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삶만이, 자연에 따르는 것인가? 이것이 옳은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자신이 배우고 느꼈기 때문인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과연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결과가 되어 버린다면,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슨 목적이 있기 때문인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것을...목적 있는 삶에 죽음을 끼워넣음으로서 자승자박적 결론을 도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성
3-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에 귀기울임으로써 쾌락에 더럽혀지지 않고, 고통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지 않는다. 만인의 의견보다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사람들의 의견만 존중해야 한다. 무수한 상념으로 산란하게 만들지 말고, 오히려 (자기 마음속의 )신성을 신으로 여기고 이에 순종하며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고 정의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음으로써 신성을 조용히 간직해라.
5-아침에 마지 못해 일어날 때에는 '나는 인간다운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라.
자연에 따르는 모든 말과 행동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다연의 어떠한 본성이든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철학은 당신의 본성이 바라는 일만을 요구한다. 각각의 사물은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목적에 따라 구성되었다. 신들과 함께 살라. 신령이란 바로 각자의 이해력이며 이성이다.
6-궁정과 철학을 의모와 생모에 비교할 수 있다. 자주 철학으로 되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 죽은 다음에는 알렉산드로 대왕도, 그의 마부도 같은 상태에 이르른다.자기 자신이 본질과 본성에 따르는 것은 만인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본성은 이성적이고 사회적이다.
8- 인간을 정의, 절제, 남자다움, 자유로 이끌지 못하는 것은 선이 아니며, 이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이다. 말이든, 포도나무든 모든 것은 일정한 목적을 갖고 존재한다. 당신의 이성은 당신을 둘러싼 공기를 호흡하는데 그치지 말고 만물을 포용하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9-보편적 본성은 이성적 동물로 하여금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서로 돕고 서로 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죽음도 자연이 원하는 것이므로 이에 만족하라. 죽음도 자연 작용의 한 갈래로 여기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사려깊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의견
마치 이 글을 읽다 보면 동양의 불교적 사상과 도교적 사상을 합쳐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만물의 자연에 따르는 삶을 살며,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은 변화에 의해서 우주의 어떤 부분으로 환원되고, 다시 우주의 또 다른 부분으로 변하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불교의 연기설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우주의 보편적인 시간 속에 순간적인 찰나의 시간만 나에게 할당되어 있음, 역시 동양적이다. 동양의 사상이 그러하듯이, 약간 허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자연에 따르는 것, 죽음까지도 자연 작용의 한 갈래로 여기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한 점에서 허무적이다. 모든일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일체 유심조의 사상 또한 옳은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궁정과 철학을 의모와 생모로 비유한 구절에서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도 몰라도, 그의 주장을 펼치기에는 현실이 너무 뒷받침 되어주지 않았는지 굉장히 고민했을 듯 하다.
보편적 본성에 따르는 삶,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삶이란 이성적이고 사회적이고 , 이러한 점은 도시에 유익한 삶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없다. 어느 책에선가 보니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욕구가 식욕과, 수면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욕구를 따르는 삶까지도 인간의 본성일까? 분명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한다고 이것이 본성이 아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본성이 아니라 한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자신들만이 내린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오류를 발견했지만, 우선 덮어두어 식욕과 수면욕구 등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인간의 본성, 보편적 본성은 무엇일까?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자연에 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에 대한 예로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도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고 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수도 있다. 자연이라는 것은 만물의 생성, 변화, 소멸을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한다. 아니 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아우렐리우스가 바라는 삶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인간 내부에서 저절로 되어지는 것,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 그래서 쾌락은 조화보다는 그 조화를 파괴하기에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그렇게도 싫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양의 도가 철학이 원했던 이상적 삶이 자연에 따르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 결국은 인간의 본성 기준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졌듯이, 스토아 철학의 자연을 따르는 삶도 결국은 인간 본성의 기준은 자기 만족적이고, 자신들만의 규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연에 따르는 삶에 대한 비유의 또 하나로 아우렐리우스는 자연의 만물 체계가 돌아가는 것이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듯이(심지어는 태양이 돌아가는 것도 어떤 목적이 있어서이다고 말한다), 인간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며칠전에 윌 스미스 주연의 'I-Robot'을 본적이 있다. 많은 로봇들 중에 어느 한 로봇이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만든 아버지(인간)가 나를 만들 때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만든 목적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는 그래서 결국은 그의 영광을 찬미해 한다는 인간의 창조 목적을 제시해주고 있다.
분명히,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목적과 위의 두 경우는 어느 정도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나, 결국은 목적이 있다는 면에서는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지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인간이란, 보편적 본성에 따르는 삶 속에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 목적이있는 곳에 선이 있으며, 이성적 동물의 선은 사회이고, 우리가 사회를 위해서 태어났는 것이라고 답을 하고 있다. (5장-16)
또한 그가 말한 신성을 따르는 삶도 어찌 보면, 굉장히 신을 존중하고 신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그의 신 개념은 자기 마음속의 신성이라고 밝히고 있다(3장에서) 이러한 것은 그의 범신론적 사상이며, 자신의 마음 속에 신이 있으니 이 신을 잘 개발하는 자 곧 자신이 신이며, 이 우주 전체를 품는 인간의 마음이 곧 우주이고, 신이다라는 사상 전개를 한 것이 된다.
결국 그의 신 중심으로 보이는 것은 용어 선택에서 잘 못된 것이다. 한낱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어떻게 하면 위대한 신과 동일하게 취급을 한 것은, 그의 사상 전반에 나타난 자연에 따르는 삶이 결코 완벽할 수 없음에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을 위대하게 본 동시에, 그에 따르는 삶을 이상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동등할 수 있음을 피력한 그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사후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였든지간에, 목적있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다. 그의 주장 속에 실컷 목적이 있다고 해놓고 결국에 그 목적이라는 것은 자연에 따르는 삶이고, 자연에 따르는 삶은 결국 죽음조차도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까, 목적은 죽음이다라는 결론이 가능하게 된다.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죽을 수 밖에 없다. 이 죽음 앞에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 하찮다. 하지만,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면, 만약 살인을 당하는 것조차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또한 자살조차 운명이라 생각하며,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 치부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건 분명히 잘못이다.
누구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더 좋은 세상을 맞이하기를 소망하고 바란다.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나에게만 좋다면 더 좋은 세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 코스모폴리탄적 사상으로 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며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이상으로 본 것은, 말 그대로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이란? 자연에 따르는 삶이 아닌 신에 따르는 삶! 이 신이 자신의 마음이 아닌 진정한 절대자를 따르는 길을 따르는 과정을 내 삶의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슷하면서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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