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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족보》서문 (1748) : (구)죽산안씨 복야공파 안익대(安益大, 1676~1756) 1. 참고 1. 《죽산안씨족보》(1848) : (구)죽산안씨 http://cafe.daum.net/ahncham/DFic/688 2. 참고 2. 《죽산안씨족보》(1931) ) <역대 족보의 서문과 발문> 모음 중에서 1748년 안익대(安益大)가 지은 서문 서문을 지은 사람은 복야공파(僕射公派) 후손 안익대(安益大)인데, 안영의(安令儀) : 복야공(僕射公) - 안세량(安世亮) - 안홍상(安弘祥) - 안영년(安永年) - 안사(安社) - 안현(安玹) - 안증(安曾) - 안계인(安季仁, 1408~1467) : 군사공(郡事公) - 안초(安迢, 1420~1483) : 참판공(參判公) - 안자함(安子諴) : 별제공(別提公) - 안순(安恂, 1483-1561) - 안방경(安方慶, 1513~1569) - 안창(安昶, 1552~1620) - 안홍중(安弘重, 1586~?) - 안현(安鉉) - (系) 안여한(安汝漢) - 안익대(安益大, 1676~1756)로 이어지는 계통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는 죽산안씨를 3파로 분류해 놓았고, 자신들 복야공파와 양양공파(襄良公派)는 언제 어디서 갈렸는지 모르지만 같은 계통으로, 문혜공파(文惠公派)는 같은 죽산을 사용하지만 다른 계통으로 이해하고 있다.
竹山安氏派譜序 竊觀國中士夫家, 莫不有譜牒。此程夫子所謂, 人不忘, 須是明譜牒, 収世族之義也。惟我竹山安氏, 亦一國中士夫也。宐有譜牒, 而余早居委巷, 尙未之見焉。嘗聞宗丈故參判縝氏家有譜, 未知何代所成, 而以我始祖尙書左僕射上將軍諱令儀公, 祔於別錄云。盖我安氏有三派, 未知同郡以異系歟。抑同源流遠, 莫詳其所自分耶。三派中一派, 則以門下贊成延興府院君襄良公諱漢平爲始祖, 此乃參判縝氏之派也。一則以竹城君諱元衡, 諡文惠公, 爲始祖者也。吾家, 則乃僕射公派也。益大聞, 文惠公後裔, 致宅之言, 則文惠公爲十四代祖, 而麗朝以順興移封竹城君, 故因以竹山爲姓貫 雖爲子孫而莫得其詳云。然則文惠公派, 知是同郡異系。至於襄良公, 則與僕射公, 無乃源同流遠, 而莫詳其所自分也。益大嘗以此爲訝矣。聞就襄良公後裔 允吉答謂, 襄良公爲其十五代祖, 而襄良公以上世系爲未詳, 故以襄良公爲始祖云。然則襄良公與僕射公, 兩派子孫, 代數之遠近, 不爲懸殊, 而兩公仕于麗朝, 俱爲名揚, 則雖未知其同朝於一時, 而兩公世系之分派於某代, 必有文獻之可徵於當時, 而旣無考證若是, 則實未可詳其所自分也。噫僕射公子孫, 昔世簪組燀赫, 可謂盛矣。挽近以來, 稍若不振, 繼冠冤者旣不幸。得姓者, 又多散落鄕曲, 竹山, 陽智, 扶安, 瑞山, 高敞等地也。邈然不相通知, 是吾大有所慨然者。此乃譜牒不明, 而成之高曾祖, 內外子孫未與於舊譜者。書塡之至於始祖以下各派, 則欲収單子, 以爲備載, 後昆之計, 而有惑収單而來者, 惑未及収焉者。若成此志以完是譜, 則一開卷, 而代序昭著, 分派瞭然, 尊祖敬宗之意, 敦睦之義, 油然而生, 如蘇老泉序譜中句語, 則幸孰大焉。年旣衰邁, 西日已迫, 毋惑, 生前之未就斯志, 惟是之懼焉。 歲在戊辰(1748)七月二十八日 益大 謹識 (번역문) 삼가 보건대 나라 안에 사대부(士大夫) 집안치고 보첩(譜牒, 족보)이 없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는 정부자[程夫子, 송나라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두 형제 유교 철학자]가 말한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모아 종자(宗子, 종통의 적장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收世族 立宗子法].”의 도리상 당연한 일이리라. 생각건대 우리 죽산안씨(竹山安氏) 역시 나라 안의 사대부인데, 마땅히 보첩(譜牒)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젊어서부터 위항(委巷, 시골)에서 살아 식견(識見, 학식과 견문)이 아직 부족하지만, 일찍이 종중(宗中)의 어른이던 참판을 지낸 안진(安縝, 1617∼1685)의 집에 족보(族譜)가 있다고 들었다. 어느 대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시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 안영의(安令儀) 공의 이름이 그 《별록》에 실려 있다고 한다. 대략 우리 안씨(安氏)는 3개 파(派)가 있어, 모두 죽산(竹山)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그 계통(系統)은 달랐도다. 또한 근원이 같더라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는 어디서 시작되었고 또 언제 갈렸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3개 파 중 1파는 즉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양양공(襄良公) 안한평(安漢平)을 시조로 삼는데 이는 곧 참판 안진(安縝)의 갈래이다. 또 다른 1파는 문혜공(文惠公)의 시호를 받은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삼는다. 우리 집안은 즉 복야공파(僕射公派)인데, 나 안익대(安益大)가 문혜공의 후예 안치택(安致宅, 1702∼1777)의 말을 들어보니, “문혜공은 그의 14대조가 되는데, 고려조에 순흥(順興)에서 죽성군(竹城君)에 이봉(移封)된 연유로 죽산(竹山)을 성씨의 본관으로 삼았으니, 비록 자손들이라도 그렇게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문혜공파(文惠公派)는 같은 지명[竹山]을 본관으로 사용하지만 다른 계통[同郡異系]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양양공[襄良公, 안한평(安漢平)]은 복야공[僕射公, 안영의(安令儀)]과 함께 같은 계통[源同]이지만 갈래가 멀어진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디서 시작되고 언제 갈렸는지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나 안익대(安益大)도 어쨌든 의구심이 남는다. 양양공의 후예 안윤길(安允吉, 1691~1751)이 대답하기를, “양양공은 그의 15대조[《죽산안씨세보》에는 시조 안준(安濬) - 1세 안시무(安時茂) - 2세 안세윤(安世允) - 3세 안자유(安自裕) - 4세 안한평(安漢平) ~~~ 19세 안윤길(安允吉)로 이어지는 세계도를 삼았으니, 양양공은 15대조가 됨]가 되는데, 양양공 이상의 세계(世系,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는 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아서 양양공을 시조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즉 양양공과 복야공의 두 파의 자손들은 대수(代數, 세대의 수)의 원근(遠近, 멀고 가까움)이 현수(懸殊, 큰 차이가 생김)하지 않으려면, 양공이 모두 고려 왕조(高麗王朝)를 섬기며 이름을 날렸는데, 비록 같은 조정의 같은 때인지는 잘 모르지만, 양공의 세계(世系)가 어느 대에서 분파(分派, 나뉜 갈래)했는지 반드시 당시의 문헌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전에 이와 같은 고증(考證)이 없었다면, 어디서 시작되고 언제 갈렸는지 자세히 알게 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아아! 복야공 자손들은 예로부터 대를 이어 높은 관작이 빛나 성대하다 할 만 했으나, 근래에 와서 점점 부진하더니, 이어서 관직에 있던 사람들마저 누명으로 불행하게 되었다. 우리 성(姓)씨를 가진 사람들 또한 많이 흩어져서 죽산(竹山), 양지(陽智), 부안(扶安), 서산(瑞山), 고창(高敞) 등과 같은 지역으로 낙향(落鄕, 시골로 거처를 옮기거나 이사함)하게 되었다. 막연히 서로 통지(通知, 기별하여 알림)를 못하고 산 것을 우리는 크게 개탄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보첩(譜牒, 족보 책)이 명확하지 않아 고증조(高曾祖)를 정리한 내외 자손(內外子孫)들이 구보(舊譜)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시조(始祖)로부터 아래로는 각파(各派)에 이르기까지 서전(書塡, 글자를 써 넣음)하고 장차 수단(收單, 여러 사람의 이름을 쓴 단자를 거두어들임)을 통해 비재(備載, 갖추어 기록해 놓음)하려 후손들이 꾀한다면 거둬들인 수단이나 아직 미치지 못한 것도 의혹이 있으리라. 만약 이런 뜻이 이루어져 이 족보가 완성되면, 책을 한 번 펼쳐서 서문만 읽어봐도 분명하고 뚜렷해서, 분파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며, 조상을 높이고 종통(宗統)을 공경하는 뜻[尊祖敬宗之意]과 도타운 정으로 화목해야 할 바른 의리[敦睦之義]가 마치 노천(老泉) 소순(蘇洵, 1009∼1066)이 지은 《미산소씨족보(眉山蘇氏族譜)》의 서문 중 “나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가히 유연(油然, 생각 따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형세가 왕성함)히 생기리라[觀吾之譜者 孝弟之心 可以油然而生矣]”라고 했던 구절과 같으니, 무슨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크겠는가. 나이가 이미 쇠약해 죽을 날이 가까웠음을 의심하지 않는데, 오직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할까 이것만을 두려워하도다. 무진년(1748) 7월 28일 안익대(安益大, 1676~1756)가 삼가 기록한다. 본문에 언급된 양양공파(襄良公派)는 안준(安濬) : 소부소감 - 안시무(安時茂) - 안세윤(安世允) - 안자유(安自裕) - 안한평(安漢平) : 양양공(襄良公) - 안사경(安社卿) : 희정공(僖靖公) - 안극인(安克仁) : 문정공(文貞公) - 안숙로(安叔老) - 안망지(安望之) - 안맹담(安孟聃) : 연창위(延昌尉) - 안상계(安桑鷄) - 안방형(安邦炯) - 안종탄(安從坦) - 안언추(安彦錘) - 안경렴(安景濂) - 안대남(安大楠) - 안정섭(安廷燮) - 안진(安縝, 1617∼1685) - 3남 안상영(安相英) - 4남 안윤길(安允吉)로 이어지는 계통이다. 또한 본문에서 문혜공파(文惠公派, 죽산안씨 신파)는 순흥에서 죽산으로 이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안치택(安致宅)의 19대조가 죽성군이라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14대조가 된다.
하단 정리 중
心砥行, 以不勝隧祖考之心, 則此爲親, 親之大者請言, 於作者亦第二義也。言有以此爲序。 戊申(1848)六月下澣幸州奇正鎭謹序 발문은 상장돈장[上章敦牂, 경오년(庚午, 1930)]에 김노수(金魯洙, 1878~1956)가 지었다고 했으므로 신미년은 1931년이 되게 된다. 김노수는 전남 장성 사람으로 하서 김인후의 후손인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학자이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살았던 죽산안씨(구) 황국재(篁菊齋) 안건(安建)과 관련된 외척 후손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跋 譜者氏族之史也。忠孝節義, 文章德行, 科宦踐歷, 生甲卒年, 居地墓所, 婚家郡望, 無不収錄 詳載一編之詳載事也。直載言也。正寔爲氏族之史, 而吾譜之所以修也。噫吾先華人也。隴西李公瑗, 東渡之日, 有子三公, 以靖難之功, 受姓安氏, 封貫竹山廣州竹城, 而竹山新舊之別, 祥悉譜序中必架疉, 而入居東國 以來迄今千有餘載, 子姓蕃衍, 惑出而爲忠君報國之良臣, 或處而爲力學篤行之名士輩出相望 蟬赫當世 斯豈非祖宗 種德之邁 而餘慶之遺耶 逞(逘)枉乙丑篁菊齋諱建 與故宗丈聖欽氏曁迪氏 慨然有修譜之志屨及于圻湖(후략) 上章(庚)敦牂(午)復之下澣外裔蔚州金魯洙謹跋 '경오년(1930) 동짓달 하순에 외예(外裔, 외척후손) 울주 김노수(金魯洙)가 삼가 발문을 짓는다'고 했다. 발문의 내용 중에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에 살았던 황국재(篁菊齋) 안건(安建)이 언급되었고, 본문에서 을축년(1805)에 안성흠(安聖欽,1760~1817) 씨, 안적(安迪) 씨와 같이 수보(修譜: 족보를 최근의 자료로 고처서 중간하는 작업)했었다는 내용으로 봐서 을축년은 1805년 죽산안씨(구) 복야공파에서 족보를 간행했던 일을 언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문의 내용으로 짐작해 보면, 전남 함평 나산에 살았던 죽산안씨(신) 무은재 안치택(安致宅, 1702∼1777)의 설명을 들었던 죽산안씨(구) 복야공파 인물은 전라북도 고창에 살았던 황국재(篁菊齋) 안건(安建)이거나 그 인척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출처 : 금요고서방 참고 : 1902년 간행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집 《노사집(蘆沙集)》』에 실린 <죽산안씨족보서(竹山安氏族譜序)>... 안붕수(安鵬壽)과 안광협(安光協)이 청해서 노사 기정진이 짓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竹山安氏族譜序 a_310_396c 正鎭與安斯文鵬壽曁光協甫。後先相識。一日以其新印竹山安氏族譜一袠。踵門屬正鎭曰。吾安之以竹山爲貫者兩家。其一受封於錫姓之初。卽吾所本也。今日之譜是也。其一自順興中世移封。雖與吾未嘗不是同根。而枝柯則迥別矣。此吾譜之所當先講也。抑吾安自受姓之後。歷麗迄我。名德嗣興。簪組嬋嫣。有可以焜燿國乘。庇蔭來許者。無容雲仍瑣瑣致力於其間。第念中世以降。位不稱德。至行潛德。往往沈堙於後世。子孫爲是之懼。惟吾子圖惠之。正鎭作而對曰。不亦善夫。子之爲譜也。今之爲譜者莫不曰收宗族。曰明派系。亦有知收宗族。在於明派系者乎。族之有譜舊矣。文獻常患其不足。殽訛或參於其間。以殽訛之派系。猶曰吾將以收宗族。决知其無是理。一斑之窺。可以知全豹。一臠之味。可以推全鼎。子之致謹於派系若此。吾知此譜之必可以收宗族也。至若孝思不匱。願揚祖先之幽光。夫孰敢瑕疵。但立言以不朽人。世自有任之者。非正鎭所敢。抑又聞之。言有枝葉。不若行有枝葉。苟使安氏各自勉勵。秉心砥行。以不墜祖考之心。則此爲顯親之大者。請言於作者。亦第二義也。請姑以此爲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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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31년 죽산안씨 사과공파보입니다...
인용된 안익대(安益大)공의 서문은 1808년이 아니라 1748년 작성된 복야공파 첫 족보의 서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안익대 어르신에 관련된 자료를 볼 수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