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고
관공서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아직 9시가 안 된 시간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옆에 앉은 남편이 피식 웃는다. 나의 불찰로 일어난 일을 수습하러 가는 길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자녀를 사칭하는 전화금융사기는 구시대적 방법이라는데 생각하면 한심하기도 하고 점점 수법이 진화 된다는 것이 섬뜩했다. 위안이라면 그렇지만 마지막에 아들과 남편이 차단해서 다행스러웠다. 나의 신께 감사함을 전했다.
개인정보가 유출되어서 주민등록증 재발급부터 거래하는 통장도 새로 개설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휴대폰도 초기화시켜야 한다. 순간의 불찰로 번거로운 일이 생겼지만 감사함과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뒤처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휴가 중이라 모든 일을 함께해주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하루다.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증 재발급을 했다. 사진을 실물 사진으로 크기에 맞춰서 찍어 오라고 한다. 휴대전화로 찍은 것을 보내주면 안 되냐고 하니 이제는 안 된다고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냥 바로 사진관을 찾았다. 비는 내리고 마음은 급하고 곁에 있는 사람이 조금은 얼굴이 굳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 찍는 일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일상적으로 찍는 사진은 그래도 편안하게 잘 나오는 편인데 증명사진은 참으로 어색하고 어렵다. 이제는 마음을 접고 그냥 얼굴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촬영에 임했다. 재발급 신고를 마치고 은행에서 통장을 신규로 발급받았다. 카드도 새롭게 만들고 비밀번호도 바꾸었다. 한 번도 바꾼 일이 없는 오래된 어쩌면 비밀번호라기보다는 온 가족이 다 아는 현관문 비밀 같은 것이었다. 새롭게 모든 것을 바꾸고 나니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아지고 몸도 가벼웠다.
전화기를 초기화했다. 정보 노출로 초기화하는 전화기라서 번호나 사진을 옮길 수 없다고 해서 사진은 포기하고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걸러지는 나의 삶을 보였다.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번호들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번호도 단출해지고 갤러리 사진은 텅 비었고 전화기는 처음 나와 만났을 때처럼 새것이다. 날 것으로 다시 만났다. 나도 너도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뒤처리하는 통에 아침부터 점심까지 거르고 뛰어다녔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까 허기가 느껴졌다. 코다리찜을 먹었다. 남편에게 고마워서 내가 샀다. 얼굴이 핼쑥하니 어리바리한 아내 때문에 남편이 고생이다. 그래도 ‘이깟 일로 쫄지 말라’고 위로한다. 창밖에서는 그토록 기다리는 눈은 오지 않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3일간 꺼져 있던 휴대전화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인사한다. 카톡 화면에서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 2024년2월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