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가 어려울수록 배워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힘들게 돈을 모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도 힘들게 일을 해 돈을 벌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러면서 했던 일 중 하나가 오렌지 농장에서 수확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하는 일은 너무 고됐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일이 오렌지를 땄지만 급료조차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시를 피해 건성건성 일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안창호 선생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오렌지나 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초석을 닦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조국을 생각하며 더 성실하게 일합시다. 언젠가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갑자기 오렌지 농장 주인이 안창호 선생을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고 나서 한인이 맡은 구역에만 유독 수확량이 늘었습니다. 당신들의 급료를 올려주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인들을 고용할 예정입니다.”
작은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지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성실함보다 더 큰 재능이나 은사는 없습니다. 도산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성실이 가진 힘, 한인들 전체의 위상을 높이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광야의 여정에 대해서 리바이벌(재교육)을 하는 책입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출애굽과 광야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줌으로서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강하게 담겨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절로 얻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땅이지만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해야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1절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삶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행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듣고 새기지 않는다면 복된 삶은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십시오. 자주 묵상하고 명령으로 생각하고 지키십시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더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나안 정복의 열쇠입니다. 수1: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신앙생활에 왕도는 없습니다. 평안한 삶과 형통한 삶의 비결은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지켜서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그 말씀을 힘으로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엡6:17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살아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세상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삶에 열매가 있는 성도로 살기 위해서 말씀을 먹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삶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왜 가나안으로 곧바로 인도하지 않고 40년을 광야에서 살게 하셨을까요? 보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 걸렸습니다.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든 여정이었을까요? 저는 광야 40년 전체를 한눈에 본다면 분명하게 보이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을 하지만 작심삼일이 대부분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도 성실함을 지켜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제가 돈 욕심에 토스에서 하는 걷기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상금이 5백만원, 대회라고 해도 혼자 걷고 홈페이지에서 인증해서 열흘을 하는 겁니다. 대회가 아닐 때는 그냥 운동삼아 걸어서 만보를 걸었는데 상금이 걸렸잖아요. 그래서 조금 더 큰 책임감 아니 돈 욕심에 10일을 비오는데도 걸었어요. 저를 참 안됐다는 표정으로 보시지 마세요. 그렇게 열흘을 걷고 상금은 랜덤으로 주는데 98원 받았어요. 완주한 사람이 4만명이 넘었으니까... 두 번째도 참가했는데 이번엔 열흘 못하고 91원 받았고, 그제부터 세 번째 참가했는데 아직 한번도 만보를 못걸었네요. 매일 아침 새벽묵상을 보내는 일도 성실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해보세요. 얼마나 꾸준하게 할 수 있는지 최소한 40년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마치 칸트 같으셨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키가 작고 등이 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그는 시계같은 존재였습니다. 건강을 지키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매일 오후 3시30분에 산책을 했습니다. 모자를 쓰고 정장차림에 지팡이를 쥐고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합니다. 한번은 루소의‘에밀’을 읽다가 산책을 빼억자, 온 동네 사람들이 시간을 착각해서 약속을 어기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배민의 원조가 하나님이십니다. 40년 동안 매일 아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배달하셨습니다. 해뜬 후에 주면 다 사라지니까 해뜨기 전에 주셔야 했습니다. 매일 낮에는 구름 장막을 펼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셨습니다. 밤이 되면 불의 장막을 펼쳐서 지켜주셨습니다. 40년 동안 이 일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틀림없이 하심으로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이런 성실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훈련의 장소입니다. 성실하게 훈련받고 가나안에 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땅이, 시간이 광야의 시간입니다.
먼저 겸손의 훈련입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발을 맞춰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는 대적이 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동행하십니다.
왜 광야 40년 동안 60만명이나 되는 소중한 생명들이 다 죽을때까지 광야의 여정을 멈추지 않으셨을까요? 40년을 한결같이 그의 백성들을 볼보시고 먹이신 하나님이 잔인한 분이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들이 교만을 갖고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곧 그 땅을 잃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훈련이 되어야 누가 무시해도, 존중해주지 않아도 상처를 받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성도가 됩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어 가는 생명을 위해 일하던 박사가 모금을 위해 자신의 고향에 기차를 타고 온다는 소식에 고향 사람들이 살아있는 성자를 보기 위해 기차역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박사가 3등칸에서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열차에는 “4등칸이 없군요.”예수님의 겸손이 몸에 배였기 때문에 되는 행동인 것입니다.
요즘 그 정도 유명하면 비즈니스석 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누릴 자격이 있고 돈도 있지만 자신을 늦 낮추고 살아가는 겸손의 훈련이 열매맺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잘난 척하고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살면 광야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교만을 회개하고 늘 겸손하십시다.
두 번째는 성숙을 위한 test입니다. “너를 시험하사”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은 쉬운 것이 없습니다. 운전면허도 어려운 분들에게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시험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꾸 시험을 합니다. 왜요? 갤럭시 Z플립이 독일에서 20만번 접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많아 해요? 소비자들의 만족을 위해서 사용할 때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서 합니다.
사람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꾸 해서 이 사람이 쓸만한 사람인지, 작은 장애물에도 포기하는 사람인지? 정말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지? 테스트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하신 시험은 한가지입니다. 말씀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
다른 말로 환경인가? 약속인가?의 시험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테스트 또한 아브라함이 안정된 삶의 환경에 취해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가?를 확인하는 테스트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이런 테스트를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 잘되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속에서 더 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더 큰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이웃에게 복을 나누는 통로가 되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테스트를 통해서 성숙해져가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모리스 목사의 책 <꿈을 좇을 때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시험>에 보면 저자는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보다 현재 처한 상황에 집중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흔들 때 흔히 쓰는 거짓 증언이“그 사람하고는 처음부터 안 맞었어”그런데 그 말이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돌이켜 보면 딱 맞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도 그랬을까요? 처음부터 안 맞는 사람들 힘들게 살게 하다가 갈라놓는 게 뜻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서 예수님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배우며, 도우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늘 말합니다. “네 가정은 가망이 없어, 넌 틀렸다구, 넌 이제 다시 회복할수 없어, 하나님의 계획도 네가 다 망쳤다구!”받은 상처를 보면 그 말이 맞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재앙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소망을 주시기 원합니다. 테스트의 목적은 성숙이지, 절망과 좌절로 희망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테스트입니다. 마라의 쓴 물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그 물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주셔서 쓴 물이 아닌 그 물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넘실대는 바다가 아닌 그 바닥의 마른 땅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험은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숙해야 열매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 번째로 은혜로 사는 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광야에서 40년을 농사짓고 살아야 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광야는 농사지을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40년을 살았습니다. 물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없고, 짐승 먹일 풀도 없고, 바람과 모래뿐인 땅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기적입니다. 지금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이 광야를 살아가며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4절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락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 묻힌 사람이 60만명입니다. 우리 광야에서 인생 끝내지 맙시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 삽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이루어집니다.
얼음이 물에 뜨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물만의 아주 특별한 성질입니다. 물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물질은 얼면 다 물 아래 가라앉습니다. 물 분자에는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해 있습니다. 결합 각도가 104.5도로 넓은 V자 모양입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나뭇가지처럼‘V’자 끝에 또‘V’자 모양으로 계속 붙으면서 얼음이 되기 때문에 분자 사이에 공간이 넓어지고 부피가 물보다 더 커집니다. 물보다 더 커진 부피 때문에 비중이 더 낮아져 물 위로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불처럼 수면 위에 얼음을 덮어 물속 생물이 얼어 죽지 않도록 따뜻하게 지켜줍니다. 기가 막힙니다. 마6:26절에“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작은 피조물도 보살피는 하나님의 은혜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겨울의 추운 날씨속에 얼음을 주신 은혜를 보듯이, 광야만 보지 말고 성실하게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광야 40년 그의 백성에서 성실하셨던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을 위해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숙한 삶을 위해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에 성실하십시오. 날마다 주시는 새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은혜에 성실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