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7장은 임마누엘 아들을 소개합니다. 이 아들은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후손)와 연결됩니다. 본문에 유다 왕 중에 아하스가 언급되는데, 과연 그가 임마누엘, 거룩한 씨인가? 안타깝게도 그는 임마누엘, 즉 거룩한 씨가 아닙니다.
주전 735년 아시리아를 대적하기 위해 아람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이들이 남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선택할지, 아시리아를 선택할지의 갈림길에 섭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이것이고, 실제는 하나님을 선택하는가? 즉 거룩한 씨에 대한 일종의 시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결국 아하스 왕은 거룩한 씨가 아니고, 임마누엘 아들을 통하여 거룩한 씨가 연결됩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되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이 성을 지킬 것인데, 그 증표 아무것이나 구하라, 내가 보여주겠다는 의미입니다. 12절을 보면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신뢰를 거절합니다. 이때는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으려하는 상황입니다.
13절을 보면 이 거절에 대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원문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 복수로서 “사람들”(아나쉼)입니다. 즉,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남 유다를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신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가에 대한 테스트에서 실패합니다. 그러면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가 아하스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14절을 보면 임마누엘 아들을 예언합니다. 이사야 7, 8, 9장은 “아이”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7장은 “임마누엘 아들”, 이사야 8장은 “이사야의 아들”, 이사야 9장은 “메시아의 아이”입니다.
14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므로 주께서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보라 여인이 잉태한다. 아들을 낳고 있다”입니다. “임(함께) 마누(우리) 엘(하나님)”, 이는 여인이 낳게 되는 아들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입니까? 아니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임(함께) 마누(우리) 엘(하나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인 몸을 통해 낳고 있는 아들, 우리와 함께하는 분인데,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 아들은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와 연결이 됩니다.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의 주제적 발전입니다. “처녀가 잉태한다”라고 말씀할 때 “처녀”는 너무나 과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알마”는 결혼 전의 여인을 지칭합니다(창세기 24:43, 출애굽기 2:8, 아가 6:8). “처녀”라는 뜻을 가진 “베틀라”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알마”는 결혼 전, 유대적인 배경에서 말하면 “정혼”한 여인을 지칭합니다. “알마”라는 말은 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이 “처녀”, 즉 “여자”는 아하스의 아내입니다. 아이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아주 흔한, 평범한 이름입니다. 아마도 아하스가 자기 아들 “임마누엘”을 부를 때마다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18~25절을 보면 이사야 7장을 인용하면서, 임마누엘 아들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인 것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처녀”라는 말을 “네아스”(젊은 여인)를 사용하지 않고 “파르테노스”, 즉 “처녀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결혼제도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약혼(아라스) 단계, 둘째, 정혼(라카흐) 단계, 셋째, 결혼(켈룰라, 키두신) 단계입니다. 약혼은 파기할 수도 있는 단계입니다. 정혼은 동거만 안 했을 뿐 이미 남의 아내이며 절대 파혼하지 못합니다. 결혼은 동거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만 안했지(마태복음 1:18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이미 정혼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7:14절의 “알마”라는 말은 정혼한 부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마태복음 1:18절 대로 동거는 안 하였고 처녀이기도 하니, 육체적으로는 처녀임을 말씀합니다.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의 주제적 발전인, 이사야 7장의 “임마누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마태복음 1:21).
구약성경을 보면 “두려워하다”와 “임마누엘”은 쌍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여호수아 1: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1:10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아하스 왕은 아람왕과 북이스라엘이 연합 전선을 형성해서 자신들을 공격할 때 두려워하였습니다. 1절을 보면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 하였는데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아무리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가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하게 됨을 통하여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가 아하스가 아님을 증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임마누엘 아들”이 그 거룩한 씨임을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은 “임”(함께), “마누”(우리), 엘(하나님)로서, “하나님의 임재”, “동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임마누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23: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은 물러나고 늘 주안에서 담대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