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Walter & Sohn이 제작한 초기 피아노의 복제품. 아직 페달이 없다. 현대의 피아노(아래 그림)는 페달과 건반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작동하면서 다채로운 소리를 낸다. [사진 위키피디아] |
평소의 나는 기계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건 달리 말하면 기계를 겁내지 않는다는 소린데,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만 해도 벌벌 떨리는 기계를 만났다. 자동차! 이건 너무 커서인가 아님 내 생명줄을 쥐고 있어서인가, 다른 기계들하곤 달리 왜 이리 두려운 건지. 덕분에 무대 올라가기 전에도 잘 안 하는 스스로 최면 걸기를 종류별로 다 해보고, 무대에서도 잘 안 듣는 내 심장소리를 차 안에서 선명하게 들으며 운전을 배우고 있다. 그래도 딱 하나, 정말 딱 하나, 의외로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페달. 피아노 페달을 25년이나 밟았으니 페달 하난 남들보다 쉽게 밟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위로를 믿지 않았었는데, 묘하게도 피아노 페달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왼쪽 페달인 클러치는 단번에 밟고 살살 떼고, 오른쪽 페달인 브레이크는 살살 밟고 편안히 떼는 것도 그렇고.
피아노의 왼쪽 페달인 우나 코르다(una corda)는 밟았을 때 건반에 딸린 악기의 액션부를 한쪽으로 조금 치우치게 해 액션부가 때리는 현의 면적을 줄여줌으로써 소리를 작게 만든다. 쉽게 손뼉으로 예를 들자면, 양 손바닥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조금 엇갈리게 하는 것이다. 오른손 엄지가 왼쪽 검지에, 오른손 검지가 왼쪽 중지에 마주치도록. 마주치는 면적이 줄어드니 소리가 더 작아지는 이 원리가 바로 왼쪽 페달의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p(피아노)를 위해서만 왼쪽 페달을 쓰는 일은 바보 같은 습관이라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말처럼, 실제 왼쪽 페달은 음량 변화 말고 독특한 음색을 구현하고자 할 때도 쓰인다. 루빈스타인의 말대로라면 mf(메조포르테) 정도의 음량이더라도 어둡거나 침잠한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하면 과감히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고 서게 하는 것은 오른발 몫인 액셀과 브레이크이듯, 피아노도 왼쪽 페달보다는 오른쪽 페달이 더 중요하다. 사실 현이나 관악기와는 달리 한 번 누른 소리를 지속시킬 수 없는 피아노의 최대 한계를 극복하도록 하는 이 ‘서스테인 페달’이야말로 피아노의 핵심 중의 핵심, 꽃 중의 꽃이다.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현을 누르고 있는 댐퍼들을 모두 공중에 띄움으로써 현의 울림을 극대화하는 것. 그러다 보니 음의 길이만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자체가 듣기 좋은, 공명 있는 소리로 바뀌기도 하고, 그래서 꼭 음 길이를 지속시킬 때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밟아줘야 한다. 단 너무 많이 쓰면 소리들이 섞여 듣기 싫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 페달 밟는 것이 숙련되면 자동으로 귀와 링크가 된다. 울림이 너무 적어 건조하게 들린다 싶으면 오른발이 자동으로 페달을 누르고, 반대로 화성이 섞일 정도로 너무 지저분하게 들린다 싶으면 오른발이 자동으로 페달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페달이 지저분한 사람은 귀가 예민하지 않거나, 아니면 귀는 예민하되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얘기가 된다.
나는 어떻냐면…. 난 실은 조금 다른 괴상한 습관이 있는데, 불안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페달을 완전히 떼어버린다…. 짐작하시겠지만 피아니스트의 90%는 당연히 반대로 행동한다. 손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제대로 된 음들을 짚어내지 못하면 페달이라도 많이 밟아 서로 섞이도록 해 뭐가 뭔지 잘 분간이 안 가도록 하며 넘어가는 것이 ‘무마’의 정석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발을 놓아버린다. 실수한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보다도 음들이 잘못 섞여 들리는 것이 더 싫은 모양이다. 처세마저 무시하는 천성인 건지….
페달은 이런 식으로 연주자의 취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손은 아무래도 테크닉 없이 취향을 담아내기가 힘들지만, 발은 상대적으로 단순해 피아니스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고 앞으로는 음악회에 가서 페달을 유심히 쳐다봐야겠다는 분이 있다면 그건 반대다. 남의 운전 수준이나 취향을 페달 밟는 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판단할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저 맘 편히 차에 타고 가며 느끼면 그뿐이듯, 페달이라는 건 언제 밟는지 언제 떼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고 교묘히 음악 속에 녹아드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언젠가는 자동차 페달로도 나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