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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
3부 6
“나는 믿지 않아! 믿을 수 없어!”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라주미힌은 열심히 라스콜니코프의 결론을 뒤엎으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되풀이했다. 두 사람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두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바칼레예프의 하숙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이 사건을 입 밖에 내서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당황하고 흥분해버린 라주미힌은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자꾸만 길 한가운데 멈춰 서곤 했다.
“믿지 않아도 좋아!” 라스콜니코프는 냉정하고 무심한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자네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데, 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저울질하고 있었어.“
”자네는 의심이 많으니까 저울질 같은 걸 하는 거야. 흠.....사실 포르피리의 말투는 퍽 이상했어, 그건 나도 동감이야. 특히 그 바보 같은 자묘토프 녀석까지!..... 자네 말대로 녀석에겐 확실히 뭔가 있었어. 한데 왜들 그러지? 왜들 그래?“
”하룻밤 새 생각이 달라진 거야.“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만일 녀석에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있다면 그야말로 온 힘을 기울여 그것을 감추고, 나중에 한 몫 단단히 보기 위해 자기 카드를 엎어놓으려고 애쓸 거야....그런데 오늘은 .....너무 뻔뻔스럽고 조심성이 없었어!“
”만약 놈들이 사실을, 확실한 사실을 잡고 있다면, 또는 다소나마 근거가 있는 혐의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커다란 승리를 얻으려는 기대에 정말 승부를 비밀로 했을지도 모르지.....그러나 그때는 이미 오래전에 벌써 가택 수색을 했을 걸세! 하지만 그들에게는 확증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야. 모든 것이 신기루야, 모든 것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붙잡을 수 없는 허공에 뜬 관념뿐이지. 그러니까 녀석들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이쪽을 골탕 먹이려고 애쓰는 거야. 그러나 어쩐지 확증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내고, 또 홧김에 터뜨렸는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무슨 계략이 있는지도 몰라....그자는 그래도 꽤 영리해 보이니까....아니면 아는 체하면서 나를 위협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거기에는 또 그 나름의 심리학이 있는 거야....하지만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는 건 참 더러워. 그만두세!“
”아무튼 모욕적이야. 모욕적이고 말고! 자네 심정은 잘 알겠어! 그러나.....우리도 이렇게 말을 꺼낸 이상 -결국 분명히 말을 꺼낸 것은 참 잘한 일이야, 나는 기쁘네!-나도 이젠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기하겠네만, 나는 벌써부터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었어. 그동안 죽 물론 보일 듯 말 듯 약간 꿈틀거리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런데 비록 꿈틀거리는 정도였다고는 해도 도대체 어째서일까?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어? 어디에, 도대체 어디에 그런 근거가 숨어 있는 걸까? 내가 얼마나 분개했는지 자네는 아마 상상도 못할 걸세! 자, 들어보게. 가난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불우한 대학생이 열 때문에 의식을 잃은 그 무서운 병에 걸리기 전날에, 그러나 어쩌면 이미 병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때에 말이야....알겠나! 이 의구심 많고 자존심 강한, 자기 가치를 알고 있는 사나이가, 더욱이 6개월 동안이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던 사나이가 누더기 걸치고 밑 빠진 신을 신고.....사람 같지도 않은 경관들 앞에 서서 그들의 모욕을 꾹 참고 있다. 거기에 뜻하지 않은 빚....7등관 체바로프에게 준, 기한이 지난 어음이 눈앞에 내밀어진다. 게다가 썩은 페인트 냄새, 섭씨 30도의 무더위, 숨 막힐 듯한 공기, 들끓는 사람들, 그 전날에 방문한 사람이 피살된 이야기 등등히 한꺼번에 공복에 밀어닥친 거야! 그러니 누군들 졸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느냐 말이야! 그런데 이것을 일체의 근거로 삼으려 하다니! 망할 자식들, 정말 분통 터질 일이야, 그건 나도 알겠어. 그러나 로쟈, 내가 만일 자네라면 녀석들을 맞대놓고 통쾌하게 비웃어주겠네. 아니, 그보다도 녀석들의 얼굴에다 퉤 침을 뱉어주겠어. 그것도 끈적끈적한 가래침을 말이야.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스무 대쯤 뺨을 갈겨주는 거야. 이게 제일이야. 녀석들에겐 언제나 이런 식으로 본때를 보여줘야 해. 그렇게 끝장을 내야 하는 거야. 침이라도 뱉어주라니까. 기운을 내! 내가 부끄럽지도 않나!“
‘하지만 이 친구도 제법 그럴싸하게 설명하는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침을 뱉어주라고? 그러나 내일은 또 신문을 받아야 해!“ 그는 비통하게 말했다. ”과연 그런 자들한테 변명 같은 걸 해야 할까? 어제 술집에서 자묘토프 같은 바보를 상대한 것만해도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제기랄! 내가 포르피리한테 가보지! 그리고 이번엔 친척으로서 한번 압력을 넣어서 속속들이 다 털어놓게 해야겠어! 그러면 자묘토프 같은 건......“
‘드디어 알아차린 모양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잠깐만!“ 갑자기 그의 어깨를 잡으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잠깐만! 자네 말은 틀렸어! 가만 생각해보니 자네 말은 옳지 않아! 그게 무슨 계략이란 말인가? 자네는 칠장이에 대한 질문이 계략이라는 거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게, 만약 자네가 그 짓을 했다면 칠장이가.....벽을 칠하고 있는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설사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자기에게 불리한 자백을 할 놈이 어디 있겠나?“
”만약에 내가 그 짓을 했다면 틀림없이 칠장이도 방도 봤다고 했을 거야.“ 눈에 띄게 혐오의 빛을 띠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내키지 않은 어조로 대답을 계속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그야 신문할 때 무조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시골드기가 아니면 경험이 없는 풋내기나 하는 짓이니까!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고 경험이 있는 인간이라면 부득이 한 표면적 사실은 되도록 죄다 자백하려고 애쓸 거야. 다마 ㄴ뭔가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거기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 전혀 생각지도 못할 만한 독특한 사실을 삽입하는 거야. 포르피리도 내가 반드시 그러한 답변을 하여, 사실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보았다고 답변하고 설명조로 뭔가를 좀 삽입하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면 그자는 당장 그 자리에서 말꼬리를 잡고는, 이틀 전에는 그곳에 있었을 리 없다, 그러니까 자네는 살인이 있던 날 7시 지나서 그곳에 있었다, 라고 말한다는 거지.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로 꼬리를 잡겠다는 거로군.“
”그래, 녀석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거야. 내겐 잘 생각할 만한 여유라곤 없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사실처럼 대답하려고 초조해져서 사흘 전에 칠장이가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어떻게 그런 것을 잊을 수 있겠나?“
”흔히 있을 수 있지! 그러한 극히 하잘것 없는 일로 교활한 족속들이 곧잘 걸려들게 마련이거든. 인간이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그런 사소한 일로 꼬리를 잡히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으니까. 지극히 교활한 인간은 가장 하잘것없는 일로 꼬리를 잡아야 해. 포르피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바보만은 아니야......“
”그런 짓을 하는 걸 보니 그자도 역시 비열하군!“
라스콜니코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기가 최후의 변명을 시도햇을 때 그렇게까지 활기를 디고 적극적이었던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의 대화는 분명히 어떤 목적에 따라 침울한 혐오의 기분으로 마지못해 계속해왔던 것이다.
‘화제의 관심이 딴 곳으로 흐르고 말았군!’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순간에 뜻하지 않았던 불안한 상념에 놀라기라도 한 듯 그는 갑자기 초조감을 느꼈다. 불안은 차츰 더해갔다. 두 사람은 어느새 바칼레예프의 하숙집 앞까지 와 있었다.
”자네 혼자 들어가게.“ 갑자기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곧 돌아올 테니까.“
”어딜 가려고? 벌써 다 왔는데!“
”난 좀 가봐야 해, 일이 있어서.....30분이면 돌아오지....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게나.“
”마음대로 하게. 나도 따라가겠네!“
”아니, 자네까지 나를 괴롭힐 생각인가?“ 하고 그는 외쳤으나, 그 눈에는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초조와 절망의 빛이 감돌았으므로 라주미힌은 그만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주미힌은 한참 동안 입구 계단에 서서 라스콜니코프가 자기 집이 있는 옆 골목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침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오늘이라도 당장 포르피리 녀석을 레몬처럼 쥐어자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자기들이 너무 오래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해하고 있을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안심시키려고 층계를 올라갔다.
라스콜니코프가 자기 집에 이르렀을 때 관자놀이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숨결도 매우 거칠었다. 그는 부리나케 층계를 올라가서 열려 있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 곧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그대 장물을 감춰두었던 한구석 구멍 난 벽지 쪽으로 달려가서, 그 속에 손을 집어넣고 구석구석까지 벽지의 접힌 곳을 뒤집어보기까지 하면서 몇 분 동안 샅샅이 뒤져보았다. 아무것도 없음ㅇ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일어서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바칼레예프의 집 문앞까지 이르렀을 때 혹시 무슨 물건이, 가령 쇠사슬이라든가 커프스단추라든가 또는 그것을 싸서 노파가 손수 이름을 적어둔 종잇조각 같은 것이 어쩌다가 빠져서 어느 틈바구니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라도 뜻하지 않은, 확고부동한 증거가 되어 느닷없이 그의 눈앞에 제시되는 경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모욕을 당한 듯한, 반쯤 무의식적인 괴상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이윽고 그는 보자를 집어 들고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문으로 내려갔다.
”바로 저분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문지기가 자기 방문 앞에 서서, 누군지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 사나이게게 자기를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가운 같은 옷에 조끼를 입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여자같이 보이는, 얼른 보기엔 상인 같은 차림의 사나이였다. 기름때가 묻은 모자를 쓴 머리는 아래로 푹 수그러지고 전체 모습도 어쩐지 등이 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들어 빠진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그를 쉰 살 이상으로 보이게 하고, 조그맣고 흐릿한 눈은 침울하고 엄하며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문지기 쪽으로 다가가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상인은 곁눈질을 하며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찬찬히 조심스럽게 그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아무 말도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당신 이름을 대면서 여기 이런 대학생이 있느냐, 누구 집에 하숙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내려오기에 내가 가르쳐 주었더니 그냥 가버리지 않습니까. 원, 별사람 다보겠네요.“
문지기도 좀 의아스럽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지라 약간 고개를 갸우뚱한 뒤에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상인 뒤를 쫓아 달려가서 이내 그를 발견했다. 여전히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발긑만을 내려다보면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거리 저쪽 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곧 사나이를 따라잡이 얼마 동안 뒤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사나이와 나란히 걸으며 옆으로 얼굴을 보았다. 저쪽에서도 그를 알아차리고 흘끔 보았으나, 다시 눈을 내려뜨고 말았다. 이렇게 그들은 1분쯤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나를 찾으셨죠.....문지기한테?“ 드디어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열었으나 웬일인지 몹시 작은 목소리였다.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없었다.
”당신은 뭐요....사람을 찾고도....잠자코 있으니....대체 무슨 일이오?“ 라스콜니코프의 목소리를 더듬거렸고, 어째서인지 그 말조차 똑똑히 발음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상인도 이번에는 눈을 들어 기분 나쁜 음울한 눈초리로 라스콜니코프를 쏘아보았다.
”살인자!“ 갑자기 사나이는 나직하나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어.
라스콜니코프는 그 사나이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두 다리는 무서울 만큼 힘이 빠지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순간 심장은 얼어붙는 듯하더니, 이윽고 걸어놓았던 빗장이 벗겨진 듯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다시 아무 말 없이 100보쯤 걸어갔다.
상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은....아니....누가 살인자라는 거요?“ 겨우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라스콜니코프는 중얼거렸다.
”너는 살인자야.“ 사나이는 더한층 명확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증오에 찬 승리의 웃음이라도 풍기는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또다시 라스콜니코프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생기 잃은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두 사람은 그대 네 거리에 이르렀다. 상인은 왼쪽 길로 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자리에 선 채 오랫동안 그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사나이가 50보쯤 걸어갔을 때 홱 몸을 돌리더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분명히 볼 순 없었지만, 이번에도 사나이가 냉정하고 증오에 찬 승리의 웃음을 빙긋이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기진맥진 힘없는 걸음걸이로 무릎을 덜덜 떨면서 마치 꽁꽁 언 사람처럼 되어 라스콜니코프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모자를 벗어 탁자 위에 놓고 10분 가량이나 그 옆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힘없이 소파에 쓰러져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면서 병자처럼 누웠다. 눈이 감겼다. 이렇게 그는 30분쯤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상념, 상념이라기보다 상념의 단편들이, 혹은 환상 같은 것이 질서도 연결도 없이 머리를 스칠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거나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났을 뿐 아무래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얼굴, V사원 종각, 어느 요릿집의 당구대 옆에 서 있던 장교, 어느 지하실 담배 가게 시가 냄새, 목로주점, 구정물로 더럽혀진 달걀 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언제나 캄캄한 뒤 층계, 그런가 하면 어디선가 일요일의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이렇게 갖가지 대상들이 뒤바귀며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쳤다. 그중에는 마음이 끌리는 것도 있어서 거기에 매달려보기도 햇으나, 곧 사라져버렸다.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무엇인가 내부에서 그를 억누르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도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오한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마저 역시 쾌감을 주는 듯한 감촉이었다.
라주미힌의 바쁜 듯한 발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체했다. 라주미힌은 방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듯이 문지방에 서 있다가, 얼마 후 살며시 방 안에 발을 들여놓고 조심스레 소파로 다가왔다. 나스타시야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건드리지 마세요. 푹 쉬게 하세요.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게 좋겠군.“ 라주미힌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다시 30분쯤 지났다. 라스콜니코프는 눈을 떴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받치고 다시 몸을 반듯이 누였다.
‘그 녀석은 대체 누굴까? 땅속에서 솟아난 듯한 그 사나이는 대체 뭐 하는 놈일까? 어디 있다가 뭘 본 것일까? 그 녀석은 모든 것을 다 봤어, 틀림없다. 그렇지만 대체 그때 어디 서서, 어디서 보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이제야 마루 밑에서 솟아난 듯이 나타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볼 수 있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흠.......‘ 오싹하는 오한에 몸을 떨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미콜라이가 문 뒤에서 발견했다는 주머니, 그것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증거? 10만분의 1정도의 조그만 것이라도 어쩌다 떨어뜨리면 마지막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만큼의 증거가 되니까! 파리가 한 마리 날고 있었는데, 그놈이 본 게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갑자기 기력이 쇠진한 것을, 육체적으로 기력이 쇠진한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혐오를 느꼈다.
’나는 마땅히 이럴 줄 알았어야 하는 거야‘ 하고 그는 쓴 웃음을 흘리면서 생각했다.
’왜 나는 나 자신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예감하면서도 도끼 따위를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짓을 했을까? 나는 미리부터 알았어야 하는 거야......아니, 나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절망한 나머지 신음하듯 속삭였다.
이따금 그는 어떤 상념 앞에 꼼짝도 못하고 멈춰 서곤 했다.
’아니, 그러한 인간들은 애초부터 종류가 다르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진짜 통치자는 툴롱을 페허로 만들고, 파리에서 대학살을 감행하고, 이집트에 대군을 내버리고, 모스크바 원정에서 50만 인명을 소비하고, 빌뉴스에서는 말한마디로 해치우고서도 어디까지나 태연하다. 게다가 죽은 후에는 그런 인간을 모두 우상으로 떠받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인간들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어떤 뜻하지 않은 빗나간 상념이 떠올라 그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나폴레옹, 피라미드, 워털루.....거기에 빨간 가죽 트렁크를 침대 밑에 감추고 있는 야위고 꾀죄죄한, 관리의 미망인인 돈놀이 노파, 이쯤 되면 아무리 포르피리라 해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자들이 어떻게 이것을 소화한담! 미학(美學)이 방해를 할 테니까.....‘나폴레옹이 설마 노파의 침대 밑에 기어들라고!’ 쳇, 시시하다!
때때로 그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열병적인 환희에 젖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노파 따위는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는 열심히 끈질기게 생각했다. ‘노파는 어쩌면 과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노파는 단순한 질병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밟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주의(主義)를 죽였다. 주의를 죽이기는 했으나 밟고 넘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이쪽에 남고 말았다....그저 죽이는 일만 해치운 것이다. 아니, 그것도 이제 보니 제대로 해내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주의는? 바보 같은 라주미힌은 또 뭣 때문에 아까 사회주의자들을 욕했을까? 그들은 일을 좋아하는 수완 있는 장사꾼들이고 ’인류 공동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은가....그렇다, 인생은 나에게 한 번 주어질 뿐 두 번은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도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데 어떠냐?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을 기다리면서 자기 돈을 주머니 속에 움켜쥐고 굶주린 어머니 곁을 모른 체 지나치기가 싫었을 뿐이다. ’나는 인류 공동의 행복을 건설하기 위해 벽돌 한 개를 운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하, 하! 어째서 자네들은 나를 빠뜨렸지? 어차피 나도 한 번밖에 살지 못하니까 나도 남처럼 살고 싶단 말이다.....아아, 나는 미적(美的)인 이(蝨)다.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대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 나는 정말 이다.’ 그는 짓궂은 기쁨을 느끼면서, 이 상념에 매달려 그것을 파헤치고, 희롱하고, 즐기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그것은 다음의 이유만으로도 명백하다. 첫째, 지금 나 자신이 이라는 것을 고찰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둘째, 나는 전지전능의 신을 증인으로 끌어내 꼬박 한 달 동안 나의 이 계획을 내 육욕이나 생욕(生慾) 때문이 아니라 위대하고 유쾌한 목적 때문이라고 해서 공연한 폐를 끼쳤다는 점이다. 하, 하! 그리고 셋째, 그것을 실행하는 데 되도록 공정과 중용과 척도와 수학을 준수하려고 결심하고 많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유해무익한 놈을 선택했고, 또 그것을 죽이고 나서도 자기의 첫걸음에 꼭 필요한 정도만을 알맞게 취하려고 했다는 점이다....나머지는 유언장에 따라 자연히 수도원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하, 하! 따라서 나는 역시 이밖에는 안 되는 인간이다’하고 그는 이를 갈면서 덧붙였다. ‘어쩌면 나 자신이 살해당한 이보다 더 더럽고 혐오할 만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죽이고 난 뒤엔 반드시 이런 독백을 하리라고 미리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아 아, 이 두려움에 비길 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아아, 이 저속함! 이 비열함......아아, 이제는 나도 이해하겠다. 말을 타고 대검을 휘두르면서, 알라의 신이 명한다. 복종하라, 떨고 있는 버러지 같은 놈들아! 라고 호령한 저 예언자를 알 만하다! 어느 거리를 가로막고 거창한 포열(砲列)을 짓게 하고, 죄가 있든 없든 구별없이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용서 없이 쏘아대는 예언자는 그야말로 정당하다. 복종하라, 떨고 있는 비열한 자들아, 희망을 품지 마라, 이건 너희들이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아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 노파를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머리털은 땀으로 흠뻑 젖고, 떨리는 입술은 바싹 마르고, 움직이지 않는 눈초리는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 나는 이 두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 그 두 사람을 증오하는 것일까? 그렇다, 그들을 증오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증오하고 있다. 곁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로....아까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서 키스를 햇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를 포옹하면서, 만약 그 일을 알게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아니, 그렇다면 차라리 죄다 말해버릴까? 어차피 그렇게 될 테니까......흠! 어머니도 나와 다를 게 없지 않느냐.’ 그는 마치 자신을 사로잡는 악몽과 싸우기라도 하듯이 열심히 생각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아, 정말이지 그 노파가 미워 죽겠구나! 만일 그 노파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또 한 번 그녀를 죽일 것이다. 가엾은 리자베타! 무엇 때문에 그런 곳에 불쑥 나타났을까! 그러나 이상하다, 왜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을까, 마치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리자베타! 소냐! 두 사람 다 상냥한 눈을 가진 가엾고 얌전한 여자다....착하디착한 여자들, 왜 그녀들은 울지 않는가? 왜 신음하지 않는가? 그녀들은 모든 것을 다 주면서도....그 눈은 상냥하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소냐! 소냐! 조용한 소냐!‘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새 어떻게 해서 거리 한가운데 서 있는지 기억이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미 늦은 저녁녘이었다. 황혼 빛도 짙어지고 둥근 달도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어째선지 공기는 유달리 후텁지근했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직공이나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흩어져 가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산택하고 있었다. 석회며, 먼지며, 시궁창 냄새가 풍긴다. 라스콜니코프는 수심 어린 침울한 모습으로 걸었다. 그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집을 나왔으므로 무엇인가 해야 하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맣게 잊었다. 문득 그는 발길을 멈췄다. 한길 건너편 보도 위에 한 사나이가 서서 그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길을 건너서 그 사나이 쪽으로 갔다. 그러자 사나이는 휙 몸을 돌리더니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보지도 않을분더러 자기가 부르지도 ㅇ낳은 것 같은 태도로 걷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정말 저 사내가 부른 걸까?‘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으나, 그래도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열 걸음도 채 가기 전에 그 사나이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가운 차림의 등이 굽은 아까 그 상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조금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 후 어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나이는 여전히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상인은 어느 큼빅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라스콜니코프는 급히 그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사나이가 돌아보지 않을까, 자기를 부르지나 않을까 하살피기 시작했다. 과연 사나이는 대문을 지나 뒤뜰로 발을 들여놓자 홱 뒤를 돌아보며 다시 그에게 손짓한 듯했다. 라스콜니코프는 곧 문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뒤뜰에 상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나이는 바로 앞 층계를 올라간 모양이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뒤를 쫓아 올라갔다. 과연 2층쯤 이ㅜ에서 누군가의 규칙적인 여유로운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층계는 어딘지 눈에 익었다! 아, 저기 아래층 창문이 보인다. 달빛이 침울하고 신비스럽게 유리를 통해 비쳐 들고 있다. 이제 곧 2층이다. 앗! 이것은 칠장이들이 페인트칠을 하던 바로 그 방이구나... 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을가! 앞에가던 사람이 발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걸음ㅇ르 뭠췄던가, 아니면 어디엔가 숨은 모양이다.’ 아, 이제 3층이다. 더 올라간 것일까? 어찌나 조용한지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더 올라갔다. 자기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그를 무섭고 불안하게 했다. 아, 어쩌면 이렇게 어두울까! 상인은 분명히 어딘가 이 근처에 숨었을 것이다. 앗! 그 방의 문은 층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은 깜깜하고 텅 비어 인기척이 없고, 가구류도 죄다 실어 내간 듯했다. 살그머니 발끝으로 걸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방 안 전체가 선명한 달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여기는 모든 게 전과 다름없었다. 의자, 거울, 노란 소파, 액자의 그림들, 커다랗고 둥근 달이 붉은 구릿빛을 내며 창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달빛 때문에 이렇게 고요한가 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달은 지금 나한테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을 게다.’ 그는 서서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달빛이 조용하면 할수록 그의 심장은 점점 더 세게 고동쳐서 나중에는 아플 정도였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갑자기 나뭇조각이라도 꺾이는 듯한 메마른 소리가 일순간 정적을 깨뜨렸으나 주위는 다시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을 깬 파리 한 마리가 놀란 듯 날아가다가 유리에 부딪혀 애처럽게 윙윙거린다. 마침 이 순간 한쪽 구석의 조그마한 찬장과 창문 사이 벽에 걸려 있는 여자용 외투 같은 것이 눈에 띄였다. ‘왜 저런 곳에 여자 외투가 걸려 있을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전엔 저런 것이 없었는데......’ 그는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러자 외투 뒤에 누가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조심조심 외투를 걷어보았다. 거기에는 의자가 놓여 있고, 그 한 귀퉁이에 노파가 걸터앉아 있었다. 몸을 앞으로 꺾고 고개는 푹 숙이고 있으므로 얼굴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 노파였다. 그는 잠시 노파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무서워하는군!’ 하고 그는 생각하고, 살그머니 올가미에서 도끼를 빼어 노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한 번, 또 한 번, 그러나 이상하게도 노파는 도끼로 얻어맞고도 옴짝달싹 않는다. 마치 목상(木像)과도 같았다. 그는 깜짝 놀라 좀 더 가까이 몸을 굽히고 노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는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에 닿을 만큼 몸을 굽히고 밑에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마치 송장처럼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노파는 앉은 채로 웃고 있지 않은가. 그가 들을까 봐 열심히 참으면서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웃고 있었다. 갑자기 침실 문이 방긋이 열리고, 거기서도 역시 사람들이 웃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힘을 다해 노파의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끼로 내리칠 때마다 침실의 웃음소리와 속삭임은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높이 들리고, 노파는 온몸을 흔들면서 웃어젖혔다. 그는 도망치려 했으나 현관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층계로 향한 문들은 모조리 열려 있고 복도에도, 층계에도, 그리고 아래쪽에도.....머리들을 서로 맞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 숨을 죽이고 말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그는 가슴이 죄어들고 발을 뿌리가 박힌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려다가....퍼뜩 눈을 떴다.
그는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문은 활짝 열려 있고, 문지방 위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한 사나이가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눈을 뜨기도 전에 다시 감아버렸다. 그는 반듯이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직도 꿈의 계속일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살피려고 저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살며시 속눈섭을 쳐들어 보았다. 낯선 사나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나이는 조심스레 문지방을 넘어서, 뒤로 살그머니 문을 닫고는 탁자로 가까이 다가와 1분쯤 기다렸다. 그사이에도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다음 조용히 소리 나지 않게 소파 옆 의자에 앉고는, 모자를 옆의 마루 위에 놓고 두 손을 스틱 위에 포개고서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끝까지 기다릴 모양이다. 깜박이는 속눈썹 사이로 본 바로는, 그는 이미 젊은 편이 아니며 엷은 빛의 숱 많은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건장한 몸집의 사나이였다.
10분쯤 지났다. 아직 밝기는 했으나, 날은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층계 쪽에서도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힘차게 날다가 유리창에 부딪혀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소파 위에 앉았다.
“자, 말하시오, 당신은 무슨 볼일이 있소?”
“아니, 나도 당신이 잠든 것이 아니고 그저 잠든 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낯선 사나이는 침착하게 웃으며넛 기묘한 어조로 대답했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나는 아르카지 이바노비치 스비드리가일로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