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용서에 대한 오해와 진실
소설가 이청준과 영화감독 이창동은 성경이 말하는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성경의 용서를 차용했다.
성경을 보아야 할 기독인들조차 영화만 보고 저들의 논리에 빠져 하나님의 용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아래 기독청년아카데미의 형제도 그런 잘못된 논리에 빠져있다.
피해자는 용서할 마음도 없는데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성경은 당연히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기독교는 위대한 것이다.
피해자가 용서할 마음이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할 때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논리다.
상대가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가 용서하고 싶을 때 용서하고, 용서하기 싫으면 용서하지 않는 그런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만약 성경이 그런 보편적인 용서를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특별히 기독인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일반적인 정서를 완전히 뒤엎는다. 삶과 사상에 있어서 혁명적인 발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용서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신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사랑이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밀양의 신애가 하나님의 용서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자기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괴수 중의 괴수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형수였던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이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21-35)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는 모든 빚을 탕감받을 수 있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받은 우리가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향해서는 어떤 용서도 허락하지 않은 채 그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다면 이는 얼마된 모순된 행위인가?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계신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때 가능한 일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구약의 모세율법은 동해복수법(同態復讐法)을 가르치고 있다.
동해복수법에 의하면 눈을 상하게 되면 상대방의 눈을 상하게 하고, 이가 상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를 상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모세율법의 동해복수법은 복수의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보호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비해 과도한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이상으로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이 구약의 동해복수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마저도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신다. 동해 복수법에 의하면 오른 뺨을 맞았을 때 나도 상대방의 오른 뺨을 때려야 하지만 성경은 그 경우에 내 왼 뺨을 돌려 댈 정도의 관용을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동해복수법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예수님의 혁명적인 발상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들은 불의한 자들의 횡포에 대해 언제나 관용하며 용서를 베풀고, 희생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의 용서는 반드시 정의에 기반을 둔 용서며, 가해자의 사죄가 용서의 전제조건이다. 만일 상대방이 죄를 지었음에도 그 죄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용서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용서는 무한정 가능한 것이지만 용서의 조건은 반드시 죄에 대한 인정과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은 범죄한 사람이 죄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조건 용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고백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죄에 더해 더 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밀양의 신애는 유괴범에 대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그는 이미 죄값을 치르고 있었으며, 이청준씨의 소설에는 그 유괴범이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말양의 신애는 성경의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스스로 파멸에 이른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모한 일을 허락한 교회에도 그 책임이 있다.
이청준씨가 소설을 쓰는 동기가 되었던 광주사태와 그 가해자들에 대한 용서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과연 5공의 군부세력은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진정한 용서를 구했는가? 지금까지 그들의 행위를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정한 용서를 구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용서받기를 원했다면 국가의 추징금에 대해서도 삭개오처럼 사 배나 갚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더 나아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배드민턴이나 치러 다닐 것이 아니라 광주사태와 5공화국 당시의 피해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남은 삶을 철저히 희생하는 것이 용서를 위한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서는 어떤 회개와 반성의 모습도 보기 어렵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청준씨와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의 용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은 요압에 대해 다윗이 솔로몬에게 전한 그 유언이 저들에게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왕상2:5-6)
첫댓글 사랑할 수 없을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을것 같은 존재를 용서하고.
용서는 무한정 가능하지만 용서의 조건은 반드시 죄에 대한 인정과 회개긴 전제되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