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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장말손가의 불천위 제사
이장희 추천 0 조회 90 14.06.11 22: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말손가의 내력


‘남 앞에 드러내지 말라’는 500년 유훈 지켜오는

공신(功臣)의 종가


인동(仁同) 장씨(張氏) 종가에는 아직도 아궁이가 남아 있다. 그래서 종가를 지키는 종손 장덕필(張德必)씨는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유물각을 비롯해 사랑채와 사당 등을 청소하고, 장작불을 때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종가의 문화도 다소간 바뀌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지만, 장덕필씨는 굳이 전통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그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는 중앙선 고속도로 영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면 바로 오른쪽, 낮으막한 야산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지금은 고속도로 덕분에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 됐지만, 고속도로가 나기 전까지 이곳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고속도로 인근이라고는 해도, 지금도 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터를 잡은 것은 ‘절대 드러나지 말고 은둔하며 살라’는 선조들의 유훈 때문이다. 인동장씨 종가는 500년동안 그 유훈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시애의 난 진압한 적개공신의 종가

인동 장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조선 명종때 건공장군 등의 벼슬을 지낸 장언상(張彦祥)때부터다. 그게 1500년대 중엽이었으니 400년 넘게 마을이 지속돼 오고 있는 셈이다. 이 마을의 지명은 지금은 화기리(花岐里)라고 돼 있지만, 당초에는 ‘화계리(花溪里)’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때 화기리로 바뀌었다. 꽃이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인들이 물을 뜻하는 ‘계’를 ‘기’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화계에 사는 인동 장씨들은 고려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조선 세조때 공신녹훈을 받은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송설헌은 장말손의 호다. 우리나라 인동 장씨들은 일반적으로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삼고 있지만, 문헌에 기록이 나온 것은 장계때부터라는 것이 종손 장덕필씨의 설명이다.

장말손은 세조때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의 녹훈을 받았고 후에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23세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29세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박사, 한성참군(漢城參軍), 사헌부 감찰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그후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사(兵馬都使)와 북평사(北評事) 등을 역임했다. 이런 벼슬의 행적을 보면 아마도 그는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인 듯하다.

특히 그는 북쪽의 변방을 지키고 있을 때 많은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온 여진족의 아지발(阿只拔)을 달래어 물리쳤다. 이때 적들을 물리친 공으로 그는 임금으로부터 패도(佩刀)와 옥피리, 은잔 한쌍 등을 하사받았다. 패도는 종가에서 보존하고 옥피리는 사위에게 주어 그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다. 은잔은 6·25 전쟁때 잃어버렸다.

이시애의 난 이후 그는 내섬시첨정(內贍侍僉正)과 장악원부정(掌樂院副正) 등을 거쳐 성종때는 공조참의(工曹參議) 및 예조참의(禮曹參議),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總管) 등의 벼슬에 올랐다. 그의 나이 47세 되던 해 그는 자신이 낙향할 터를 미리 보아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당시의 예천군 화장(花庄),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벼슬을 사임하고 화장으로 내려와 송설헌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다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가 세상을 뜨자 임금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고, 나라의 지사(地師)로 하여금 묘자리를 잡도록 해 현재의 예천군 호명리(虎鳴里)에 산소를 모셨다. 그리고 이조판서로 증직하고, 안양(安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 왕명으로 그려놓았던 영정과 함께 불천위의 지위를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복군의 졸기(卒記)가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그의 간략한 행적과 함께 장례방법과 시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연복군이 졸하니 철조(輟朝), 조제(弔祭),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 시호는 안양(安襄)인데, 화목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이 안(安)이고, 일에 말미암아 공(功)이 있는 것이 양(襄)이다.’

‘철조’란 조회를 폐하는 것을 말하며, 조제나 예장은 의식에 맞추어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공신의 예우로써 장례를 치른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점필재 김종직과 허백당 홍귀달과의 교분

연복군은 조선시대 대학자중의 한 사람인 점필재 김종직과, 당대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과 남다른 교분이 있었다. 점필재와는 사마양시 및 문과에 함께 급제한 동기생이었고, 허백당과는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했다. 특히 허백당은 불의에 굽히지 않은 충신으로, 연산군때 무오사화에 연루돼 투옥되기도 했고, 끝내 자신의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어겨 귀양을 가다가 죽은 인물이다.


聞君談笑能却賊/魚樵不敢近城池

轅門一夜無傳檄/醉草靑天問月詩


듣자니 그대 웃음속에 적을 물리쳐/자잘한 무리도 얼씬하지 못했다지

병영에 하룻밤 조용한 그대로/취흥겨워 이태백의 달노래만 읊조렸지


여진족의 아지발을 달래어 물리친 일을 두고 허백당이 그에게 보내온 시다. 연복군이 자신이 은둔할 장소로 문경땅을 고른 것도 어쩌면 허백당과의 친분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인동 장씨들이 살던 곳은 지금의 구미시에 있는 인동이었기 때문이다. 허백당 홍귀달은 문경사람으로 지금도 그의 묘소가 문경에 남아 있다.

연복군은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중종때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장맹우(張孟羽)다. 그는 외직인 황해도 도사(黃海道 都事)로 나가 있다 46세에 병사했다. 그는 특히 효심이 뛰어나고 벼슬에 있을 때도 청렴한 자세를 유지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그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조용히 은둔하며 남앞에 나서지 말라’는 유훈

인동 장씨들이 영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맹우의 아들인 장응신(張應臣)때부터다. 장맹우가 42세에 일찍 병사하자 당시 고작 12살에 불과하던 응신은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응신의 사람됨을 보고 당시 영주에 살던 남평(南平) 문씨(文氏)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데려간 것이다. 그러나 그역시 31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며, 남앞에 나서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장응신은 부친의 생애를 통해 정치의 무상함을 느꼈던 듯하다.

이 한마디가 후손들에게 유훈처럼 내려와 그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이도 거의 없었고, 남앞에 나서지 않는 등 드러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직 한적한 산촌에서 은둔하다시피 지내온 것이다. 일제때도 많은 사람들이 신학문을 공부했지만, 종가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특히 장손들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더욱 엄격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집안의 귀중한 유품들인 보물이며, 고문서들을 간직해온 비결이기도 했다.

“우리 인동 장씨가 자리잡은 터는 바로 선조의 유훈을 지키기 위해 고른 장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자리잡았던 덕분에 집안의 가보와 같은 보물들을 온존히 보존해올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연복군 어른이 문경의 화장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던 점을 감안해 같은 ‘화(花)’자가 들어가는 화계리를 택한 거지요.” 종손 장덕필씨의 설명이다.

지금의 터를 잡고 종가를 건립한 장언상은 장응신의 손자다. 장응신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은 윤희(胤僖), 작은 아들은 수희(壽僖)였다. 그는 큰 아들에게는 학문을 시키는 대신 집안을 보존할 책임을 주었고, 다만 작은 아들에게는 학문의 길을 열어주어 퇴계의 문인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들 형제는 퇴계의 부인인 허씨와 이종사촌간이기도 했다.


전통을 고수하는 남다른 고집

인동 장씨 종가의 전통에 대한 고집은 남다른 데가 있는 듯하다. 연복군의 영정이 보물로 지정될 때의 일화나, 그후에도 영정에 대한 종가사람들의 자세를 보면 선조의 전통에 대한 인동 장씨 종가사람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관리국에 있던 문화재위원들이 영정을 보기 위해 저희 집을 찾아 왔는데, 부친께서 한사코 사진을 못찍게 하셨어요. 문화재위원들의 입장에서는 영정의 사진을 찍어야 보고도 하고 보물로 지정할 수 있는데, 부친께서는 500년 내려온 문중의 규칙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시는 겁니다. 제가 시대가 바뀌었고, 영정을 제대로 보존하고 문화재로 지정받자면 도리가 없다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기실 부친의 그런 영향은 지금의 종손인 장덕필씨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듯하다. 지금도 종가 사람들은 영정을 대할 때면 반드시 자리를 펴고 절을 한다. 기자 일행에게 영정을 보여주기 위해 유물각의 문을 열었을 때도 장덕필씨는 넓은 자리 하나를 준비해 먼저 영정에 삼배를 한 후 유물각을 안내했다. 종가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일종의 전통에 대한 천착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선조들이 물려준 것을 되도록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관습이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만큼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연전 서울 시립박물관에서 연복군 어른의 영정을 전시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서울에 사는 큰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가서 인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큰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박물관에 가서 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보면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이나 웃어른들에 대한 공경심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요즘같은 세상에 그렇게 해준 아들에게 고맙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종손 장덕필씨는 가부좌로 앉는 자세보다 오히려 꿇어앉은 듯한 자세로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꿇어앉는 자세가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오히려 그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에게 꿇어 앉아 있으라고 한다면 10분, 아니 5분이나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문을 지켜야 하는 종가의 종손으로서, 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손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선조의 현몽으로 잃어버렸던 유물 되찾아

유물각에는 영정외에도 앞서 말한 패도를 비롯, 선조들의 홍백패와 각종 교지 및 소지, 고문서 등 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다. 물론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처신해온 것이 이들 유물을 이만큼 보존해온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 당시 인동 장씨 종택은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고 한다.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중 패도에 탐을 내 가져가려고 땅속에 묻어 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땅속에 묻어둔 패도를 미처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패도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집안의 귀한 보물을 잃어버렸다는 점 때문에 종손의 부친께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종가에서 처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까지 받아야 했다.

“이 패도는 27년후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추원사 건립문제로 부친께서 적잖게 고민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부친의 꿈에 연복군 어른이 현몽하셔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시더랍니다. 그래서 귀한 보물도 찾고 부친에게 쏠렸던 의심도 모두 가셨지요. 부친도 선조들의 귀한 유품을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에서 놓여날 수 있었고요.”

이런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마땅할 게다. 아마도 선조께서 부친의 간절한 심정을 읽었던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땅속에 오래 묻혀 있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약간 부식돼 당초의 원형이 다소 훼손된 점이 아쉽다고 한다.

2001년쯤에는 대학교수를 사칭한 사람이 마을로 찾아와 문화재와 관련해 조사를 하겠다며 종가의 위치를 묻고는 유물들을 훔쳐간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종손도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도난당했던 유물을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로 경상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유물각에 도난방지시스템을 설치했다. 도난사건이 있은 후 종손은 집을 비워두기가 여간 걱정스럽지가 않다. 그래도 지금은 도난방지시스템 덕분에 종손이 집을 비운 상태에서도 유물각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경찰서와 종손에게 신호가 온다고 한다.

종손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궁핍한 생활 때문에 우선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집에 있던 벼루와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로 그는 부친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궁핍했던 종가의 처지는 체면치레는 할 만큼이나마 되살려 놓았다. 종손이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결혼후였다.

“조부의 묘소를 예천에 모셨는데 당시 사정이 있어서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그 일대의 지형이 바뀌어 산소를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니 부친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조부의 산소를 찾는데 많은 재산을 쓰다보니 살림이 쪼들리게 된 겁니다. 그러니 제가 종손으로서 우선 집부터 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종가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모두 문중에 기증했다. 종가가 문중의 구심점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오히려 종가의 재산을 온존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종손자리를 잇게 될 차종손을 비롯해 가족들과도 협의를 했다.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효심

종손 장덕필씨는 자신의 대까지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예들을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를 하지는 못했지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았다. 산소를 찾을 때는 완전히 굴건제복을 갖춰 입고 하루종일 산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아직도 드물게 3년시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예를 치르는 것도 보통 정성으로는 힘든 일이다.

전통에 대한 종손의 생각은 그대로 자식들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그는 차종부가 될 맏며느리를 맞을 때 시집을 오기 전에 먼저 시댁을 방문하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종가의 예법이나 해야 할 일을 설명하면서 종가에 올 때는 반드시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당부했다. 그런데 처음 며느리가 종가로 올 때 바지를 입고 왔다. 종손으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며느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었다.

종손과 종부는 지금도 각각 다른 채를 쓴다. 전통의 예법대로 종손은 사랑채에, 종부는 안채에 기거한다. 안채에는 장작불로 불을 때지만, 사랑채는 심야전기를 사용하는 얇은 자리를 방바닥위에 깔아놓았다. 종가의 살림살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종손에게는 근검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 사랑채에서 종손은 그의 손자가 3살이 될 때까지 함께 데리고 있었다.

“종손의 대를 이어야 할 아이니 예절교육을 시켜야겠다 싶어 처음에는 손자를 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요즘 아이들 교육을 시키려면 시골에서 제대로 시킬 수 있겠습니까. 결국 서울로 올려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대신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전화를 하도록 했지요. 그때는 꼭 ‘연복군 ○대손 ○○○입니다’하고 얘기하도록 시켰어요.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전화를 합니다.”

인동 장씨 종가에서는 연복군 이래 양자를 들인 일이 딱 한번 있었다고 한다. 집안에 일찍 돌아가신 분이 많았어도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종손의 10대조인 장주남(張胄南)때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였다. 이때 양자를 들일 동생집과 그 외가집, 그리고 종가의 외가집 등에 모두 동의를 구했다. 모두 4집안이 합의하고 예조의 승낙을 받아 양자를 들인 것이다.

종손의 11대조인 장계훈(張繼勳)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장주남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그는 특히 조상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분으로, 봉제사를 할 때 전사청에서 사흘을 기거하며 제사를 준비했다. 또 그는 부모님을 모시느라 과거도 보지 않고 있다가 78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험을 보기도 했다.


9살 서예신동이 쓴 사랑채 현판

종손은 20살 때 당시 19살이던 종부 박후자(朴後子)씨와 결혼했다. 종부는 반남(潘南) 박씨 집안으로, 부모님이 정해주신 혼처였는데 두말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종손의 나이가 올해 59세이니 39년동안 함께 해로해온 셈이다. 종부는 가난한 집에 시집 와서 고생도 많이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랴, 제사 지내랴, 손님 맞으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종가집에서 혼사 얘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종가의 살림살이가 어떤지, 종부의 범절이 어떠해야 하는지 얘기를 듣고 왔지만, 정말 만만치가 않았어요. 가장 어려웠던 때는 종손이 군대에 가 있던 시기였어요. 시부모님을 모시는 일에서부터 집안 살림을 혼자 책임져야 했으니까요. 의지할 곳이라고는 남편뿐인데, 곁에 없으니 어려움이 오죽했겠어요?” 종부 박후자씨의 얘기다.

종부는 요즘 사군자(四君子)를 친다. 종손이 서예를 배우면서 매일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 미안한 마음에 함께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해 종부에게 권한 것이다. 그런데 종부에게도 숨겨진 예술적 소양이 있었던 모양이다. 종부 역시 경상북도 서예대전에서 사군자로 종손과 함께 특선에 뽑히기도 했다. 종가에는 종손과 종부의 작품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유물각의 현판은 종손의 솜씨다. 그러나 정작 국전에는 출품하지 않는다. 이역시 선조들의 유훈 때문이다.

올해 보수를 끝낸 종가는 새롭게 단장을 했다. 집의 원형은 변하지 않았지만, 유물각이 새로 들어서고 집 주변의 담장과 솟을대문도 새로 둘렀다. 나지막한 야산 기슭의 품에 안긴 종가에 들어서면 먼저 높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한 옆으로 행랑채로 출입하는 문이 따로 설치돼 있다. 옛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집이다.

사랑채 누마루위에는 화계정사(花溪精舍)라는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 특이한 것은 그 옆에 ‘丙辰納月 九歲書’라는 서명이 붙어 있는 점이다. 곧 9살짜리 어린이가 이 글씨를 썼다는 얘기다. 종손의 얘기로는 아마도 서예의 신동이 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말한다. 당초 이 글씨는 벽에 써 있던 것을 종손의 증조부인 장복안(張復顔)이 모를 떠서 현판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마을안 집의 한쪽 옆에는 송설헌이라는 정자가 복원돼 있다. 이 정자의 기문은 봉화 닭실마을의 권세연(權世淵)이 쓴 것이다. 또 인동 장씨 종가는 경북 안동의 학봉종가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산은 유림에서 퇴계학의 정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종손의 조부인 장석문(張奭文)이 그의 문인이다.


하루에 다섯 번 옷을 갈아입는 종손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전통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은 연복군 선조에게만 일년에 일곱 번 제사를 지냅니다. 다른 제사는 몰라도 연복군에 대한 제사만큼은 제가 직접 장을 보고 최대한 정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인의예지(人儀禮知)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데, 요즘은 권력과 부에만 너무 치중하고 이기주의에 흐르는 것같아 아쉽습니다. 기본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마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다 변해도 우리는 마지막으로 변하자는게 제 생각입니다.”

인동 장씨 종가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제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도 새벽시간 그대로다. 제사를 지내러 와야 하는 가족들이나 문중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점도 적지 않겠지만, 조상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사실 그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종손의 생각이다.

종손 장덕필씨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쁘게 지낸다. 그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가장 먼저 사당이며 유물각과 영정각 등을 둘러보고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변의 산에 올라 장작에 쓸 나무를 해온다. 그리고 안방 아궁이에 불을 땐다. 이는 종부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자신이 맡고 있는 우체국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별정우체국인 반구우체국장 일을 맡고 있다.

퇴근후에는 서예교실에 나간다. 그의 서예솜씨는 경북도 서예대전에서 특선을 한데서 알 수 있듯 수준급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집앞의 둑길을 한시간 정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저녁의 산책은 운동을 겸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하루를 돌아보고 새로운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 데도 아주 유용한 시간이 된다. 그의 일과가 이렇다보니 그는 하루에 옷을 다섯 번 갈아입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일과 외에 유림행사나 다른 종가의 행사에도 참석해야 한다. 그러니 그에게는 짬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가 그렇게 바쁘게 다니는 것은 종손이라는 위치도 위치려니와 무너져가는 우리 전통을 지키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국제화를 추구하는 요즘시대에 전통을 고집하는 그의 자세가 낡은 관습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거기에 진한 향수가 묻어나는 것은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하다.

 (이상 '다섯돌머리'님의 블로그에서 담아왔습니다. 훌륭한 글을 주신 '다섯돌머리'님께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종가 둘러보기

소백산 비로봉을 천상의 화원이라면

장말손종가는 은둔의 화원이다.

 

 종가 담장 밖 솟을대문 옆에 활짝핀 꽃꽃꽃들

 

 사랑채 누마루위에는 화계정사(花溪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사당쪽에서 본 누마루

 사당에서 내려다 본 종가

 

 종가 안채 뒷모습

 

외래인 출입 정문 

손님이 방문 시 누마루 뒷쪽에 있는 후문이 정문이라고 한다. 

 녹색 화원/심고 가꾼 정성에 아름다움으로 화답한다.   

고향의 봄 같고, 고향 초등학교 교정같다.

 

 안채 마루에서 내다 본 후원

 

 후원 옆 장독대

 

 사랑채 뒤로 사당 가는 길

 

 

 부억 아궁이

 

 

 곳곳이 꽃밭이다

 

 

장말손 사당

연중 4번만 사당문을 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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