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비린내 난다.
보라,어느새 꽃 비린내 나는 여자를 보라.
인생길 한중턱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빛이 되어준 사랑,사랑은 어느 순간에 성큼 다가왔다.
사랑에선 꽃비린내가 났다.
사랑은 뭔가 시적인 것을 담고 있다.봄비가 내리는 저녁이나,
오동잎이 떨켜에서 뚝 떨어져 스걱스것 스쳐 구르는 가을 해거름에,간잔조름하게 눈을 내려뜨고
그의 숨결과 내음을 살며시 들이쉬게한다.
사랑은 깊은 우물물처럼 상당히 고전적이면서도 어린애의 살과같아서 어느새 부드럽고 아름다워지는 여자를 보라.
어른이 되어갈수록 복잡해지며 복잡하게 사는 것을 쉽게 하는 어른,
그래서 어른이 될수록 단순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사랑에 빠져 솔직하게 몰입하기가 힘든다.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 죽을 만치 절망하고 외로워 보라, 그리고 비로소 사람을 바라보라.
그때에 상처를 이긴 사람에겐 잃어버린 눈물같은 사랑이 보인다.
처녀시절의 사랑은 뿌리 없이 꺽어다 꽂은, 꽃 만발한 꽃가지 같은 것. 환하고 예쁘고 호사스러우나 뿌리 깊지 못하다.
젊을 땐 잘 생기고 육체적인 사람이란 흔하다.대신 인생에 대해서 표피적이고 어리석다.
꼭지만 틀면 쏟아지는 수돗물인 양 오래 참지 못하고 사랑의 완성인 그리움을 모른다.
그러나 삶의 환상과 좌절과 고뇌의 다리를 터덜터덜 건너 본 후 여전히 지성과 열정을 간직한다면,
그리고 마음의 작고 섬세한 부분에도 감동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마음속 자석이 사랑의 쇳가루를 저절로 끌어당긴다.
힘들게 살아본 사람의 느낌. 좀 살아 봐서 한눈에 전체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힘, 그 신비로운 힘으로 사랑의 문을 연다.
사랑의 문이란 얼른 알 수 있도록 삐그덕 소리나게 열리는 문이다.
그녀는 꿈이나 이상을 창고의 가장 깊숙한 데다 처박아두고 살았다.
지루하고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허드렛일에 절어버린 안면의 근육과 살색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화색이 너울거리고 몸짓은 진달래 꽃내음을 풍기며 연약해진다.
향내를 날리며 그 사람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 대고 불루스를 춘다.
어떤 기교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율법으로 율동하는 그녀의 몸은 그 남자의 심금에 가장 섹시한 음악이 된다.
너무 오래되어 자기도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게 하는 사랑. 너에게 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내가 너일 필요 없으며. 너도 나도 아닌 새로운 존재이게 하는 사랑.
하루 24시간을 일년 8760시간처럼 살게 하는 사랑. 보라, 어느새 무르익는 여자를 보라.
자기에게 있는 것에서 가장 정결한 것을 드리고 제 모습에서 가장 지순한 것을 받치는 사랑.
지나가는 그의 몇 마디로도 그의 인생을 단번에 이해하는 사랑.오래 전부터 서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랑.
생활의 갈피마다 문득 끼어들며, 떠올리면 언제나 처음 마음문 열던 그 모습 그대로 거기 그렇게 있는 사랑.
그리워하지 않아도 그리운 사랑.
그녀의 사랑은 조용했다. 고집 없이 쓸쓸한 목소리, 도톰한 살의 느낌, 부드러이 움직이는 동작,
목덜미에 감미롭게 흘러드는 입김만으로도 존 레논의 음악처럼 생활의 가락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살 것도 없고 넋 놓고 음미할 것도 없는데 지나다녀야 하는 시장통 같은 일상에 사랑이 오자,
아무리 바빠도 사랑할 시간은 충분해졌다.
그녀는 그와 함께, 둘이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아니, 혼신 다해 그 시간을 살았다.
낮은 산자락에 에둘린, 텅 빈 호숫가에서, 단내를 품으며 익어가는, 벼 이삭을 숙인 풍요의 들판에서.
조명이 저녁 어스름마냥 부드러이 조는 조그만 카페에 정물로 앉아.
피로에 지친 정신에게 안식을 주는라고 내려진 속눈섭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 시간들은 신비한 향기를 마시는 종교 의식 같았다.
어느 땐가, 이슬비가 실실이 내리는 오후. 외딴 찻집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앞산이 생활의 슬픔처럼 온통 젖고 있었다.
"저 숲의 초록이 깊어지네요. 고개깊이 숙이고 들여다본 우물속의 물색처럼 아득해져요... Blue blue my love is blue...
쓸쓸한 노래 한 가락이 들려 오는 군요."
그 말은, "사란은 사람을 조금 쓸쓸하게 해요. 제 손을 잡아 주시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름이 긴 인생이라는 다리를 건너는 얘기를 하지만 수다스럽지 않게 짤막하게 말하며.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지만 서로의 눈빛과 그 흔들림을 읽고 있듯이 듣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손과 손이 닿았다. 손끝의 체온이 따뜻한 전류가 되어 온몸에 흘렀다.
그것은 긴 소설을 읽다가 아주 멋진 부분을 다시 읽는 기분이거나, 모든것을 함축해 드러내는 주요한 어휘에 밑줄을 긋는 일 같았다.
"당신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어서, 모두 끌어낼 수도 없고 내가 들어설 수도 없어요. 그래서 당신을 송두리째 내 안에 품어버렸어요"
그녀는 열중해 읽던 소설의 끝을 접어 가슴에 그 책을 안듯이 덥석 사랑을 이해했다.
사랑은, 아주 작고 단단한 몇 톨의 설탕가루가 그의 손과 입술로 솜사탕으로 변화되는 일이다. 보라. 어느새 꽃구름이 되는 여자를 보라.
대부분 생활은 그녀에게 꿈과 사랑을 낡는 가방 속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덜컥 잠가 구석지에 밀쳐두라 했다.
다시는 어떤 사랑이나 이상을 꿈꿀 수 없는 그때가 오리니,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에 사랑의 유령을 찾아 제사 드릴 때 쓸 위패처럼,
생계수단과 뭇사람과의 동류성과 물질의 혜택이 결코 사랑을 주지 않는다.
생활을 계산적으로 영악하게 잘하는 성인들은 결코 사랑의 향기에 젖을 수 없다. 생활은 사랑을 아귀처럼 먹어 삼켜버리니까.
저 윈저 공은 신비한 감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기에 대영제국의 금빛 찬란한 권좌를 던지고 심슨 부인을 선택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폭풍우 지나고 더욱 단단해진 땅에 딛은 제 발등을 내려다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감성과 열정이 사장되고 말았는지를.
사랑은 진정 삶의 발화점이다. 사랑은 더위로 땀이 흐르는 몸의 냄새도 괘념치 않으며 만보기가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랑은 이미 상당히 저속하게 아름다운 것이므로 유치찬란하지만 진지한 진실이므로 사랑은 풀비린내인 듯
군기난향이나 백련향을 길어 올린다. 그렇다 해도 이승의 사랑은 결코 천상의 복음이나 4차원의 형이상학 놀이가 아니다.
세상을 건너온 만큼 사랑을 잃어버리긴 쉽고, 사랑을 감지하는 천진성의 더듬이는 잘려 나가 버린다.
그 무덤 같은 삶과의 결별이 사랑의 힘이다.
복잡하고 요란뻑적지근한 헤비메탈과 자동화기계 돌 듯 단조로운 랩 음악이 우리의 진정한 음악과 사랑스러운 춤을 빼앗아가는 시대.
캄퓨터와 이메일에서 홍수 지고 사태 나는 싸구려 정보들이 인간의 정신을 쥐고 흔들고 가두는 시대.
사랑이란 말의 범람에 사랑이 떠내려가고, 화면 앞에 널려진 사랑의 유희를 구경하느라고
자기 영육의 자유롭고 감정적인 실현의 사랑을 포기 하는 시대. 이 시대엔 사랑을 얘기하고 사랑할 사람이 참으로 먾지 않다.
사람다운 사랑을 만날 시간조차 믾지 않다. 현대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지성으로 과학신과 경제신을 양산했지만
그것으로 사람냄새나는 사랑을, 고전적인 사랑을 생산할 수는 없디.
더 이상 괴태도 없을 것이며 토스토예프스키도 다시 는 없을 것이다. 사랑다운 사랑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사랑은 고전적이고 느리고 자연적이어서 사랑에 알맞았다.
천박하지 않게 속되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도 품위있게 사랑했다. 박수소리 없어도 갈채를 보냈다.
옛 동네 대장간에서 담금질과 연단으로 거듭난 무쇠칼둔탁해보이면서도 벼려진 칼날만치 예리하다.
그녀의 등에 팔을 감은 손으로 그녀의 어르는 감촉은 세월 여일하게 현실이다.
보슬비 부슬거리는 저녁 창가에선 연인의 시름에 겨운 어느 날을 돌이키며 여전히 애틋해한다.
달빛만이 흥건히 몸을 어루만져주는 밤, 오래된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 를 레드 와인 한 잔과 교감하며 감상할 때도
그 사랑은 여지없이 세월의 강을 거슬러 그녀의 가슴에 흐른다.
보라, 어느 새 깊어지는 여자를 보라.
우아하고 거만한 야수처럼 그녀를 점령한 사랑. 사랑은 늘 정신적 차원의 문제이다.
늙어가면서도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진부하고 덧없기 한량없다 하겠지만, 사랑만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법이다.
커다란 누에마냥 풀밭에 엎드려 쉴 때, 바람에 쓸린 풀잎이 목 언저리를 간질이는 바람에도 사랑이...사랑의 느낌이.... 또 다가온다.
사랑한 그 사람이여, 사랑인 그 사람이여, 그녀는 오래된 유적지의, 낡은, 깨어져 조각난 쪼가리 물건들을 어루며 찬탄하는 것일 까.....
괜찮다. 지금도 그녀에겐 현실이고 진실이니까. 사랑이니까. 화면 속 책 속의 환상이 아니고 사이보그도 아니니까.
사랑은 그의 생활을 삶의 한 방편으로 받들고 캄캄하게 그냥 살아지는 그녀를 환하게 살게 했다.
보라, 어느새 꽃비린내 머금은 여자를 보라.
글:김용옥 시인, 수필,
중앙대 영문과 졸업
등단 : 1980년 시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는’
수상 : 전북문학상,박태진문학상,녹색시인상,백양촌문학상,전북예술상 등 다수
경력 : 한국시문학시인회 이사, 문학전문지<수필세계><수필과비평>
<지구문학>편집위원, 전북PEN 부회장
방송 : ‘06~’09.3 MBC라디오 여성시대 (김용옥시인과 시,수필, 책이야기) 등
저서 : 시집<세상엔 용서해야 할 것이 많다><누구의 밥숟가락이냐><그리운상처>
필집<生놀이><틈><아무것도 아닌 것들><생각 한 잔 드시지요>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는> 다수 문집 발간
첫댓글 아~~!!! 친구님 넘좋은 글입니다~~ 이제 보았어요~~ㅋㅋ 감사합니다 이 조촐한곳을 왕림하시다니~~ ㅎㅎ 우리 서로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