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누가복음 24:13-3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제3주일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부활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주일마다 모이는 예배는 그 의미가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초대 교회 식으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새신자초청주일이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바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며, 그 부활신앙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의 기초이고, 전부이다. 바로 이러한 감격과 소망을 나누고 싶어서 여러분을 초대한 것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 이에 응한 여러분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있었을 것이다. 시인 정현종은 ‘방문객’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 사람과 만나는 일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교회가 새 사람을 초대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교회는 이기적인 동기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 때문에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여주신 대로,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강권하셨다.
오늘은 내 인생의 동행자이신 예수님, 우리 믿음의 동반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자.
1)
부활절 7주간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설교한다. 단골메뉴의 하나인 누가복음 24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다. 의심의 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했는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했는지, 그 스토리가 잘 만든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마치 우리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망하고, 낙심하고, 변덕스러운가? 엠마오는 믿음이나 희망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본문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다. 지금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해 너무 실망하고 낙심하여, 더 이상 희망을 둘 이유가 없어 이젠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3-14).
본문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는 예루살렘을 등진 채, 서쪽으로 지는 햇볕을 어깨에 걸치고 엠마오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고향으로, 옛 직업으로,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고 있는 엠마오는 어떤 의미인가? 엠마오는 두 사람에게는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이고, 버려둔 일터이며, 남겨둔 가족과 옛 친구들이 있는 곳이다. 한때 인간적으로 몸부림을 치던 곳이었고,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엠마오는 새 사람을 입기 전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하던 모든 열정을 포기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중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따르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멀리 도망치는 중이다.
엠마오는 비유하자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엠마오나 여리고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전을 벗어나고, 신앙의 길을 떠나며, 예수와 등을 돌리는 길목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험담은 믿음의 성숙도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오늘의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다.
2)
사실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것은 못된다. 우리는 엠마오로 돌아가는 그들이 믿음이 있네, 없네, 도망치네, 어쩌네 할 입장이 못 된다. 인디안 슈익스는 “우리가 남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6일을 걸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니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신발을 신고, 그들의 심정이 되어 함께 걸어가야 할 것이다. 헐렁해 질질 끌고 다니건, 발에 꼭 끼어 고통을 느끼던 간에 어떤 경우든 우리의 신앙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사렛 예수였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행동과 말씀에서 힘이 있는 예언자였다고 회고한다.
두 제자는 모든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참 아쉬운 면도 있었다. 두 사람 이야기를 듣자면 자기들은 그 사건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 물론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둘이 하는 이야기에는 자신들의 감정과 고백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걸어가는 도중에 낯선 한 남자가 두 제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그네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그들의 동행자가 되었다. 주님은 낯선 나그네 모습을 한 채,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물론 두 사람은 그 새로운 나그네가 부활하신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다.
일행이 된 세 사람은 길을 함께 가면서 계속하여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을 서로 말하였다. 특히 예수님은 성경을 풀어 말씀하시면서 당신에 관한 일을 역사적으로 조망하시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 라고 반문하셨다.
흔히 ‘눈앞이 캄캄해진다’고 말하듯이 눈앞의 일에만 연연하면, 조금 떨어진 앞뒤의 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눈앞이 캄캄해져 당장에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좌절한 그 두 사람에게 모세의 예언서로부터 하나님의 구원계획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찬찬히 말씀해 주셨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듣던 두 제자의 마음이 갈급한 심정으로 바뀌고, 이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변하였다. 두 제자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이윽고 엠마오에 이르자 그들은 더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았다.
“그들이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29).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을 때에,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자기들과 동행하신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30-31).
3)
화가 렘브란트는 엠마오로 가는 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그 중에 우리교회 달력 11월에도 있는 그림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사방에 어둠이 깃들고 식탁에는 잔잔한 붉은 빛이 감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길 가던 두 제자와 식사하는 모습은 참 정겹다. 작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빵을 떼는 순간, 그 때 제자들은 길에서 함께 동행 하던 그 분, 떡을 떼어 주시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발견하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두 제자는 눈앞에서 사라진 예수님을 돌이켜 생각하며,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32)하고 감격해 하였다.
두 제자는 동행한 나그네인 예수님을 자신들의 식탁에 붙잡고 그리고 함께 떡을 뗀 직후 눈이 열리는 체험을 하였다. 두 제자는 비로소 열린 눈을 통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동행하신 그 분, 길을 걸으며 성경 말씀을 풀어주신 그 분, 그리고 마주앉아 함께 떡을 떼던 그 분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였는가? 진리는 깨달음이지만,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33).
그리고 열한 제자를 만나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전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아직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 빌라도의 군대가 여전히 예수의 잔당들을 색출하려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활의 확신이 없어 제각기 자신들의 엠마오를 찾았던 제자들이 있는 그 예루살렘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두 제자는 엠마오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즉시 포기하였다. 두 사람은 분명하게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것은 확실한 회개이고, 참된 깨달음이며, 진실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참 증인으로 거듭나서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체험의 제자가 되고, 박해받는 초대교회의 핵심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매번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 새로운 삶을 결단하도록 재촉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인생길을 걸으며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엉뚱한 방향인 엠마오나 여리고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를 만나 주신다. 믿음보다 유혹이, 확신보다 의심이, 감사보다 불신이 있을 때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라.
믿음은 내 삶을 깨우는 북소리이다. 신앙생활은 이 세대가 무겁게 강요하는 행진을 멈추고, 다른 삶의 모습을 꿈꾸게 하는 하나님의 초대요, 선물이다. 세상의 욕망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이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 북소리가 앞만 보고 행진하던 내 삶을 돌이키게 하고, 내 심령을 깨운다면 그것이 내게 일어난 엠마오의 기적과 같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 마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호르몬으로 내 삶에 체질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헤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앞서 믿음을 가르친 교부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택하라고 한다.
“당신이 빵을 사고 싶을 때 동전을 지불한다. 가구를 사고 싶을 때 은전을 지불한다. 그리고 토지를 사고 싶을 때는 금전을 지불한다. 그러나 사랑을 사고 싶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불해야 한다. 사랑의 값은 당신 자신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가야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이미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선물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길 위에 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시길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