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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지 않는 개
염 상 섭
1
자정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제시간에 대어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막차의 승객들이 두런두런 떼를 지어 지나간 뒤로는 인적이 끊인 지도 벌써 언젠지 모른다.
아직 서리가 내릴 절기도 아니겠는데 강바람이 쌀쌀한 국경의 밤은,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꼭꼭 끼어 누웠으면서도 이불깃 속으로 목이 음츠러져 들어가고, 손을 한참 내놓고 있기가 싫을 지경이다. 바로 머리맡 두 겹 유리창 밖은 정거장 앞 큰거리이다. 가다가다 윙하고 가랑잎을 휩쓰는 바람 소리가, 피난꾼의 잠을 못 이루는 어수선한 마음에 향수를 들쑤셔놓고 간다.
책을 펴서 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자리 속에 누워 보고 있던 나는, 문밖에서 버스력거리는 소리를 처음에는 풍생원이거니 하고 무심히 들었다. 그러나 머리맡 창 밑으로 서붓서붓 발소리를 죽여서 은구(隱溝)를 밟고 가는 기척에 책에서 눈을 떼며 귀를 기울였다. 이 밤중에 통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경비대원이 아니면 소련 병정뿐인데, 구둣소리가 아니요 고무바닥으로 밟는 발소리가 살살 스치고 가는 눈치가 더욱 수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에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정녕 바로 윗집 대문을 건드려 보던 것이나 아닌가도 싶다. 아직도 치안이 잡히지 않은 이 시가에는 밤만 들면 도둑과 강간과 살인이 하룻밤에도 몇십 건씩 일어나는지 신문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길 없고, 신문이 있기로 자유로이 보도할 수가 없겠거니와 보도하려고 들지도 않겠지만, 하여간 마음 놓고 잠도 잘 수 없는 요즈음이다.
발소리가 스러진 뒤로는 바람결에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 외에 다시 괴괴하여졌다. 옆에서 아이들은 세상 모르고 숨소리도 없이 곯야떨어져 있다.
다시 눈이 책으로 가서 읽던 데를 더듬어 찾노라니까, 이번에는 뜰 안으로 난 방문 쪽에서 또 버스럭 한다. 머리끝이 오싹하며 고개를 돌린 채 전신이 얼어 붙는 듯싶었다. 서벅서벅 고무바닥으로 생철지붕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수룩수룩 미끄러져 내리는 기척이 난다. 이 방문에서 한 간통쯤 떨어져 한 길 반이나 되는 높직한 토담을 의지해서 저 너머 쪽으로 생철지봉을 한 의지간이 요새 새로 섰는데 거기에서 뛰어내린다면 아무리 운동화를 신었기로 쿵쿵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날 텐데, 그런 자취가 없는 것이 희한한― 일이다. 다시는 가뭇같이 기척이 없다.
『내가 잘못 들었나? 괭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늦추어지며 숨을 돌렸다. 이 담 너머는 일본 절[寺] 의 뒷마당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들을 한데 모는 통에 대개는 강가의 창고에 수용되었지마는 이 동리에서는 여기에다 헛간을 들이고 몰아넣었다. 바로 이 생철지붕 밑에는 적어도 육칠십 명의 여자와 그 이상의 어린애들이 캄캄한 속에 끼워서 새우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리가 저편 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였을 것도 같다.
『아니, 무에 들어왔으면야 『나다』가 짖을 게 아닌가!』
주인집에 『나다』라는 개가 있는 것이 생각나니 이제는 아주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또 좀 있다가 저 뒷간 쪽에서 판자를 씨적씨적 흔드는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도깨비에 홀린 듯이 미쳐 죽을 노릇이다. 『나다』 가 부스럭대는 소린가도 싶었다. 그러나 『나다』는 이 방에서 부엌 하나를 지나 일자로 앉은 주인집 마루 앞 멍석을 두른 의짓간에 쇠사슬로 매어 놓았으니, 저 뒤로 곱뜨려 들어가는 변소까지는 갈 수가 없올 것이다.
판자를 혼드는 소리가 여전히 잇달아 나는 것이 겁결에 한 십 분은 되는가 싶었다. 이 뒷간 옆 판자 너머는 윗집의 앞마당으로 빠져나가는 골짜기가 된다. 무역상인가 무슨 회사인가를 해서 이 바닥에서 손꼽는 주인은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벌써 서울로 뛰어 버렸고, 문전이 커다란 집 속에 중년부인이 열 대여섯쯤 된 곱다란 딸 하나만 데리고 단 두 식구가 문을 첩첩이 닫고 들어엎딘 집이다. 아무리 거리는 쓸쓸해지고, 날마다 듣느니 강도요, 강간이요, 무시로 총소리가 팽팽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거장이 지척이요, 문전만 나서면 피난민이 우글대는 여관에서는 밤새도록 문을 닫는 일이 없고, 이편짝 냉면집, 장국밥집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불은 대낮같이 밝으니 그것을 믿고 의지삼아 기차가 삼팔선을 뚫고 서울까지 단숨에 갈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조마조마하며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여간에 아까 앞대문에서 부스럭거리던 것을 보아도 도둑이든 무어든간에 노리는 것은 윗집이구나 하는 짐작이 들자 조금은 절박한 생각이 늦추어지나, 날마다 저녁이면 내게 와서 집의 딸년과 함께 국어며 역사, 지리를 서둘러 배우는 그 집 딸아이가 머리에 떠오르자, 당장 자기 발등에 떨어질 불은 아니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만큼 또 새로운 참혹한 걱정이 펄쩍 났다. 그러자 수군수군하는 말소리가 마당에서 나며 발소리도 없이 이리로 다가오는 눈치다. 조선말인지 노서아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으나 두 놈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등불을 껐더면, 하는 생각도 났으나 될 대로 되라고 금시로 대담하여지며 한참 긴장하였던 마음이 확 풀리었다.
똑 똑 똑…… 노크와 함께,
"여보……. "
하고 서투른 목소리가 방문 밑에서 가만히 난다. 계집아이들과 아내의 이북을 얼굴까지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눈을 뜬 아내에게 손짓을 하는 것과 함께 밖에서는 안으로 잠근 방문을 흔든다. 나는 속바지를 천천히 입고서야 대꾸를 하며 전등불 줄을 떼어 들고 방문을 열고 불부터 내밀어 문에 가로막고 섰다. 컴컴한 뒤에서는 식구들이 이불속에 파묻혀서 덜덜 떨고 있을 것이다.
전등불에 환히 나타난 빨간 코가 뾰족하고 키가 작달막한 노상 어린애는 장교인 모양이요, 뒤에는 똑같은 키의 졸병이 담총을 하고 섰다.
떠듬떠듬 반벙어리 같은 조선말로 조잘대는 것을 되묻고 되묻고 하여 간신히 알아들은 말은 평양서 와서 여관을 정하고 친구와 거리에 나와서 술을 먹었는데, 여관을 잃어버렸으니 나더러 여관을 찾아 달라는 뜻이었다.
이런 억탁의 소리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 밤중에 나오라는 데에는 기가 막혔다. 언젠가는 경비대원이, 그것도 오밤중에 문이 어느 틈에 열렸는지 마당에 들어와서 마침 변소에 갔다가 나오는 나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지금 이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냐고 서두는 통에 혼이 난 일이 있었지마는 툭하면 불문곡직하고 탕하는 총부리가 무서웠다.
그때는 사랑쌈을 하느라고 들락달락하던 주인의 작은집이 캄캄한 추녀 밑에 숨어섰다가 나타나서 무사하였거니와 이번에는 문밖으로 끌려나가기만 하면 당장 총부리가 덜미를 겨눌 것이다. 좋은 낯으로, 여관이 바로 이 앞에 있으니 그리 들어가 자라고 순순히 일렀으나,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다 한다. 나중에는 화가 버럭 나서 시위를 하느라고 안방에 대고 소리를 치며 주인을 깨웠다. 주인 부인은 마침 어린애를 데리고 친정에 가서 주인이 혼자 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쯤의 첫 서술에는 노어강습소가 여기저기 생겨서 젊은 사람은 한 달쯤 배우면 웬만한 통사정쯤은 한다 하니 주인의 그 노어를 이런 데 써먹자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이 그 부산통에 깨어 있었던지 마루로 나오며 불을 환히 켜니 저희들도 그리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속바지 바람으로 따라나가서 내가 들은 대로 설명을 하여 주니까 주인이 노서아말로 수작을 붙이었다.
얼마만한 어학력인지는 모르되 이 심야의 침입자들의 조선말만큼은 떠듬대는 수작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상대자가 뜻밖에도 제 나라 말을 꺼내는 데는 반갑기보다도 겸연쩍은 생각이 드는 눈치로 싱거운 웃음을 띠고 멀거니 섰다. 그것은 남모르는 타향에 왔다는 안심으로 파탈하고 체면 없는 짓을 하다가 뜻밖에 아는 사람에게 들킨 듯이나 열적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춥기도 하고 환한 불빛에 속바지 바람인 것이 창피하기에 옷을 입고 나오마 하고 돌쳐서며 개우리간을 들여다보니, 나다는 여전히 짖지를 못하고 눈만 멍하니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섰다. 오밤중에 누가 문전에 얼씬만 하면 길길 뛰며 짖어대는 나다이건만.
방에 들어와서 바지를 부덩부덩 입으려니까,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엎드렸던 아내가 파랗게 질린 얼굴을 내밀고 나가지 말라고 손짓을 하며 방문을 걸라는 시늉을 하여 보인다. 그러나 주인에게만 떠맡기고 모른체하고 있을 경우도 아니어서 부리나케 바지 앞을 여미는데 밖에서 또다시 방문을 똑똑 두드린다. 대개는 무사 타협이 되었으려니 하는 안심도 없지 않았지마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앞선 꼬마 장교가 선뜻 손을 내밀며,
“아버지, 미안합니다."
하고 악수를 청한다. 뒤의 졸병도 거기 따라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다행하다는 생각에 웃어보이며 나와서 대문을 열어 주었다.
저 보기에도 오십이나 되는 사람이니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아내면 역시 오십은 되는 노파려니 싶어서 다시는 길로 나가자고 않는 것이지, 남자가 둘씩이나 되고 젊은 주인의 노서아말 바람에 기가 죽어서 그런지, 잊어버렸다는 숙사는 어떻게 찾아갈 요량으로 순순히 떨어져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앞 절간 일본 사람 수용소에 들어 있는 늙은이가 대표 격으로 인사를 온 것은 의외였다. 앞장을 서 안내해 온 희끄무레한 일본 계집애는 일본 여자들이 파는 옷가지를 사느라고 왔다갔다하는 동안에 아내와 낯이 익어진 처녀였다.
"간밤엔 참 고마웠습니다. 생철지붕 위를 쿵쿵거리는 소리에 잠들이 깨어서 어른, 애들이 캄캄한 속에서 옷들을 주워입고 꼭 일을 당하는 줄만 알았더니 천만 다행으로 소리없이 쫓아 보내 주셔서 그런 고마울데가……."
다리는 절망정 기골이 장대하고 신수가 좋은 늙은이는 웃음을 띠면서도 한숨 섞인 인사요 하소연이었다. 여기서는 버스럭거리는 정도로 들렸지만 지붕 밑에서 자는 사람은 생철 한 겹 밟는 소리가 벼락치는 듯 했을 것이다. 여자들은 옷을 단정히 입고 꿇어앉아 하회만 기다리고 있었더라는 것이다.
닭도둑처럼 일본 여자만 모아 놓은 곳으로 야습을 하여 다니는 이 판에, 마음을 놓고 잘 수도 없었지마는, 제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서나 민족적 감정으로나 이 앞집에는 색시가 수두룩하다고 똥기어 주리라고만 생각하였더니, 말막음을 하여 돌려보내서 욕을 면하게 해주었으니 이런 고마울 데가 없다는 것이다. 저희들이 한 일을 생각하면 이 판에 조선 사람이 직접 손을 대지는 않더라도 기회만 있으면 저희들을 못 살게 굴고, 보복을 하려 들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은 데에 무척 감격하였다는 눈치였다. 우리가 수작을 하고 있는 동안에 대문 밖에서 묘령의 일본 처녀들이 웅성웅성 모여 서서 기웃거리며 호의와 감사의 미소를 던지고들 있는 것도, 아침 햇살이 쫙 퍼진 신선한 공기 속에 화려한 한때의 풍경이면서도 어쩐지 가련하여 보이는 것이었다.
2
"집은 되는 거예요? 떠나면 어서 떠나구…… 웃집에선 내일 아침차로 떠난다는데, 우리두 더 처지기 전에 결단하고 나서든지……."
오늘도 K과장집에 가서 원고 정리를 하다가 저녁밥때쯤 되어서 돌아오니까 아내가 또 이런 걱정을 뇌까리는 것이었다. 적산 신문사를 맡는 한편 적산 극장이 넷, 적산 인쇄소가 넷이나 되니 이것들을 중심으로 일을 하나 익혀 놓고 가라 하여 도중에서 붙들린 셈인데, 좌익계열이 차츰 드세어가서 일이 될 성스럽지 않은 한편, 날은 추워가니 기차는 통하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하는 딱한 사정이다.
"그나마 로스키가 쓴다구 내놓으란다나, 우린커녕 K과장두 쫓겨날 판인데……."
K과장이란 도청 교육국의 문화과장이다. 이번 해방후 L위원장 밑에 나선 젊은 인텔리인데 적산 문화 시설을 가지고 무어나 해 보자 하여 독신인 이 사람의 집으로 매일 모이는 축이 있는 것인데, 이 집이란 것도 이번 통에 큼직한 것을 한 채 접수하였기 때문에 나더러 이층에 와서 들고 살림을 하라는 것이나, 또 중간에 가로채고 나선 사람이 있어 야박하게 앞장을 질러밀고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에 요사이 와서는 소련군에서 내놓으라고 또 하나 새치기가 들어 상치를 하고 있는 터이다.
"에구, 그나마 틀리면 어서 나섭시다. 설마 삼팔선 넘는다구 쏘기야 하겠수. 아무리 밤중에 산길을 돌아 가기루 남들도 다 가지 않나."
엊그제 그런 일이 있은 뒤 옆집에서 겁이 펄쩍 나 집을 일가에게 맡겨 놓고 간다는 말을 들으니 아내와 아이들은 더욱 마음이 들먹거려서 조바심이다. 그러나 지방 신문일지라도 시설이 완비한 공짜 신문을 책임자가 맡으라는 것을 버리고 가기는 아깝고, 주인 없는 극장이나 인쇄소가 뉘게 떨어지든간에 낙착도 보지 않고 자리를 뜰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붙들려서 여자는 욕을 보고, 남자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없어지는 판에 어린것을 업고 걸리고 하여 밤중의 산길을 돌파하기란 서울서 자란 우리 집 식구 따위로는 좀처럼 엄두가 아니 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만 먹으면 K과장 집으로 사진을 하였다. 독신인 주인이 도청에 사진을 하고 나면 드나드는 사람은 수월치 않으나 널찍하니 서재삼아 좋았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정보도 빨랐다. 그러나 모여들어 쑥덕공론을 하는 축들이 천냥 만냥꾼들이요, 어느덧 밀수입의 소굴같이 되어 이상한 공기를 빚어내게 되었다. 간혹은 늙은것 젊은것 여자들도 나타나서 끼리끼리 속삭이었다. 이것들은 함경도에서 아편을 속옷 속에 차고 오는 용감한 낭자군이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하여튼 길을 찾아서 소련 장교나 끼고 압록강을 건너다닐 통행증만 있으면 짐차, 양처(인력거)는 물론이요, 트럭으로라도 한 왕복만 하면 지폐 뭉치가 왔다갔다 하는 판이니 자연 연줄연줄하여 이런 아늑한 고장으로 찾아드는 모양이지만, 소련군이 이층을 쓰겠다고 한다는 것도 어지간히 농락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호위병을 세우고서 판차리고 밀수입 암거래가 마냥 벌어지는 저희들의 꿍꿍이 속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한 사날 후에 위층에 소련군 중위가 와서 들었다 하더니만 당장 마당에는 나무가 한 트럭 쌓이고, 위충에 난로를 놓는 길에 아래층에도 큼직한 스토브를 어디서 징발하여 온 것인지 놓더니 길이 넘도록 쌓아 놓은 통장작을 저희 집 것처럼 들이 지펴서 따뜻한 대낮에는 웃통을 벗고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나무값이 나날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초겨울에 소련 장교가 제 나라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겠고, 공짜니 때자고 들이지피는 것이겠지마는 하여간 위아래층이 그만큼 통하는 것이었고, 그 바람에 나는 그 이충을 놓치고 말았다.
노상 어린애야, 키는 작달막한 게. 그러니 중위쯤 되어 가지구 계집애를 둘씩 차구 있으니 사령관은 후궁 삼천은 못 돼두 한 삼십 명 끼구 놀겠지.“
난로 앞에 꾀는 젊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렇게 씨부렁대는 소리가 나왔다.
"사령관에게 조선 여자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을 해 달라고 청을 하니까, 사령관 말씀이 4, 5년 동안 전지로만 휘돌다가 온 우리 부하라는 것을 양해해 주시오라고 대답하더라든가! 흥! "
이런 소리도 누가 꺼낸다. 그러나 다행히 위충에 주야로 교대해서 번올 든다는 두 계심아이는 일본 처녀라 한다.
키가 작달막한 노상 어린 중위라니 저번에 우리 집에 닭도둑처럼 들여와서 『아버지』하고 악수를 하고 가던 그 자식은 아닌가 하는 혼잣 생각을 하면서 밤번, 낮번을 돌려가며 든다는 그 일본 계집애가 어떤 집 아이들인지 궁금도 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인가 변소에서 나오다가 위층에서 물통을 들고 통통 내려오는 계집애와 딱 마주쳤다. 계집애는 주춤하며 깜짝 놀란 눈으로 말똥히 바라보다 선뜻 마음을 돌려 상긋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도의 물을 길러 내려온 것이다.
『어디서 본 애다.』
하는 생각과 그 해말간 예쁘장한 모습에 끌려,
"어디선가 본 법 한데 언제 이리 왔나?"
하고 부엌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네, 묘심사 뒤에 사시죠? 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어요."
물고동을 틀고 돌아보며 의외로 정답게 대꾸를 한다. 딴은 소련 군인이 닭도둑처럼 들어왔던 이튿날 일본 사람이 인사 왔을 때 대문간에서 기웃거리던 계집아이들 틈에서 눈에 띄던 한 아이였다. 노서아 사람 옆에 시중을 들고 있으니만큼, 얼굴빛이 같은 이 늙은 사람이 정다운 눈치인지도 모르겠다.
"허! 어떻게 이리 오게 됐나?"
나는 부엌으로 발을 옮기며 일본 사람의 생활이며 위층 소식이 듣고 싶어서 호기심을 가지고 말을 다시 붙였다. 처녀는 얼굴빛이 살짝 붉어지며 우울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두 그 절에 있나?"
"아뇨."
"방을 다시 얻은 게로군?"
처녀는 생긋 웃어만 보인다. 노서아 장교의 시중을 들게 된 덕분에 저의 식구만 수용소에서 빠져나온 눈치다.
오늘은 원고 정리의 손을 떼는 날이었다. 한편으로는 신문사니 극장, 인쇄소 들의 관리 기구와 운영 방석의 조직 편성을 추진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나 개인의 사업으로 한자 삼천 자를 추려서 중등 이상 학생을 상대로 한 소자전을 편찬하기로 착수하여 두 달 동안이나 걸린 노력이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중앙에서는 한자를 전폐할 방침이라는 것을 라디오로도 듣고, 서울 갔다 오는 사람마다 전하여 오지마는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하나는 내 공부삼아, 하나는 서울 올라가면 당장 출판에 걸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오륙종의 자전을 놓고 불철주야하고 편찬에 노력해 온 것이다.
저녁때 원고 가방을 끼고 김 과장 집에서 나오려니까 뒤에서 통통통 구둣발소리가 나며,
"선생님! "
하고 다가오는 기척에 돌아다보니 위층의 그 계집아이다. 손에는 헝겊으로 만든 핸드백을 들었다.
"아래층에서 식모를 구한다죠?"’
"응, 그러나봐. "
어정쩡한 대답이었다.
"우리 어머니 와 계시게 할까 하는데요."
하고 눈치를 본다.
"아무래두 좋겠지. 어머니 올해 몇이신데, 그런 일 해 내실 수 있을라구?"
"갓 마흔이세요. 하면 하죠 뭐."
김 과장에게 식모를 구해 탈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일본 여자들이 조선 사람의 집에 식모살이를 구해 다니기도 하고, 웬만한 집에서는 대개들 일녀 식모를 두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 여자 식모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일녀들은 첫째 먹는 거와 잠자리가 수용소보다는 편하고, 이남으로 따라 내려갈 길이 뚫리려니 싶어서 아무쪼록 조선 사람과 인연을 맺자고 그러는 것이었다. 노서아 장교란 어떤 위인인지 그 덕에 다시 방 간이라도 얻고, 식량이며 땔나무라도 공짜로 얻는 모양이나 이남으로 내려가는 조건만은 아무래도 조선 사람에게 매달려야 할 형편인 것이다.
3
이틀쯤 후에 김 과장이 들어앉았는 공일날, 식모로 선을 뵈로 온 처녀의 모친은 얌전한 중년 부인이었다. 마지못해 나섰겠지만 식모살이로서는 아까운 여염집 아낙네였다.
"마침 이 애가 저 위층에 드나들게 됐기에 보살펴두 줄 겸, 나두 가만히 들어앉았느니 나서보려는 겁니다마는……."
아무리 보아도 이때껏 식모를 부리었을 사람이라, 악에 받쳐서 나서기는 하였어도 수줍은 태도였다.
"주인 양반은 뭘하셨나요?"
저만치 떼놓고 바라보는 그런 감정이면서도 얼마쯤 동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나는 옆에서 말을 붙이었다.
"지금 안 계셔요."
되도록은 말을 피하려는 눈치였다. 나중에 김 과정에게 들으니 남편은 지방법원 판사였다고 한다. 이 아낙네가 이 집에, 와서 살게 된 뒤, 그 지방법원 판사가 경찰 사법 관계의 고관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는 말과, 또 위충의 장교가 주선을 해서 어떠면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위충의 딸과는 달라서 아래층의 어머니는 이집 살림을 맡아 보기도 하거니와 추운 날씨에 통근하기가 싫다고 아주 금침을 가져다 두고 묵었다. 손님이 뜸하고 조용한 한나절에는 책상머리에서 떨어져 난로 옆으로 다가와서 나하고 곧잘 이야기가 어울리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위층에서 딸이 내려올 것이라고 조그만 워트카병을 따고 달걀 삶은 것을 내놓아서 의외의 대접도 받았다. 저번날 노서아 장교가 침입했을 때 절간에는 손을 대지 않게 해주었다는 좋은 인상과, 이 집에 와 있게 말을 잘 해준 인사로도 그러는 것이겠지마는 서울까지만 데려다가 주면 거기서부터는 곧 일본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이 판에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것인 모양이다.
위층에 있는 장교라는 아이가,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오종종하다니 저번에 남을 놀래 주던 닭도둑놈이나 아닌지? 하여간 하고한 날 생돼지고기와 달걀 삶은 것만 먹는다니 계집아이 둘을 낮번, 밤번으로 끌어 들여놓고 쥐죽은 듯이 자빠져 있기만 하니까 그런지도 모를 것이나 하여간 그 덕에 얻어 걸린 술이요 달걀이었다.
대관절 장교란 자도 보고 싶고 밤번을 든다는 아이도 누구인지 궁금하나 일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자 하루는 아침 후에 김 과장 집에를 가 보니 식모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래도 조용하고 위충도 감감하기에 그런가보다고 내버려 두었더니 점심 때쯤 되어 식모가 달려들며 자기 남편이라고 머리가 반백이나 되고 누런 홀태바지 작업복을 입은 남자를 내게 소개하는 데는 좀 얼떨떨하였다.
물론 내게 소개가 급한 것이 아니라 풀려 돌아오게 해준 위층의 장교인지 사위인지한테 인사를 온 것이었다.
얼굴을 번듯이 마주 들지 못하면서 그저 꿉적꿉적 비슬비슬하는 눈치가 가엾기도 하거니와 군대바지에 도꾸리샤쓰를 입은 양이 어느 집 비부쟁이 같다.
"한편 다리가 신경통이 도져서 몸을 제대루 가누지두 못한답니다."
아내의 설명 이었다.
그래도 곁눈질올 슬쩍 뜨는 그 눈치라든지, 꼭 다문 입 모습이 어딘지 지식 있는 사람의 점잖고 야무진 데가 있어 보였다.
이날은 위충에 올라가서 인사만 하고 가는 눈치였다.
『전쟁이란 무서운 거다. 진다는 것은 이렇게도 비참한 것인가.』
하고 나는 혼자 책상 앞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며칠 후엔가 군화 소리가 창밖 마당에서 저벅저벅 나더니 문을 삐걱 열고,
"미네 미네."
하고 식모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남편이 왔나 보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숙설숙설 하고 식모가 위층으로 올라가고 하더니 다시 잠잠하여졌다.
나는 피로한 끝에 난로 앞으로 건너가며,
"요새 영감의 다리가 났소?"
하고 말을 붙이었다.
"부대에 취직이 됐죠. 지금두 위충 장교더러 나오라구 알리러 왔었어요."
하고 식모는 위충의 기척을 엿듣듯이 그리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영, 잘됐구먼."
하고 나는 대꾸를 하다가 위층에서 쿵쿵쿵 내려오는 발소리에,
"그 장교란 누군가?』
하는 늘 궁금해 하던 호기심에 문이 열린 틈으로 내다보니, 층계에서 툭 뛰어 내려오는 군복 입은 조그만 몸집이 바로 보름께쯤 전에 우리 집에 뛰어들어,
"아버지!"
하고 악수를 하고 가던 그 자가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 벙벙히 난로 앞에 섰었다.
〈1955년〉
2016년 11월 2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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