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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金) 춘분(春分)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덕수궁서 개최
← 1946년 3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 대표 아놀드 소장(왼쪽)과 소련 대표 스티코프 중장이 개최 전 담소하고 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됐다. 미국측은 아놀드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 중장이 대표를 맡았다.
미소공동위는 제2차 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즉 한반도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의 실시와 더불어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장차의 독립에 대비케 한다는 내용에 따라 설치됐다.
미소공동위는 4월 17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한국내 협의대상자가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이 유명한 `코뮤니케 제5호`이다.
그러나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소간에 논란이 벌어져 끝을 맺지 못하자 난항 끝에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조선
[1956년] 시인 박인환 사망
← ‘목마와 숙녀’ 박인환 시인
1956년 3월의 어느날, 몇몇 문인과 음악인이 명동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거나해질 즈음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즉석에서 휴지에 쓴 한 편의 시를 동석한 작곡가 이진섭에게 건네자, 작곡가는 단숨에 그린 악보를 옆자리의 나애심에게 전달하며 노래를 청한다.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을 노래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인환은 ‘명동의 백작(伯爵)’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멋쟁이였다.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게다가 한껏 멋을 부려 명동을 찾을 때면 명동은 언제나 그를 반겼다. 박인환은 다방 ‘동방싸롱’ 혹은 유명무명의 술집에서 술과 낭만 그리고 문우(文友)들과 어울리며 현실의 고통을 시와 술로 삭였다. 책과의 인연도 남달랐다. 책을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서가였고, 해방 후에는 2년간 파고다공원 근처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숨진 곳도 지금의 교보문고 후문쯤에 있었으니 죽어서까지 책과의 인연을 이어간 셈이다.
박인환이 “답답해, 생명수(약)를 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심장마비로 요절한 것은 1956년 3월20일, 30세 때였다.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것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지인들은 그가 평소 좋아했던 조니워커 술과 카멜 담배를 시신과 함께 망우리에 묻었다.
[1828년]노르웨이의 시인. 극작가 입센 Henrik (Johan) Ibsen 출생
1828년 3월 20일 태어남 / 1906년 5월 23일 죽음
입센은 근대 사실주의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이다. 20대 초반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잡문가·연출가·미술감독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1864년 이탈리아로 이주한 뒤, <브란 Brand>·<페르 귄트 Peer Gynt><1867) 등으로 뒤늦게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시작에 몰두하다가 <인형의 집 Et dukkehjem>(1879)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사회극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만년에는 사회적 문제에서 인간의 어두운 내면으로 차츰 시선을 돌려 <바다에서 온 부인 Fruen fra havet>(1888)·<헤다 가블러 Hedda Gabler>(1890) 등 좀더 심리적·상징적 성격이 강한 희곡들을 썼다. 흔히 근대 시민비극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33년] 한국 무용가 공옥진(孔玉振) 출생
← 일인창무극인 공옥진의 동물춤
남도판소리의 대가인 대일(大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익혔다. 그후 일본에서 최승희문하에 있으면서 천대받는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한동안 영광(靈光)의 다리 밑에 살며 문전걸식했다. 결혼에 실패하고는 불갑사(佛甲寺)에서 2년 2개월 동안 수진(秀眞)이란 법명으로 수도생활을 했다. 1947년 국극협회·임방울창극단, 1951년 김연수 우리악극단에 참가했다. 1961년까지 김월산 여성국악단·박녹주국극협회·조선창극단 등 많은 국악단체에서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그후 10여 년간 영광에서 농사지으며 지냈다. 1973년 남도문화제 등장을 계기로 '1인창무극'을 창안하고, 1978년 공간사랑 등 명무전(名舞展) 공연에서 아쟁·대금·장구를 잡아놓고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1인창무극을 선보였다. 그중 〈심청가〉과 〈수궁가〉에서 특징을 보여 일반대중 및 대학가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곱사춤·문둥이춤·앉은뱅이춤·외발춤·덩치춤·동서남북춤·오리발춤 등 기존 57가지에 이르는 종목을 비롯해 허튼춤·턱붙은곱사춤·엉덩이빠진곱사춤·절름발이곱사춤·오리발병신춤 등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냈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문순태의 소설 〈병신춤을 춥시다〉(1982)로 그녀의 일대기가 소설화되기도 했다.
익살과 청승맞음, 숨김없는 꾸밈새 속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은 걸인생활 속에서 터득한 민중적 세계관과 특유의 흉내 솜씨가 빚어낸 것이다. 그녀는 눈물과 웃음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몸으로 깨친 민중예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중간평가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발의되어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이 확정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은 민주화의 추진, 5공과의 단절, 올림픽 이후의 중간평가 등의 문제를 안고 출범하였다.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을 획득하였다.
그 결과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이 33.9%를 차지함으로써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형성되어 5공비리 청산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간평가가 유보되고 자치단체장선거가 연기되면서 민주화에 역행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어 1990년 1월 22일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함으로써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naver
[1995년] 아사하라 쇼코, 도쿄에서 독가스 테러 감행
1995년 3월 20일 도쿄[東京] 중심부의 쓰키지 역[築地驛]과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히비야[日比谷]·마루노우치[丸の內]·치요다[千代田] 선 등의 15개 지하철역에서 아침 출근시간에 독가스가 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승객 12명이 숨지고 5,500여 명이 독가스에 중독되어 많은 사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경찰수사는 옴 진리교라는 신흥 종교단체에 집중되었다. 옴 진리교는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전직 침구사 겸 요가 교사 출신의 마쓰모토 치즈오[松本智律夫]가 설립한 단체로 지난 1989년 합법적 종교단체로 등록되었다. 일본 당국은 사건 발생 며칠 뒤 2,000여 명의 경찰관을 동원해 도쿄 옴 진리교 사무실과 야마나시 현[山梨縣] 가미쿠이시키의 연구소를 급습해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에 사용된 신경 독가스 사린의 제조약품을 압수했다. 5월 16일 아사하라와 옴 진리교 지도부 16명이 검거되었고, 10월 26일부터 아사하라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옴 진리교 교단은 1952년 제정된 파괴활동방지법이 적용되어 해산되었다.
[1920년] 실업가 최준문(崔竣文) 출생
1920. 3. 20 공주~1985. 6. 21.
1939년 3월 남만주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했다. 1945년 8월 동아건설(주)의 전신인 충남토건사를 설립했고, 1949년 동(同)사를 동아건설합자회사, 1957년 동아건설산업합자회사로 상호변경하고 대표사원(사장)에 취임했다. 1958년 동명증권(주), 1966년 동아콘크리트공업(주)을 각각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68년 대한통운(주)을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했으며1968년 대한증권협회 부회장, 대한통운경남기업(주) 회장, 1969년 대한통운(주) 회장, 한국화물자동차(주) 회장, 1972년 동아건설산업(주) 회장, 1976년 동아콘크리트공업(주) 회장을 각각 역임했다. 1977년 재단법인 공산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1978년 대전동아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980년 공산문화상을 창설했다. 1985년 동아 그룹 명예회장에 취임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경제신문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59년 대한수리조합회장 표창, 1963년 건설부장관 표창, 1963년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식산포장, 1969년 대통령 산업포장, 1970년 철탑 산업훈장, 1971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 1974년 은탑 산업훈장, 1977년 금탑 산업훈장, 1978년 새마을포장 등을 받았다.
[2004년] ‘국민여왕’ 칭송 율리아나 네덜란드 전 여왕 사망
정식 이름은 Juliana Louise Emma Marie Wilhelmina.
1909. 4. 30 네덜란드 헤이그 출생
네덜란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율리아나(94) 전(前) 여왕이 2004년 3월 20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빌헬미나(Wilhelmina, 1880~1962) 여왕의 뒤를 이어 1948년부터 1980년까지 네덜란드 여왕으로 재위했던 율리아나는 폐렴과 심장병으로 6년간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는 즉위 후 왕궁에 갇혀살아야 했던 전통을 ‘황금새장’에 비유, 수퍼마켓에서 직접 쇼핑을 하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국민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등 국민들에게 스스로 다가갔다. 특히 ‘폐하’라는 호칭을 ‘마담’으로 바꿔부르도록 하고, 자녀들을 일반 국립학교에 진학시켜 ‘국민 여왕’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역사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 승인과 동인도제도 식민통치 종식 등 변천 과정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남편인 베른하르트(Bernhard, 1911~ ) 공(公)과의 파경위기, 1964년 이레네 공주가 스페인의 카를로스주의자인 왕자와 결혼하고, 1966년 베아트릭스 공주가 독일 외교관과 결혼한 사실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을 연상시켜 한동안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76년에는 베른하르트 왕자가 미국의 록히드항공사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 다시 한번 위기를 겪었으나, 율리아나는 이런 위기들을 잘 견뎌냈다. 1980년 4월 30일 율리아나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히틀러 청년단원 출신인 독일 태생의 클라우스 반 암스버그와 결혼해 물의를 빚었던 딸 베아트릭스(Beatrix, 1938~ )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2003년] 미국, 이라크 개전(開戰)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격이 2003년 3월 20일 시작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15분 넘긴 19일 오후 10시15분(이라크시각 20일 오전 6시15분·한국시각 20일 낮 12시15분)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이라크를 무장해제하고 그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번 작전명을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으로 명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번째 공격은 선별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방부의 고위관리들은 첫날 공격이 본격적인 대규모 공습보다는 이라크 지도부 제거를 위한 제한적인 공격이라고 설명했다. 미군의 공격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 정보당국이 추정한 바그다드 안팎의 ‘가능성 있는 목표물(target of opportunity)’에 대해 홍해·지중해·아라비아해상의 미군 함정 6척에서 40여발의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워싱턴포스트와 CNN방송 등이 전했다.
미국 국방부 관리는 후세인을 목표로 한 크루즈 미사일 발사를 ‘목 베기 공격(decapitation attack)’이라고 표현했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된 지 3시간쯤 뒤인 이날 오전 8시30분(한국시각 오후 2시30분) TV로 중계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대미 항전’을 촉구하고 ‘승리’를 다짐했으나, ‘녹화 테이프’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이날 오전에만 30분 간격으로 3차례의 공습이 단행됐으며, 오후에도 항공모함 링컨호에서 발진한 7대의 전폭기들이 또 한 차례 공습을 했다. 국제적십자사(IRC)는 이날 공습으로 이라크 민간인 1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중동 성지 순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가 2000년 3월 20일 역사적인 중동 순방길에 나섰다. 이틀간 요르단 방문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성지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종교적 화해를 호소한 뒤 26일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은 1964년 교황 바오로6세 이후 36년 만으로 예수탄생 2000년을 기념해 이루어진 순방은 기독교의 부활절 준비기간인 사순절에 맞추어졌다.
교황은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과 성장지 나사렛 등을 순례했으며 유대교 성지 `통곡의 벽`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이슬람교 3대 성지중 하나인 하람 알 샤리프도 방문했다. 댜드 바솀에선 홀로코스트 당시 침묵을 지킨 가톨릭 교회의 과거에 대해 사죄했다. /조선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포스코(POSCO)는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로 설립된 국내 유일의 고로(高爐, 용광로) 업체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등 2개의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다. 주제품은 열간압연·냉간압연, 후판, 선재, 강편 등이다. 1970~1973년 103만t 규모의 포항제철소 제1기공사의 준공과 함께 가동을 개시하였으며 총 4기의 고로와 주물선고로 1기, 코렉스로 1기를 보유하고 있다. 광양제철소는 1987년 착공하였으며 현재 5기의 고로를 보유하고 있다. 연간 2800만t의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1956년] 튀니지, 프랑스로부터 독립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이탈리아와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그들 양국군이 패퇴한 1943년 5월까지 전쟁터가 되었다. 튀니지인의 민족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청년 튀니지’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한 저항이 계속되다가 1944년 이후에는 더욱 격화하여 마침내는 독립투쟁이 전국적인 반(反)프랑스 테러로 발전하였다.
1954년 7월 프랑스 총리 망데스프랑스의 용단으로 튀니지의 자치정부 수립이 약속되고, 1956년 3월 20일 독립하였다. 총선거를 거쳐, 1957년 하비브 부르기바가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이 됨으로써 계속되어온 입헌군주제는 폐지되었으며, 1975년부터는 부르기바가 종신대통령에 피선되었으나 1987년 11월 총리 Z.E.A.벤 알리가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부르기바를 해임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 출신 독일 소설가 이미륵(李彌勒, 1899~1950) 사망
본명 이의경(李儀景). 황해 해주(海州) 출생. 1917년 경성의학전문에 입학,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反日) 전단을 뿌리는 등 학생활동 주동자로 활약, 그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유럽행 여권을 받았다. 1920년 독일에 도착, 1921년 3월부터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했으나 건강 때문에 휴학, 192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1925년부터는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전공하여 1928년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1931년 《다메 Dame》지에 《하늘의 천사》를 처음으로 발표, 그후 민족적인 경향이 짙은 단편적인 문학작품을 독일어로 독일 신문·잡지에 수시 발표했다. 그의 문학은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동양문화의 전통과 풍습을 주제로 하였으며, 1946년에는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발간되어 전후 독일문단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영문 및 국문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일부는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독일학생들에게도 애독되었다. 1947년부터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강사로 있다가 1950년 3월 위암으로 죽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경상북도 왜관(倭館)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한 유일한 한국작가이다.
[이미륵 연보]
1899. 3. 8. 해주 출생
1905 서당을 다니기 시작
1917년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 입학을 하였으나 1919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후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서 잠시 일을 한다.
1920년 Muensterschwarzach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 1921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등록하고 의학공부 시작
23년 하이델베르크로 대학을 옮김. 수업 중단
25년 뮌헨으로 옮겨 동물학 수업
28년 동물학 박사학위
28년부터 붓글씨 가르치기
31년 "Dame"란 잡지에 "Nacht in einer Koreanischen Gasse"발표, 작가활동 시작
46년 "Der Yalu fliesst" 발표
48년-50년 뮌헨 대학 동양학부 연구소 동약학과(한국학, 중국학) 학과장 역임
50. 3. 20. 사망, Graefelfing 묘지에 안장
[1935] 페르시아(Persia) 국호를 이란(Iran)으로 개칭
제1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국토는 싸움터로 변하였다. 그 결과 이란에 진출하려던 영국·러시아에 눌려 반식민국가 상태를 면치 못하다가, 1918년 페르시아-영국조약으로 영국보호령이 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이란 카자크 병단(兵團)의 대장(隊長) 레자한이 무력 정치개혁을 일으켜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1925년 스스로 레자샤라 칭한 뒤, 팔레비왕조의 기초를 닦았다. 레자샤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고, 치외법권의 철폐, 철도의 부설, 여성의 차도르 착용 금지 등 후진성 탈피에 노력하는 한편, 각종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였다. 이어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지속적으로 유럽세력 배제를 위한 투쟁을 펼치는 한편, 1935년에는 국호를 이란으로 바꾸었다.
[1916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1915.11.25 중력장 방정식 완성)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으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1770년] 독일의 시인 횔덜린(Hölderlin, Friedrich, 1770~1843) 출생
← 횔덜린, Franz Karl Hiemer가 그린 파스텔화(1792)
슈바벤의 네카 강변 라우펜 출생.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의 수도원 부속학교, 1788년에는 튀빙겐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과, 그리고 헤겔 ·셸링 등 뛰어난 학우들과의 교유에 열중하였다. 졸업 후 동향 선배 실러의 주선으로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그런 관계로 예나에도 거주하였는데, 괴테 ·실러 등은 자기와는 이질적(異質的) 존재임을 깨닫고 I.칸트, 특히 J.G.피히테 철학의 추상적 세계에는 몸담아 있을 수 없어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 주제테와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횔덜린은 그녀에게서 그리스적인 미(美)와 조화의 화신을 발견하였고, 그녀도 그의 순진한 심정을 보고 서로 경애(敬愛)하였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Hyperion》 및 그 밖의 많은 시편(詩篇)에 등장하였으며 그 작품은 모두 불후(不朽)의 것이 되었다. 3년 후 비련의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하우프트빌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1802년경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36년간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았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나오지 않았지만 횔덜린 특유의 작품은 단편으로 끝난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1797∼1799)을 비롯하여, 프랑크푸르트 시대 이래의 시작품(詩作品) 《디오티마 Diotima》 《디오티마를 애도하는 메논의 탄식》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歸鄕)》 《라인강》 《평화제(平和祭)》 《유일자(唯一者)》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이들 작품에서 풍겨오는 것은 잃어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한탄, 자연과 인간의 재생에 대한 원망(願望), 현재의 암흑시대에서 신들을 두려워하고, 그 재림을 믿으며 신들의 말을 노래에 담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적 시인의 사명감이었다.
그밖에
2000년 바이러스성 가축 질환 `구제역` 파주에 첫 발병
1999년 유럽, 광우병 파동
1995년 아버지를 살해한 현직교수 김성복 구속
1992년 일본 가네마루 신자민당 부총재 권총 피습
1982년 체육부 발족
1978년 제26차 남북적십자 실무회담, 북측 불참으로 유회
1976년 볼쇼이극장 창립 200주년
1973년 국무회의, 정부 각부처에 대변인제 설치 의결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육사졸업식에서 북한에 4대군사노선 포기 등 5개 평화원칙 제시
1970년 독립운동가 이규갑 사망
1966년 우간다에 강진
1964년 북한-중국 국경조약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발효
1964년 북한, 어선 두척과 선원 26명 납북
1963년 중국-미국 정상회담, 쿠바제재 공동선언
1963년 윤보선-허정 산책데모
1963년 감사원 출범
1958년 서울-제주간 여객기 취항
1957년 김창룡 사건 관련 강문봉 중장에 사형 구형
1952년 미 상원, 對日평화조약 비준안 승인
1947년 미국-필리핀 군사기지 협정 조인
1946년 조선신문협회 발족
1946년 한국독립당 개편, 위원장에 김구, 부위원장에 조소앙
1915년 민적법 개정
1904년 일본 제1군 진남포에 상륙
1902년 민간 최초로 한성~인천간 전화 가설
1890년 이탈리아 가수 질리 출생
1852년 해리어트 스토우의 반노예주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출간
1835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 출생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727년 만유인력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 뉴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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