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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 불자님들 손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그러한 기記의(적힌) 쪽지가 있습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문자 그대로 한량이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협조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만등불사萬燈佛事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슴에 있는 무량광불無量光佛하고 만등불사萬燈佛事하고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것부터서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진리는 항시(항상) 광명光明이나 빛이나 그러한 걸로 해서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인 사악邪惡이나 부정적인 어떤 부조리나 그러한 것은 어둠이나 그런 암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헌데 그러한 암흑을 밝혀서 보다 더 광명光明한 마음으로 또는 광명한 세계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느 종교宗教나 다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광명光明 가운데서 가장 근원적인 광명, 가장 본바탕인 광명 이러한 광명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님입니다. 만등불사萬燈佛事는 비록 만등이라 하는 수치가 될 망정 이것은 만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만등 백만 등 또는 무진無盡 등, 끝도 갓도 없는 그러한 등불, 그러한 끝없는 등불, 한없는 등불을 키워서 우리가 무량불無量佛(무량광불)까지 가는, 우리 스스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되고, 또는 천지 우주가 모두 다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가 되는, 이러한 것을 기구祈求하는데서 만등불사의 참뜻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대부분 다 아시지만은 우리 번뇌를 가장 간추리면 하나의 무명無明이나 그런 말로 해서 표현 되겠지요. 조금 더 부연시키면 그때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라, 조금 더 부연시키면 조금 더 퍼뜨려서(자세히) 말하면 탐진치만의貪瞋痴慢疑라. 탐욕심을 부리고貪, 노여워하고瞋, 또는 어리석은 마음을 품고痴, 또는 만의慢疑라, 아만심我慢心 그런 만심慢心을 내고, 또는 참다운 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서 의심疑心을 내고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라, 이러한 오번뇌五煩惱 이것이 보통 말하는 근본번뇌입니다. 이러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무량광명無量光明을 못 봅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을 못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교를 위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바른 신앙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우리 신앙대상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바른 행위行爲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하現下 우리 종교계가 혼미昏迷를 거듭하고 있고, 또는 우리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 빛나는 공헌을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바른 신앙을 갖지(갖고 있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바른 신앙은 어떤 것이 바른 신앙인가? 이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확실히 우리가 알고서 믿어야 합니다.
불교가 워낙 광대무변廣大無邊해서, 교리가 짧고 교리가 천박해서 조금만 몇가지 쭉쭉 외이면 신앙생활에 별로 지장이 없을정도로 간단하면 모르겠지만 불교는 너무나 광대무변합니다. 마치 하나의 양을 모는데 양이 도망가는 길이 한 갈래 밖에 없으면 그냥 한 갈래로 쭉 가서 잡을 수가 있지만, 길이 여러 갈래면 그때는 어느 길로 양이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양을 못 찾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행하는 방편方便도 많고, 가지가지의 그런 경전經典도 많이 있고, 이러한 광대무변한 그런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을 바로 못두면, 그런 많은 가운데서 간추려서 그런 골수법문을 딱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의 실행이, 우리의 행行이 따를 수가 없습니다. 행行(행동)이 못 따르면 우리한테 가피加被도 올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성불成佛이라 하는 불교인의 구경목적究竟目的을 달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 신앙대상인 부처님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서 본바탕을 보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우리 불자는 부처님을 그저 신앙적으로, 어려운 말로 하면 앙신仰信이라, 우러를 앙仰자 믿을 신信자, 앙신이라. 신앙적으로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헌데 부처님께서나 또는 그 뒤에 무수도인들의 말씀을 빌어서 부처님의 개념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란 우리 인간성人間性의 본질인 동시에 또는 바로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바탕입니다. 우리 인간은 각 현상은 보지만 일체존재의 본성本性은 못 봅니다. 허나(그러나) 비록 못 본다 하더라도 본성을 본 분들 말씀으로 해서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 인간성의 본질, 우주만유의 본질,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물리적인 표현으로 말씀할 때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명無量光明입니다.
불교란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일체 모든 학문과 종교철학을 다 거기에 포섭해 있어놔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어떤때는 그러한 부처님을, 우주만유의 본질인 동시에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부처님을 이렇게도 표현도 하고 저렇게도 표현합니다. 과학적인 표현도 있고, 또는 철학적인 표현도 있고 그때그때 중생근기衆生根機에 따라서 달리 표현하십니다. 헌데 우리의 본바탕, 우주의 본바탕인 그 무엇, 그 무엇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부처님입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그때는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진여眞如나 또는 여래如來나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나, 또는 주인공主人公이나, 하나의 모든 것을 다 통일한 하나라고 그래서 하나의 본질이라고 그래서 일물一物(한 물건)이나 그러한 걸로 해서 부처님을 철학으로도 표현도 합니다. 진여眞如 또는 법성法性, 불성佛性 그런 걸로 철학적으로 표현도 합니다. 헌데 물리적 표현으로 한다고 할 때는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무량광無量光이라,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 번잡煩雜합니다만 한가지 더 풀이 해야 될 것은 무엇인고 하면 광명光明 그러면, 부처님의 광명은 우리가 보는 색광色光이 아닙니다. 광명을 우리 불교에서는 색광色光과 심광心光으로 구분합니다. 빛 색色자 빛 광光자, 우리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 우리 중생도 볼 수 있는 그런 광명은 색광色光입니다. 헌데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마음의 본질, 우주의 본질인 불성佛性을 깨달은 분만이 볼 수 있는 그러한 광명은 마음 심心자 빛 광光자 심광心光입니다. 허나 광명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단지 성상性相이라, 성性(성품)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심광心光이요. 상相(모양)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색광色光입니다. 우리가 보는 전등불(전깃불)이라든가 또는 등불 그런 불도 역시 그 본바탕은 본질은 이것은 심광心光입니다. 이러한 심광心光 색광色光 다 합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 한도 끝도 없는 광명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부처님 참배할 때 보면 부처님의 능상불能相佛?(불상) 뒤에 가서 탱화부처님이 계십니다. 탱화부처님은 가만히 보노라면 부처님 정상에서 빛이 나와서, 비록 탱화는 좁아서 미처 못 보이지만 그 빛이 무량세계無量世界로 몇 바퀴, 몇 바퀴 돌아가지고 다시 부처님 정수리로 딱 들어오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부처님의 광명이, 부처님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자성自性, 우리 본성本性, 우주의 본성을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부처님인데, 그런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빛이 나온 것을 우리한테 보이도록 그린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앞에 현관 앞에 가서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는 그러한 또 글귀가 있습니다. 광명변조는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내내야 무량광불無量光佛하고 같은 뜻입니다.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천지우주에, 불교말로 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조금도 간극이 없이 다 충만해 있는 것을 가리켜서 광명변조라 합니다. 천지 우주를 두루 다 비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지혜, 이러한 것을 깨달은 분이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요, 또는 그 뒤에 나오신 무수한 도인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바탕인 그런 불성佛性, 인격적 표현으로 하면 부처님, 철학적으로 하면 진여眞如 또는 하나의 물건一物,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마는 열반涅槃이나 도道나 그런 것도 역시 다 철학적으로 부처님을 표현해서 그렇게 합니다.
헌데 그러한 부처님 그러한 불성은 대체 어떠한 재주(능력)가 있는 것인가?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비록 그러한 부처님이 우리의 본성本性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이라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성이 별로 가치도 뭣도 없고 그저 한 물物(물질)이나 또는 요새(요즈음) 말하는 그런 소립자라든가, 원자나 그런 정도밖에 안 되면 그것은 별로 신통한 가치가 없습니다.
허나(그러나) 우리 본질인 본바탕인 불성佛性이나, 우주 만유의 본질인 불성은 무량無量의 무한의 모든 지혜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불성)을 공덕이 하도(너무) 많으니까 도를 통한 통달무애通達無碍한 그런 도인道人들이 몇 수만 년을 두고서 헤아리고 찬탄하고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헌데 그러한 무량공덕을 간추려서, 우리 불교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이러한 말씀으로 요약을 합니다.
상常은 무엇인가? 상은 항상 상常자, 상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영생해서 항시(항상) 상주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나 일체만유一切萬有의 현상은 비록 그때그때 무상無常해서 변화하고 또는 소멸한다 하더라도 본바탕인 불성佛性 이것은 영생상주永生常住합니다. 이것보고 항상 상常자 상 그럽니다. 그 다음은 락樂이라, 즐거울 락樂자 락이라는 말씀입니다. 락 이것은 일체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고생은 눈꼽만치도 없고서 모든 행복을 원만히 다 갖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이것이 락樂입니다. 그 다음은 아我라. '아'는 나 아我자입니다. 나 아我자, 이것은 조그마한 제한된, 번뇌煩惱도 일으키고, 또는 죽기도 하고 생사生死를 거듭하는 그런 조그마한 소아小我가 아니라,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자재할 수 있는, 신통神通이나 또는 지혜나 또는 기술이나 뭣이나 모든 것을 다, 하여튼 일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그때는 아我입니다. 불교 말씀으로 해서 이러한 아我(진아眞我, 대아大我)를 가리켜서 삼명육통三明六通 그럽니다. 삼명육통이라. 이런 것은 전문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풀이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일체공능一切功能을 할 수 있는 능력 보고 그때는 아까 말한 상락아정常樂我淨 가운데 아我라고 그럽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진아眞我인 동시에 대아大我인 셈입니다. 우리 같은 범부 아我는 이것은 소아小我고,, 소아의 껍데기를 벗어버려서 참다운 자기인 불성을 성취한 그런 아我를 가리켜서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 그럽니다. 그런 대아大我에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아까 말씀마따나 상락아정常樂我淨 가운데서 이것이 아我입니다. 그 다음은 정淨이라, 맑을 정淨자입니다. 이건 무엇인고 하면은 번뇌라 하는 것은 조금도 없고 우리 마음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해서 천지를 다 비추는 그러한 광명스러운 마음을 가리켜서 그때는 정淨 그럽니다. 흐림이 있고 또는 구름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고 하면 천지를 못 비추는데, 조금도 흠축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그러한 광대한 청정淸淨한 그런 경계, 이것보고 정淨 그럽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즐거울 락樂자 나 아我자 또는 맑을 정淨자. (상락아정常樂我淨) 이것이 우리 본성인 불성佛性에 갖추어져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성불成佛을 다 서두르고 있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먼저 이러한 나한테 갖추어있는 내 부처님, 일체만유의 근본인 부처님 이러한 부처님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합니다. 나한테 있는 부처님, 내 본질인 부처님이나, 또는 박가한테 있는 부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이나 그때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합니다. 원융무애란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만, 조금도 차이도 없고, 조금도 그런 어떠한 차별도 없고 이것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원융무애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넓은 바다에서 바람의 연緣 따라서 이렇게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가 생기고 물거품이 생깁니다. 그 파도나 거품이나 그것은 좀 낮은 것도 있고, 높은 것도 있고 대소大小의 차별은 있고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물이란 점에 있어서는 물은 똑같은 물이듯이, 현상적인 사람은 비록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또는 일반 다른 동물인 개나 소나 돼지나 또는 돌멩이나 또는 산이나 냇이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그와 같이 천지만유天地萬有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본성인 부처, 불성인 점에서는 그때는 똑같습니다. 원융무애합니다.
상相(모양)은 천차만별이나 성性(성품)은 똑같습니다. 불성佛性은 똑같습니다. 이러한 불성佛性 가운데 들어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 이것이 아까 말씀마따나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영생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일체 행복을 다 원만히 갖추어 있는 것이고, 또는 일체지혜나 일체기행一切機行이나 그런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고 또는 청정해서 천지우주를 다 비추는 것이고, 이러한 끝도 갓도 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의 불성공덕佛性功德입니다. 이렇게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갖기 위해서 무진無盡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보배寶貝하고, 위대한 그런 보물도 많이 있고 또는 가치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것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히 멸치(멸하지)않는 가치 이것은 역시 우리한테 있는 불성佛性입니다. 몇십 년 살다가는 하찮은 우리 이 목숨을 천만개 내버려둬(내던져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소중한 보배입니다. 이러한 보배이기 때문에, 이러한 보배를 위해서 무수한 분들이 생명을 천번만번 다 희생을 시킨 것입니다.
- 19831022 청화큰스님 지리산 백장암 만등불사 법문 중 일부말씀
영상법문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REnYZ-n5R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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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큰스님의 대중초기법문이 1983년 백장암 만등불사 법문입니다. 큰스님의 보배로운 말씀이 담겨있는 법문입니다.
일부 법문 내용을 올려드린 후 다음주에 전체법문을 올릴예정입니다.
영상법문은 아침에 공개예정이오니 큰스님의 육성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