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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탄절 후 제1주일)
새로운 빛, 새로운 시선
사61:10~62:3; 갈4:4~7; 눅2:(22~24),25~38
오늘은 성탄 후 첫 주일이자 2023년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뜻하지 않게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공동기도에서 기도드린 것처럼, 성탄의 빛이 비추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런저런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번 교회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른, 대림절의 기다림 끝에도, 또 성탄의 빛이 비춘 이후에도, 우리의 상황은 크게 변하거나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절의 기다림이나 성탄의 빛이, 성탄 이후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성탄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복음서가 전해주는 이야기가 두 개가 나옵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정결예식입니다. 거기서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노인은 평생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눈으로 직접 보는 감격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이 전하는 동방박사와 헤롯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깜작 놀랍니다. 한 마디로, 왕이 될 아기가 자기도 모르는 어딘가에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이에 놀란 헤롯왕은 자신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전해들은 대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의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두 가지 비극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어린 예수를 들쳐 업고 이집트로 급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베들레헴 근처에 사는 두 살 배기 아래의 아기들이 모조리 죽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 어머니들의 통곡이 흘러 나왔습니다. 성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큰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울려 퍼졌던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천사의 찬송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의 나라로 도망가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고, 이 땅의 힘없는 부모들은 그 품에서 아기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뜨고 보아야 했으니, 이것이 어찌 “온 누리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었겠습니까?
우리가 나아가는 성장 방향에도 이런 고민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의혹과 불신, 그럼 그렇지 하는 실의, 무기력과 타성에 젖어들고 마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날로 힘들어지고, 나아지는 것은 없으면서, 매일매일의 지루한 일들의 반복은 무기력과 타성에 젖게 합니다. 우리의 나갈 방향을 잃게 하고 불신과 실의에 빠지게 합니다. 뭔가 될 것 같다가 다시 제자리로, 아니 더 후퇴하여 물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술적으로 비극을 피해가는 부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또 조심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닥치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많은 고난들이 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압니다. 문제는 힘든 일들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응하고, 그것을 다룰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든든해지고 얼마만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고 또 내일이면 해가 바뀝니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오늘과 내일이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구분하고 경계를 지어놓음으로써, 삶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곤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지혜입니다. 꼭 새해가 아니어도, 언제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혜!
송구영신예배 때마다 제가 주보에 올렸던 글이 있습니다.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더 멀리 바라본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더 깊이 바라본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른 빛에서 바라본다.” 더 멀리 바라보고, 더 깊이 바라보고, 모든 것을 다른 빛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도 이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가능합니까? 자신 안에 희망과 사랑과 믿음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자신의 욕구를 넘어, 자기중심을 넘어, 자기 기분과 자기 생각을 넘어, 희망, 사랑, 믿음, 향주삼덕을 키우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의식을 확장하고 우리의 전체성을 완성하고, 개성화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얻어지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또 다른 성탄 이후의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자녀를 출산한 여인은 정한 시간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정결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또한 맏아들을 낳은 경우 그 맏물인 아들을 하나님께 봉헌해야 했습니다. 이런 예식을 행하고자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이 많은 시므온이라는 한 노인과 여든 네 살이 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는 자신들이 평생 기다려오던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이 아기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시므온에 대해서 이름 외의 그의 신상은 밝히지 않지만, 그의 내면적인 모습은 비교적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그를 “성령의 사람”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깊은 갈망과 동경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리라,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갈망과 동경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저 피상적으로, 물리적으로 아기예수를 만나본다는 의미를 넘어, 이러한 갈망과 동경이 그의 삶을 규정하고, 전 생애를 통해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를 첫 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본 것이지요. 너새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그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죽을 때 자신의 한 생애를 이런 말로 마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갈망과 동경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빛을 보았습니다. 자기 민족에게만 비추고 자신에게만 비추는 빛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 이방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자신과 민족과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다른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과 빛만 본 것이 아니라 고통도 함께 보았습니다. 이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 아기가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므온은 보았습니다. 오히려 이 아기는 칼이 되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를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과 칼을 본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그리고 우리의 온전한 성장은) 이렇게 빛과 칼, 빛과 어두움의 교차입니다. 이 둘이 함께 직조해 가는 태피스트리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은 남성 시므온과 짝하여 여성 안나를 소개합니다. 누가복음은 안나를 “여든 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전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이 여인이 하나님 안에서 관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도 그 중심에 고요함이 잘 자리잡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해를 남편과 살고 나머지 평생을 과부로 살았던 여인으로서, 그녀의 삶은 시련과 아픔으로 점철되었을지라도, 안나는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그 고요의 자리에서 안나는 바로 아기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평생을 기다리던 은총, 즉 평생 하나님을 찾았던 그 찾음으로 그녀는 하나님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두 노인의 마지막 삶을 보았습니다. 저는 요즘 잘 늙고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의 하루하루가 잘 늙고 잘 죽는 연습이겠구나 생각을 합니다. 오늘 두 노인이 평생 메시야를 기다려 왔다는 말은, 자신 안에서 메시야를 볼 수 있는 눈을, 의식을 키워왔다는 말과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 안에 믿음, 희망, 사랑의 의식을 키워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을 바로 메시야를 만나는 연습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안나가 밤낮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애썼는지도 보여줍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올해도 정말 많이 애쓰셨습니다. 내년에도 올해와 마찬가지고 우리에게 애쓸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빛에서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이 마련하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의 초대이며, 상속자라는 인증입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고 맞이하는가가 우리의 연습입니다.
오늘 구약의 이사야서의 본문도 기억하십시오.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사62:3) 누가 이것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렇게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함께 살아갈 형제자매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작고 미약하지만, 그러나 함께 자라는 모판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귀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형제자매라는 공동체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던 본회퍼 목사님의 “선한 힘으로”라는 시를 함께 읽음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본회퍼 목사님은 나치에 저항하던 독일 고백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다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1944년 12월 31일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은 1945년 4월 9일 나치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39세였고, 나치정권이 붕괴하기 20일 전이었습니다.
선한 힘에 든든하고 고요히 감싸여
신비로이 보호받고 위로받으며
나는 오늘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나 그대들과 더불어 새해를 향해 나아갑니다.
낡은 것들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
불행한 날들이 아직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지만,
아, 주님, 소스라친 우리 영혼에
당신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을 주소서.
넘치도록 가득 찬, 쓰디쓴 고난의 무거운 잔이
당신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선하고 자비로운 당신의 손으로부터
두려워 떨지 않고 감사하며 받겠습니다.
세상에 주신 기쁨과 저 태양의 찬란한 빛을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허락하신다면
우리의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생명은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 속에 주신 촛불들이
오늘 따뜻하고 밝게 타오르게 하소서.
원하신다면,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빛은 밤에 빛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적막이 우리를 깊숙이 둘러쌀 때
세상을 가득 채운 저 음악에 몸을 맡깁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감싸며 울려 퍼지는
당신 자녀의 모든 찬미 소리에.
선한 힘에 감싸여 신비롭게 보호받으며
우리는 고요히 다가 올 것을 기다립니다.
밤에도 아침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다가오는 새날에도 함께 계심을 확신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가오는 새해에 믿음과 희망가 사랑을 연습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멀리발라보고, 깊게 바라보고, 모든 것을 다른 빛으로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