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비유품 제 3」을 풀어본다(44)
3-35.
“사리불이여, 부처는 이런 사정을 다 살펴 알게 되었으니,
<내가 중생들의 어버이가 되어 반드시 이런 고난을 뿌리 뽑고,
깨달음에서 오는 무량무변한 지혜의 즐거움을 주어 그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리불이여, 여래는 또
<만약 방편을 뒤로 한 채, 단지 부처가 지닌 신통력과 지혜력만
내세워 내가 모든 중생들에게 여래의 지견과 십력과 무소외를
찬탄이나 하고 있다면, 중생들이 이로써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생노병사와 우비고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계의 불타는 집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러한 중생들이
깨달음에서 오는 지혜를 능히 이해할 마음이 생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舍利弗 佛見此已 便作是念
<我爲衆生之父 應拔其苦難 與無量無邊 佛智慧樂 令其遊戱>
舍利弗 如來 復作是念
<若我 但以神力及智慧力 捨於方便 爲諸衆生 讚如來知見
力無所畏者 衆生 不能以是得度
所以者何 是諸衆生 未免生老病死 憂悲苦惱 而爲三界火宅所燒
何由能解佛智慧>
【풀 이】
●<若我 但以神力及智慧力 捨於方便 爲諸衆生 讚如來知見 力無所畏者
衆生 不能以是得度>
<만약 방편을 뒤로 한 채, 단지 부처가 지닌 신통력과 지혜력만
내세워 내가 모든 중생들에게 여래의 지견과 십력과 무소외를
찬탄이나 하고 있다면, 중생들이 이로써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이 구절은 「2-59」의 게송 중 아래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若但讚佛乘 衆生沒在苦 不能信是法
破法不信故 墜於三惡道 我寧不說法 疾入於涅槃>
(밤낮없이 일불승을 오직 찬탄 일삼으면
고(苦)에 빠진 모든 중생 이 가르침 믿지 못해
법을 깨고 불신하여 삼악도에 떨어질 새
이 몸 부처 어찌하여 불도 설법 마다하고
서둘러서 멸도하여 열반 들려 하겠는가)
●未免生老病死 憂悲苦惱 而爲三界火宅所燒 何由能解佛智慧
<생노병사로 인해 생기는 우비고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三界火宅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어찌 부처님의 지혜를 능히 깨달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부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라는 말이고,
몸에 박힌 독화살을 뽑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라는 말이고,
그래서 방편설법이 먼저 할 일이다, 라는 말이다.
*免127 벗어날 면(피하다)
3-36.
“사리불이여, 비록 저 거부장자가 몸에도 힘이 있고, 팔에도 힘이
있었으나 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방편을 사용하여 모든 아들을 불타는 집의 환난으로부터 온 마음을
다해 건져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들에게 제각기 귀한 보석으로
장식한 거대수레를 줍니다.
여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여래에게는 신통력도 있고, 무소외의 힘도 있으나 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모든 지혜를 모아 방편을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불타는 집, 삼계로부터 중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빠져 나오도록 성문의 길, 벽지불의 길, 보살의 길 등 삼승의
가르침을 설합니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불타는 집, 삼계에
머물고자 해서는 안 된다. 보기 좋은 겉모양이나, 듣기 좋은
소리나, 향기로운 냄새나, 입에 맞는 맛이나, 감미로운 촉감은
한갓 너덜거리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거기에 탐착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들에 탐착하여 애착을 가진다면, 바로 그것이 불길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대들은 속히 삼계에서 빠져나와
성문의 길, 벽지불의 길, 보살의 길 등 삼승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나는 삼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확실히
그대들에게 보증합니다. 그대들은 마음을 다해 오로지
수행과 정진에 온힘을 쏟기만 하면 됩니다.
“舍利弗 如彼長者 雖復身手有力 而不用之 但以慇懃方便
勉濟諸子火宅之難然後 各與珍寶大車
如來 亦復如是 雖有力無所畏 而不用之 但以智慧方便
於三界火宅 拔濟衆生 爲說三乘 聲聞 辟支佛 佛乘
而作是言
<汝等 莫得樂住三界火宅 勿貪麤弊 色聲香味觸也
若貪着生愛 則爲所燒 汝速出三界 當得三乘 聲聞 辟支佛 佛乘>
我今爲汝 保任此事 終不虛也 汝等 但當勤修精進
【풀 이】
●<舍利弗 如彼長者 雖復身手有力 而不用之 但以慇懃方便
勉濟諸子火宅之難然後 各與珍寶大車>
*不用之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之는 지시대명사로 <身手力>을 말한다.
*但以慇懃方便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방편을 써서>
여기서 <慇懃>은 <간절하게> 또는 <절실하게>이라는 의미.
-慇482 근심할 은(친절하다, 간절하다)
-懃490 은근할 근(정성스럽다, 곡진하다)
*勉濟 <애를 써서 건져내다.>
-勉181 권할 면(힘써 하도록 격려하다, 勸勉),
힘쓸 면(근면하다, 부지런하다, 勉學)
-濟754 건널 제(물을 건너가다), 건질 제(구제하다, 濟世, 濟民),
이를 제(성취하다)
*참고로 이 구절에 대한 다른 번역문을 인용하니 참고하시라.
(구經)
사리불아, 저 장자가 몸과 손에 힘이 있어도 이를 쓰지 않고, 다만 은근히
방편을 써서 모든 아들을 화택의 난에서 건져낸 후에 진기한 보배로 꾸민
큰 수레를 줌과 같이
(무비)
사리불이여, 마치 저 장자가 자신에게 큰 힘이 있지만 그것을 쓰지
아니하고, 은근하게 방편으로써 여러 자식들을 불타는 집에서 건져낸 뒤에
(일본)
Sariputra! Even as that elder, though with power in body and
arms, yet does not use it but only by diligent tact resolutely
saves [his] children from the calamity of the burning house
and then gives each of them great carts made of precious things
●拔濟衆生 爲說三乘 聲聞 辟支佛 佛乘
*拔513 뺄 발(뽑다), 가릴 발(가려 뽑다, 拔擢)
*三乘16 성문, 연각, 보살
(불사)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등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
*佛乘 여기서는 보살에 이르는 길, 즉 보살승.
참고: 佛84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①梵語 Buddha의 음역, 불교의 대도를 깨달은 성인, 특히 석가모니,
②佛像,
③자비심이 두터운 사람, 즉 보살.
여기서는 ③의 의미.
●三界12
중생이 生死輪廻하는 세 가지 세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
●麤弊 너덜너덜한 쓰레기.
*麤1415 거칠 추(성질이 조포하다, 精細하지 아니하다)
*弊431 해질 폐(옷이 해져서 떨어지다), 곤하게 할 폐(피곤하게 하다,
힘들게 하다)
●若貪着生愛
<貪着으로 인해 愛着이 일어나면>, 즉 탐착으로 인해 色聲香味觸을
놓지 못한다면.
●則爲所燒
<그것이 바로 불에 타는 것이다.> 혹은 <바로 불타는 바가 되어>
●保任此事 終不虛也
<이 일을 책임지고 보증한다. 결코 헛되지 않다.>
*保97 보설 보(보증을 서다)
*任77 맡길 임(委任), 마음대로 할 임(任意), 보증 임(保)
●이 부분의 經文은 다소의 주의력을 요구한다.
<장자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들을 구해낼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편을 쓰서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내어 스스로의 힘으로 불타는
집에서 나오도록 이끌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라는 것이 이 경문의
핵심이다.
위에 인용한 번역문은 <장자가 아들들을 불타는 집으로부터 구해냈다.
다만 완력으로 구하는 대신 방편으로 구해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일견 그것이 그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장자는
방편을 사용하여 아들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따름이다. 장자의 방편을 듣고
불타는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은 아들들이고,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불타는 집에서 나온 것도 아들 스스로였다.
Edward Contze의 말대로, 거미줄을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 그
거미줄로 파리를 몇 마리 잡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라는 이야기다.
부처님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중생들을 직접 구제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여
그 길을 제시해주실 따름이다. 그 방법을 이용하여 스스로 자신을 효과적으로
구제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이 부분의 經文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다소의 주의력이 요구된다고 필자가 말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계 속)
249 過去無數劫 無量滅度佛 百千萬億種 其數不可量
---> 이 많은 것은 佛만이 아니라 온갖 생물? 줄이면 죽은 수많은 인간? 부처로 보기엔 무리?
이 부분은 좀 민감한 부분인데......
무비스님이 소위 <인불사상>을 주장하며, <過去無數劫 無量滅度佛>을 과거에 죽은 사람들을
전부 부처로 보아야 한다고 그의 책에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그렇게 주장한다면, 무비스님은 법화경뿐
아니라, 모든 불경의 내용을 부정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비스님이 주장하는 <인불사상>이 왜 하나의 사상으로 성립될 수 없는지,
조만간 저의 의견을 밝힐 것입니다.
현재의 시점을 기준하여 과거도 끝이 없고, 미래도 끝이 없다, 는 대전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모든 불경의 취지입니다.
현재,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사람이 다 부처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무비스님의 <인불사상>이
가져온 결과로 봅니다. 법화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처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예 앞으로 허심탄회하게 연구하여 봅시다. 진도 끝내고...
현재의 시점을 기준하여 과거도 끝이 없고, 미래도 끝이 없다, 는 대전제 ---> 이게 시법주법위 세간상 상주 아닙니까. 그러니 설사 천년에 석가모니 같은 분이 한분 출생한다해도 무량세월이니 "무량제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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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중생들을 직접 구제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여 그 길을 제시해주실 따름이다. 그 방법을 이용하여 스스로 자신을 효과적으로 구제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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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