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성지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문화탐방 #1
2024. 6.26(수) 19:00~20:20, 둘이서
2024.6.26(수) 당진 한진포구 해안산책로 트레킹 및 서산 팔봉산 산행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서산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문화탐방에 나선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한 해미읍성(사적 제 116호)은 고려말부터 많은 피해를 준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413)때 충청병마절도사 병영을 덕산에서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1417년(조선태종17)부터 1421년(세종3)까지 축성한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성종 때에 왜구 침입에 대비해 성벽이 완성되어 효종(1651) 청주로 옮겨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해미읍성 안내도>
읍성이란 산성과는 달리 평야지대에 사람들이 사는 집을 둘러서 쌓은 성을 말한다.
효종 3년(1642) 해미에 있었던 충청병마도 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와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반양리에 있던 해미동헌을 옮겨왔다고 한다.
서산 관아문을 모방해 1970년대에 복원한 2층 문루 형식이라 한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 모양으로 그 둘레가 1.8km,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이다.
성벽의 높이가 5m, 약 2m의 두께로 고창읍성과는 다르게 성벽 위로는 갈 수 없다.
성안에는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비롯한 건물이 있으나 대부분 1963년 문화재 지정 이후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있던 시설물은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해미읍성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다.
서산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돌로 쌓은 읍성이다.
세종(世宗)때 병영으로 축성된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효종때 현치(縣置)를 이곳으로 옮기며 일반적인 읍성이 된 특이한 성이다.
병영을 옮김과 동시에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이곳에 설치함으로써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지속하였다.
성 외곽으로 해자(垓子)를 설치하고 성 내부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배산(背山) 형식의 구릉 아래 동헌과 객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민가를 배치하여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비석은 헌종(憲宗) 15년(1849)에 건립된 「좌영루첩중수비(左營樓堞重修碑)」인데
비문에 의하면 당시 성첩(城堞)이 붕괴되고 문루가 다 허물어졌기에 밀양 박민환(朴民煥)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848년 동문, 서문, 남문을 차례로 준공하였고
백성과 관리가 단결하여 공사 중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1916년 소실되었던 서문[정분문(靜氛門)]과 1926년에 붕괴되었던 동문[규양문(葵陽門)]
그리고 현재의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이때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왼쪽 비석은 「현감겸좌영장박공민환무공성덕비(縣監兼營將朴公民煥茂功盛德碑)」이다.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이수(머릿돌)의 전면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고 뒷면에는 조성연대(1849년)만 기록되어 있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의 진남문(鎭南門)은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600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선단석(扇單石) 위에 홍예석(虹霓石)을 무지개 모양으로 올린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웠다.
진남문 앞에 사적 제116호(史蹟 第 116號) 표석이 세워져 있다.
1652년(효종3)까지 230여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으며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이 성에 옮겨 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문루 아래 인방석(引放石)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로 1491년(성종 22)에 해당하여 그때 진남문이 중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남문 안쪽의 좌우에 있는 서산 해미읍성 안내도에 의하면,
해미(海美)는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친 지명으로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에 걸쳐 축조,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에서 옮겨왔다.
충무공 이순신은 1576년(선조 9년) 무과 급제하고 권관과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간 근무하였다.
당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해미읍성에 근무하는 동안 공은 방에는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으며
자신의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진남문 동쪽의 문화시설사업소
서산 9경 스탬프투어 제1경 해미읍성
어서와
해미읍성은 처음이지?
교황방문기념
서산해미읍성(사적 116호)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회화나무, 옥사, 자리개돌 등 관련 유적이 남아 있으며
2014년 8월 17일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이 이곳 해미읍성을 방문하여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AYD-Asian Youth Day)」에 참가한 23개국 6,000여명의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교황의 방한은 역대 세 번째로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의 방한이었다.
방한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位) 시복미사」를 주례하기도 하였는데
복자(福者)로 추대된 124위는 한국천주교의 초기 순교자들로서 해미에서 순교한 3위(인언민, 이보현, 김진후)가 함께 복자 품위에 올랐다.
중앙도로변에는 병영 관련 각종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기념물 제172호)
학명 : 회화나무(豆科 낙엽교목)
충청도사투리 : 호야나무(이 나무의 고유이름처럼 불리움)
이곳은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고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 되고 있다.
이 호야나무는 십자가의 길 14처 중 '제2처 십자형틀을 지신 주님'으로 지정되어 있다.
순교기념비
옥사(獄舍)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천주교 신자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海美 殉敎者 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형벌(刑罰)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적용, 근간은 태(苔),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오형(五刑)이었고
법체계는 태조가 즉위하면서 그 기틀을 갖추었으며 성종 때 경국대전에서 구체화되었다.
죄인을 심문하는 모습
민속가옥 2
무궁화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