다.
2) 창조를 계속하는 인간의 노동
하느님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들을 노동자와 사랑하는 자로서 창조했다. (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 93쪽.)
그러므로 노동은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형상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인간의 노동은 창조의 계속으로서 하느님과의 협력을 의미한다. 죌레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과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의 창조활동(하느님의 노동)을 실현하는 인간의 공동 창조자성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그의 노동 속에서 하느님에게 의존되어 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시65,11-1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자기를 노동하는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경작해야 할 인간은 아직 그 자리에 없었다”(창 2,5). ‘비를 내리는 것’과 ‘땅을 경작하는 것’의 상호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 본문 속에서 세상의 협력자(cooperator mundi)로 언급되고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 이정배 역, 노동의 미래 - 미래의 노동, 한국신학연구소, 1983, 143쪽.)
비를 내리시는 하느님은 경작하는 인간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일상적인 노동 속에서 ‘하느님의 협력자’가 된다. 그것은 인간 노동의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이다. 하느님의 공동 창조자로서 우리는 의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다.
우주 삼라만상의 협동적 노동 속에서, 성차별과 계급·인종 차별, 모든 종류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새 세계 공동체를 이루려는 연대적 실천 속에서 우리의 어머니, 새로운 대지는 모든 민중과 피조물의 참 생명을 살림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장소가 될 것이다.
제6장 나오는 말 - 평가와 전망
여성이 억압받고 고통을 받을 때 이 지구의 대부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위협받고 고통당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생태학적 관점과 여성 해방의 관점을 통합하는 것으로서 여성 해방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계기가 된다. 여성 해방의 문제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간 공동체 전체의 해방이라는 문제이기도 하면서 인간만이 아닌 자연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포괄적인 문제의식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변화된 세계관과 생태학적 위기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수립이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과제가 된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전통적인 가부장적, 군주적 모델에서 여성적, 관계적 모델로의 전환, 인간 중심적, 역사 중심적 관점에서 생태학적, 우주론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맥훼이그는 파괴된 창조 세계의 회복과 피조물의 생존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공동 창조자로서 일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맥훼이그의 모델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맥훼이그 자신이 지적한 문제이기도 한, 인격적 은유의 문제이다. 그녀는 스스로 가부장적 유대 기독교의 정신 세계의 산물인 인격신의 개념은 우주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담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라는 인격적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서구적 인격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맥훼이그와 함께, 우리의 논의가 생태학적 여성신학에 관한 것이라면, 기존의 서구적인 인격적 모델을 넘어서서 우주적 생명의 세계관에 상응하는 모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동학의 ‘천지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다’는 초인격적 관계를 통하여 서구적 인격신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주적 하느님과의 관계의 깊이를 말해 주는 자연 이미지들의 다양성과 깊이는 인간 중심적 모델에 대한 우상 숭배의 요구를 제거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일하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운동으로서의 ‘노동’이라든가, 그 노동의 산물임과 동시에 우주적 순환 운동으로서 그 노동을 가능케 하는 ‘밥’ 등의 비인격적 은유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새 창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맥훼이그의 모델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차원의 실천의 문제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것은 맥훼이그 모델의 또 하나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훼이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동학의 개벽 사상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시천주한 모든 사람이 합심하여 선천의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후천의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하자는 것이 바로 후천개벽의 혁명 사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처럼 여기는 마음을 길러 내면서 그런 마음을 살아가는 시천주의 실천에서 모든 구별은 사라지고, 남과 북이 통일되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며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후천개벽의 새 세계,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듯 동학의 ‘시천주’(侍天主)는 한국 종교 문화의 기초 이념인 ‘’의 원리, 곧 근원적 생명 이해에 기초한 화해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박종천, “더불어 살기 위한 계약 : 창조 보전을 위한 한국신학적 기여”, 창조의 보전과 한국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2, 169쪽.
그런데, 한국 문화의 화해 원리에는 화해론의 역사적 구체화, 즉 화해를 가능케 하는 핵, 곧 실천적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결핍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의 삶이 사회 전체적으로 병들어 인간성의 파괴, 문화 말살, 생명의 억압과 착취, 사회적 질병과 정신적 질환이 극에 달했던 때에 생명 그 자체가 살려고 울부짖는 한몸의 뒤치기로서 나타난 동학 (김경재,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 대한기독교서회, 1990, 143쪽.) 사상 속에서 새 창조를 이룩할,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국적 그림자를 본다. 이것은 바로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을 가져온 모든 죽임의 세력을 극복하고 살림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한국적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주적 생명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동학의 여성관, 곧 일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꿈꾸는 한국적 여성신학의 핵심적 모형이 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모형을 가지고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가 남는다.
<출처: 기독교윤리사A발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