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9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5주 -
무엇을 소망하며 사는가?
{ 시편 42 : 1~11 }
Ⅰ. Story. 「 가장 어려운 때에 」
어느 바닷가에 있는 리조트에 놀러온 한 꼬마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바다에서 수영을 해도 되요?” 그러자 엄마는 정색을 하면서 “물이 너무 깊어서 안 돼!”라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꼬마는 엄마에게 다시 졸랐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 수영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아빠는 말이야. 생명보험에 들었거든.” 웃자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유머는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웃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실직한 두 사람이 공원을 쓸고 있었습니다. 일을 다 마치자 한 사람은 땅에 침을 뱉으며 한탄의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늘을 보고 웃으며 깊은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땀이 식자 조용히 벤치에 앉아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이 있고, 공원이라도 쓸며 보람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언젠가 기회는 또 다시 올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난 가을, 두 사람의 처지가 갈렸습니다.
늘 즐겁게 공원을 쓸던 사람은 ‘공원관리인’으로 특별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공원을 찾던 주민들이 나서서 그분을 추천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원관리인이 된 그 사람은 추운 어느 겨울날, 공원에서 술이 취한 채 얼어 죽기 직전의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살펴보니 그 사람은 땅에 침을 뱉으며 한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급히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기고 돌보아 주어서 그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실직자였지만, 이렇게 처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운명은 얼마든지 바뀌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환란과 연단 중에도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가꿀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범사를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갈 때, 은총과 사랑과 소망이 임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오늘 여러분은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참 소망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Ⅱ.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대는 나무보다 약합니다. 나무는 한번 자리 잡으면 곳곳하게 하늘을 향해 자랍니다. 바람이 불면 가지는 흔들리지만, 웬만해선 몸통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대는 다릅니다. 갈대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며 기울어버립니다. 갈대가 바람에 의해 좌우되듯이, 사람은 생각하는 바에 따라 기울기 마련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편이고, 어떤 사람은 내 편이 아니라고 편 가르기를 하기 쉽니다. 문제는 한번 편을 갈라버리면, 그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괜히 싫습니다. 예쁜 짓을 하더라도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미운 짓을 해도 밉게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고정관념’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모든 기독교인이 본받고 싶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데반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그가(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8:1a)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 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오죽했으면 다메섹까지 가서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했을까요? 초대교회 안에서 바울은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박해하는 사람이 복음의 증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여 사도들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한번 박해자로 낙인이 찍히고 나니,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다리를 놓아주어 사도들을 만날 수 있었지, 바나바가 아니면 사도들은 변화된 바울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만큼 고정관념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Α. 틀린 말도 자꾸만 들으면 생각이 흔들리게 됩니다(3).
갈대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기우는 것처럼, 사람은 생각하는 것에 따라 흔들리고 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들려오는 말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들으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시인은 분명히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갈급함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다”(1)고 표현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시냇물을 찾겠습니까? 시인은 그런 심정으로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말들입니다. 3절을 볼까요?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참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정적인 말도 자꾸만 듣다보면 생각이 흔들릴 수 있고, 마음이 요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내 음식이 되었다”는 표현은 분하고 답답해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저울이 기울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들이 어떤 말을 할지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밤낮으로 눈물을 음식으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만큼 영향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가장 긍정의 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들어야합니다.
Β. 낙심되지 않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합니다(4-5).
시인은 아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입니다. 그는 성일을 지키는 무리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4).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4b). 왜 그럴까요?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몸도 상하기 마련입니다.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닙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몸의 병이 마음을 매우 나약하게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몸이 병들어 오랜 투병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와 약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환자들이 약을 먹는 성향을 가만히 보면, 대다수가 제 시간에 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 줄 압니다. 사실 약을 한번 먹지 않는다고 하여 정말 대단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약을 사용할 경우 약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특히 내 마음이 낙심하지 않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꿈은 해몽하기에 달렸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유익하게도 되고 해롭게도 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 낙심하는 것과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생각과 마음을 지켜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물론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낙심(落心)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Γ. 희망의 강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흐릅니다(5, 11).
복음성가 중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땐 만족이 없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절망적일 때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치와 경제이야기입니다. 또 사회문제입니다. 정치는 늘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경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떡볶이와 어묵, 튀김 등을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포장마차가 너무 한산하기에 주인장에게 물었습니다. 지하철 역 앞에 있는 포장마차인데 왜 이리 한산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 떡볶이와 어묵도 잘 안 팔린다’는 것입니다. 택시운전자는 경기가 안 좋아서 사람들이 택시도 잘 안 탄다고 합니다. 거의 대다수 상점들이 경기가 안 좋다고 공통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또 TV를 보거나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뉴스 등을 보면, 하루도 사건사고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사회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11)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희망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또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문제투성이 집단으로 비쳐집니다. 어떤 이는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희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Ⅲ.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인생살이에는 절망과 희망,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해롤드 러셀(Harold Russell)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그만 두 팔을 모두 잃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건강했던 몸을 한 순간에 잃고 만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져들어 이렇게 자책했습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해.” 장애인으로 변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끊임없는 절망감에 몸서리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잃은 것보다는 가진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 의수를 달았습니다. 그 후 눈물겨운 노력 끝에 의수로 타이프를 익혔고, 자신이 걸어온 인생역정을 글로 옮겼습니다. 그가 쓴 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이번엔 그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영화에 출연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장애의 몸이었지만, 그는 직접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혼신의 힘으로 연기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1946년 제작된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라는 영화입니다. 혼신을 다한 연기 덕분에 일약 스타가 되어 영화배우라면 누구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특별상을 수상하여 오스카상을 2개나 받는 진기록을 수립했습니다. 그는 받은 상금을 참전 상이용사를 위해 전액 기부했습니다. 시상식이 끝난 후 어떤 기자가 찾아와 그에게 물었습니다. “러셀씨!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혹시 당신을 절망케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한 태도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육체적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제나 잃어버린 것만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늘에 감사하며 살면서 남은 것을 잘 활용할 때, 언젠가는 잃은 것의 열 배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