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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2);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1)
國立古宮博物館
국립고궁박물관은 朝鮮王朝와 大韓帝國의 궁궐 유물들을 전문적으로 수집∙전시하는 文化財廳
소속 박물관으로 純宗 2년(1908) 昌慶宮 내의 皇室博物館으로 개관하여 다음 해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 德壽宮 石造殿 新館으로 이전하면서 李王家博物館으로
格下되었으며, 光復 後 1946년 3월 덕수궁미술관으로 改稱하고 1961년 덕수궁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1969년 5월 德壽宮美術館이 國立博物館으로 統合∙改編되었다.
1992년 덕수궁사무소가 문화재청 직속의 '궁중유물전시관'으로 擴大∙改編된 이후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대대적으로 확대∙개편하였으며 景福宮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國立故宮博物館'을 새롭게 개관하고 이곳에 기존 소장품을 비롯해
四大宮에 분산되어 있던 所藏品 약 4만여 점을 보관∙전시하였으며 2005년 부분 개관한
박물관은 2007년 11월 전면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지상2층, 지하1층(연면적 18,284 ㎡)으로 전시실(15개실), 收藏庫, 보존과학실 등의
시설이 있다.
중요 소장품으로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국보 228호), 白磁大壺(국보 310호) 등 國寶 2점과
보물인 仰釜日晷(보물 845호) 飛擊震天雷(보물 860호), 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보물 제837호), 英祖御眞(보물 제932호) 등 寶物 21점을 소장하고 있다.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
(51) 조선의 국왕
(52) 임금의 자리
=御座[임금이 앉는 의자], 玉座 또는 寶座라고도 한다.
=日月五峰圖(일월오봉도) 병풍. 日月五岳圖, 日月崑崙圖라고도 한다.
어좌 뒤에 세워놓는 장식용 병풍으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는데 왕의 德을 칭송하고 하늘이 자연을 돌보듯이 국왕을 보호해 주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일부에서는 <詩經> [小雅]의 ‘天保’에 묘사된 다섯 종류의 산봉우리, 즉 山, 阜(언덕),
岡(산등성이), 陵(큰 언덕), 그리고 南山에서 五峰의 圖像이 유래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天保’는 신하들과 귀빈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고 그를 위하여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詩이다.
=花罇(화준, 꽃무늬가 있는 항아리) [*罇: 술 두루미(단지) 준]
어좌 좌우에 놓는 紅∙碧桃花 화준은 왕의 권위와 威容을 상징하며, 꽃을 향하여 모여드는
각종 새들과 草蟲은 群臣을 상징한다.
(53) 聖君을 향한 평생교육
(54) 王世子의 成均館 입학식을 그린 그림-侍講院 象牙牌(상아로 만든 號牌)
*侍講院: 조선시대 世子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청.
(55) 서연에서 강론하는 방법을 적은 현판[書筵會講式 懸板]
*書筵: 조선시대 왕세자를 위한 교육 제도로 왕세자에게 經史를 강론해 儒敎的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장이었다.
(56) 아동용 윤리학습서[小學]-아동용 오륜 교육 교재[童蒙先習]
*小學: 宋나라 때 朱子(朱熹)가 소년들에게 儒學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하여 校閱·加筆하여
만든 책으로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필수교재로 널리 애용되었다.
*童蒙先習: 조선시대 書堂에서 교재로 사용한 책으로 中宗 때 朴世茂가 저술하였으며,
千字文을 익히고 난 후 學童들이 배우는 초급교재로, 먼저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
長幼有序·朋友有信의 五倫을 설명하였다.
이어 중국의 三皇五帝에서부터 明나라까지의 歷代 史實과 한국의 檀君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略述하였다.
(57) 경서통(經書桶)과 죽간(竹簡)
儒敎 經典을 외우거나 학습한 내용을 평가할 때 사용하던 경서통에 죽간을 가득 넣어두고
그 중 하나를 뽑은 다음 거기에 적힌 글귀를 읽고 스승의 질문에 답하였다.
*經書桶: 孟子-詩經-書經-小學(왼쪽부터)
(58) 준명지보-유서지보-황제지보(왼쪽부터)
=濬明之寶: 世子侍講院 官員의 敎旨에 사용한 國璽로 高宗 26년(1889)부터 사용되었으며,
이와 유사한 국새로는 ‘欽文之寶’, ‘明德之寶’, ‘廣運之寶’ 등이 있었다.
(*璽: 옥새 새 *欽: 공경할 흠)
=諭書之寶 -高宗 13년(1876)경-
유서지보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서인 諭書에 捺印하여 사용한 인장으로 世宗 때부터
高宗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大韓帝國 시대에는 ‘勅命之寶’로 바뀌었다. (*諭: 타이를 유)
=皇帝之寶 -大韓帝國 光武 元年(1897)-
황제지보는 皇帝國 임을 천명한 大韓帝國 선포 이후부터 사용한 국새로
勳記(훈장 서훈 사유)와 親任官勅旨(국왕이 직접 임명하던 官職)용으로 제작되었다.
(59) 수강태황제보
壽康太皇帝寶는 隆熙 원년(1907) 純宗皇帝가 高宗皇帝에게 ‘壽康’이라는 尊號를 올리면서
제작한 御寶이다. 8각의 측면에는 周易의 八卦를 새겼는데 이런 어보는 조선과 대한제국을
통틀어 희귀한 형식이다.
(60) 영조가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유서[諭世孫書] -英祖 52년(1776)-
英祖가 83세에 당시 世孫이던 正祖에게 銀印을 내릴 때 함께 下賜한 諭書로 正祖의 孝誠이
萬世에 전해지기 바라는 마음과 後繼者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61) 英祖가 正祖의 孝心에 감동하여 하사한 은인[正祖孝心銀印]
英祖 52년(1776) 영조가 83세 때 王世孫이던 正祖의 孝心에 감동하여 내린 銀製 印章으로
영조의 親筆로 <孝孫/八十三書>라고 새겼다.
(62) 임금의 옥대-규-면류관(왼쪽부터)
=玉帶: 玉 장식을 붙여 만든 허리띠로 王과 王世子 등이 朝服, 常服, 祭服을 입을 때 둘렀다.
*朝服: 朝會 때 왕이 차려 입는 禮服.
=圭: 왕이 大禮服을 입을 때 손에 쥐는 瑞玉으로 ‘圭’는 ‘흙 토(土)’자를 두 번 겹친 글자로
天子로부터 받은 땅을 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大禮服: 국가의 중대한 의식 때 입는 예복.
=冕旒冠: 九章服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格式의 모자이다.
앞 뒤로 옥과 구슬이 늘어져 있어 視野를 가리고 좌우에도 옥구슬이 늘어져 있는
것은 ‘惡은 보지 말고, 나쁜 말은 듣지 말라’는 뜨이 담겨 있다.
*九章服: 王位卽位式, 宗廟祭禮, 正初의 賀禮式, 妃를 맞을 때 등의 儀式에 입는
왕의 大禮服.
(63) 국왕의 면복[九等 冕服]
국왕이 입는 최고의 禮服으로 卽位式, 嘉禮, 宗廟祭禮, 朝會와 正朝에
着用했으며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袞服을 갖추어 입었다.
*袞服: 임금이 입는 禮服인 袞龍袍. (*袞: 곤룡포 곤)
(64) 국왕의 면복[九等 冕服]
(65) 국왕의 면복 장식(일부). 폐슬-패옥(오른쪽)
*폐슬(蔽膝): 무릎 앞을 가리기 위하여 허리 아래로 늘이는 장방형의 천으로 冕服 등에
딸렸으며 衣와 裳 위에 착용하여 무릎 앞만 가린다. (*蔽: 덮을 폐 *膝: 무릎 슬)
*패옥(佩玉): 王·王妃의 法服이나, 文武百官의 朝服과 제복의 좌우에 늘여 차는 옥.
(*佩: 찰 패)
(66) 태조 어진(太祖 御眞) -1997년 권오창 작-
*朝鮮太祖 御眞(원본) -국보 제317호-
조선 태조 李成桂의 御眞은 전북 全州市 完山區 豊南洞 全州 慶基殿(사적 제339호)
御眞博物館에 봉안되어 있으며, 高宗 9년(1872) 圖畵署 畵員 趙重默이 낡은 原本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으로 絹本細筆彩色畵로 150×218㎝이다.
1987년 12월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6월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었다
(67) 영조 어진(英祖 御眞) -보물 제932호, 복제-
원래 초상화 原本은 英祖 20년(1744) 圖畵署 畵員 張景周, 金斗樑이
그린 그림을 光武 4년(1900) 蔡龍臣과 趙錫晉이 이를 보고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樑: 들보 량)
비록 원본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으나 원본을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왕의 영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초상화의 오른쪽 위에 “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庚子 移模”라고 씌어 있다.
(68) 순종 어진(純宗 御眞), 1997년 權五昌 작-
*純宗: 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1910. 8)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皇帝인
순종은 高宗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明成皇后 閔氏, 妃는 純明孝皇后 閔氏,
繼妃는 純貞孝皇后 尹氏이다.
高宗 12년(1875) 世子에 책봉, 1897년 大韓帝國 皇太子에 책봉되었다가
隆熙 1년(1907) 헤이그 特使事件으로 日帝 統監 伊藤博文의 압력에
고종이 讓位하여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어 일본은 순종을 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李王이라
불렀으며, 1926년 4월 창덕궁에서 昇遐하여 南楊州 裕陵(사적 제207호)에
안장되었다.
(69) 국왕의 呼稱과 御寶
(70) 왕권의 상징물. 어보(御寶), 어책(御冊), 교명(敎命)
(71) 태조 금보(太祖金寶), 조선 太祖의 尊號를 새긴 御寶.
[康獻 至仁啓運 聖文神武 正義光德 大王之寶](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왕지보)
太祖의 諱는 원래 成桂이나 즉위 후 旦으로 고쳤으며, 字는 君晋 또는 仲澤, 호는 松軒이다.
1392년 7월 開城 壽昌宮에서 즉위하고 1394년 漢陽으로 都城을 옮겼으며, 1398년
定宗에게 讓位하고 上王으로 물러났으며, 太宗 8년(1408) 5월 昌德宮 別殿에서 승하하니
재위 7년, 춘추 74세였다. ‘康獻’은 明에서 내린 諡號이며, 肅宗 9년(1683)에
<正義光德>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면서 만든 어보이다.
위엄 있는 작풍의 용머리를 한 거북모양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諡號: 왕이나 士大夫들이 죽은 뒤에 그 功德을 찬양하여 追贈하는 號.
왕의 시호는 중국황제로부터 받는 諡號(賜諡)와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가 있다.
太祖 李成桂의 賜諡는 ‘康獻’이다.
*廟號: 왕의 死後 宗廟에 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용도로 追贈된 것.
太祖. 世宗, 正祖 등이 묘호이다.
*諱;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太祖 李成桂가 諱를 旦으로 고친 이후 후손들의 이름을 한 글자로 하면서 일반 백성들과
同名異人을 피하려고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글자를 골랐기 때문에 태조의 후손들
이름은 낯설고 어려운 글자들로 이루어 졌다.
(72) 숙종 옥보-숙종 비 인원왕후 옥보
=肅宗 玉寶: 肅宗 39년(1713)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尊號를 올리면서 만든 御寶로
숙종에게는 ‘顯義光倫 睿聖英烈(현의광륜 예성영렬)’, 仁敬王后에게는 ‘光列’,
繼妃 仁顯王后에게는 ‘孝敬’, 제2계비 仁元王后에게는 ‘惠順’이라고 올렸다.
=肅宗 妃 仁元王后 玉寶: 英祖 28년(1752) ‘壽昌’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御寶로
인원왕후는 肅宗 28년(1702)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숙종 昇遐 後에는 王大妃로서
王室의 慶事가 있을 때 마다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먼저 존호를 받았다.
*尊號: 왕이나 왕비의 德을 기리기 위하여 올리던 칭호.
(73) 영조 비 정순왕후 왕비책봉 금보, 옥책, 교명
*貞純王后(1745~1805)
본관 慶州, 鰲興府院君 金漢耉의 딸로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
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
金氏)이며, 貞純은 諡號이다. 英祖 妃 貞聖王后가 타계하자 英祖 35년(1759) 15세로
51세 年上의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鰲: 자라 오 *耉: 늙을 구)
친정이 老論의 中心 家門이었음에 비해 思悼世子는 少論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호적상 자식인 사도세자가 자기보다 10세나 年上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친정 오라버니 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思悼世子를 배척한 僻派가 正祖 때에
사도세자문제 등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時派와 대립하였다. (*僻: 궁벽할 벽)
1800년 純祖가 11세로 즉위하자 垂簾聽政하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公言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면서
朝廷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正祖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時派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정조의 이복동생
恩彦君 䄄과 정조의 친모 惠慶宮洪氏의 동생인 洪樂任 등은 처형되었다.(*䄄: 제사 지낼 인)
다음해에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丁若鏞 등의 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했는데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金觀柱·金日柱·金龍柱 및 영의정 沈煥之 등이 뒷받침하였다.
*朝鮮王朝에서 貞純王后는 文定王后 다음 또는 버금가는 惡后가 아닐까?
(74) 조선왕실의 족보(族譜)
(75) <璿源錄衙門> 현판 (*璿: 구슬 선)
조선 왕조의 계보를 만들기 위하여 설치했던 임시 官衙인 璿錄廳 현판.
(76) 璿源錄(선원록)
선원록은 왕실 족보로 국가에서 관리하는 왕의 親姻戚에 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太宗 이전의 조선 왕실 족보에는 조선왕실의 始祖 李翰을 비롯하여 李元桂, 李和 등
太祖 李成桂의 異腹兄弟들도 수록되어 있었으나 太宗은 자신의 死後에 일어날지도 모를
왕위계승 분쟁을 우려하여 1412년에 왕실 족보를 <璿源錄>, <宗親錄>, <類附錄>의
세 가지로 분할하여 작성할 것을 명하였다.
<선원록>에는 始祖인 李翰부터 太宗 자신까지의 직계만을 수록하고, <종친록>에는 왕의
아들 중에서도 嫡子를 대상으로 하여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아들만을, <유부록>에는 딸과
庶孼(첩의 소생)을 수록하였다. (*孼: 서자 얼)
이로써 조선의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태조 이성계의 異腹兄弟들은 왕위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태종의 후손만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조선왕실의
정착과 안정을 꾀하였다.
(77) 선원속보-선원계보기략(오른쪽)
=璿源續譜: 高宗 때 간행된 조선왕실의 종합 족보로 기존의 왕실족보인 璿源系譜紀略에
뒤이어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선원속보라고 했다.
선원속보는 哲宗 11년(1860)에 작성되기 시작하여 8년만인 高宗 4년(1867)에
완성되었는데 <선원속보>의 양은 全州 李氏 102派의 派譜를 종합한 350권에
이르렀으며 1900년에 간행도었다.
=璿源系譜記略: 조선시대 舊皇室의 族譜 16책으로 <璿源譜略> 또는
<璿源錄>이라고도 한다.
숙종 때 처음 간행한 것으로 역대 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重校·補刊한 것을
高宗 34년(1897)에 合刊하였다. 總敍·凡例·先系·繼序圖·世系·八高祖圖 등이
수록되었다.
계속重刊한 것은 왕실의 여러 慶弔事로 인해 변경 사항이나 새로운 기재 사항이
생겼으며, 왕의 卽位·尊號·徽號·諡號·陵號, 妃嬪의 책봉, 왕세자·왕세손의 탄생 등을
追記했기 때문이다.
(78) 국가행사의 규범 의궤, 華城城役儀軌-整理儀軌(오른쪽)
儀軌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儀禮의 全貌를 소상하게 기록한 書冊이다.
實錄 등에도 의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내용의 규모가 尨大하고 소상하며 행차모습 등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부분이 많아 의궤로 제작하여 왕실의 婚事, 葬禮, 祔廟(三年喪이
지난 뒤에 神主를 종묘에 모심), 건축, 잔치, 편찬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여
유사한 행사가 있을 때 참고하도록 하였다.
(79) 역대 임금의 초상화 제작을 기록한 의궤(儀軌)
역대 임금의 御眞을 모셨던 慶運宮 璿源殿의 화재로 소실된 太祖, 肅宗, 英祖, 正祖, 純祖,
文祖(純祖의 세자이며 憲宗의 부친), 憲宗의 초상을 光武 5년(1901) 새로 模寫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80) 宗廟 正殿을 수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81)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는 조선시대 華城城郭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으로
正祖 18년(1794) 1월~정조 20년(1796) 8월에 걸쳐 樊巖·蔡濟恭이 城役의 총 지휘를 맡고
茶山 丁若鏞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하였다. (*樊: 울타리 번)
화성성곽의 축조는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여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정조가 奉朝賀 金鍾秀에게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으며 純祖 1년(1801) 9월에 인쇄 발간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내용도 중요한 學術資料이지만, 정교한 活字나 高度의 인쇄술을 잘 나타낸
표본적인 서적으로 귀중함은 물론 조선 후기 築城工事의 실태와 武器 發達에 대응하는
築城法을 잘 나타냈으며, 大役事에 소요된 物動量과 경영의 本末을 알 수 있어
社會經濟史的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규장각도서 중의 <華城行宮本)>에 포함되어 있으며 2007년 7월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水原 華城: 사적 제3호, 199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으며
성곽 길이 약 5,744m, 성벽 높이 약 4.9∼6.2m, 면적 371,145㎡이다.
(82) 正祖의 華城行次
(83) 정조의 화성능행도 병풍[華城行幸圖 屛風] –보물 제1430호, 원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正祖 19년(1795) 정조의 父親 思悼世子의 탄신 60주년과 모친 惠慶宮 洪氏의 回甲이 된
해로 정조는 이를 기념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華城行宮에서 回甲宴을 치르고 부친의 묘소
顯隆園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행사는 임시로 조직된 整理所에서 담당하고 그 전모는
<園幸乙卯整理儀軌>로 출간되었다.
행사를 모두 마친 뒤 주요 장면을 8폭으로 그린 병풍 <華城行幸圖 屛風>은 당시 최고의
畵員으로 奎章閣 差備待令畵員이었던 金得臣, 李寅文 등이 그렸으며, 그 내용은
‘華城聖廟展拜圖’, ‘洛南軒放榜圖’, ‘奉壽堂進饌圖’, ‘洛南軒養老圖’, ‘西將臺夜操圖’,
‘得中亭御射圖’, ‘還御行列圖’, ‘漢江舟橋還御圖’ 등이다.
이 그림은 대표적인 역사적 記錄畵로서 風俗畵의 성격은 물론 歷史資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묘사, 색채 면에서 매우 우수하여 18세기 최고의 기록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84) 정조의 華城陵行圖
正祖班次圖는 正祖가 母親 敬懿王后(惠慶宮 洪氏)의 환갑을 기념하여 父親
莊獻世子(思悼世子)의 華城 顯隆園으로 行次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또는 華城行次圖라고도 한다. 경의왕후의 환갑잔치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園幸乙卯整理儀軌>에 檀園 金弘道의 책임아래 崔得賢, 金得臣, 李寅文,
張漢宗, 許寔 등의 差備待令畵員들이 제작한 木版畵가 남아 있다.
정조반차도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으며,
흑백 木板그림으로 남아있던 것을 1994년에 채색되어 奎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85) 정조의 화성능행도, 御座馬 부분
임금이 타는 御座馬에는 말 만 그려있고 임금인 正祖는 그리지 않았다.
(86) 기록문화의 精髓, <朝鮮王朝實錄>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은 活字本 2,077冊으로 太宗 13년(1413) <太祖實錄>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哲宗實錄>은 高宗 2년(1865)에 완성되었다.
實錄의 편찬은 대개 前王 他界 後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春秋館에 임시로
설치된 實錄廳(또는 撰修廳·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春秋館과 忠州·全州·星州 등 4곳에 史庫가 있었으나 壬辰倭亂으로
全州史庫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宣祖 36년(1603)에서 1606년까지
全州 史庫本 실록을 근거로 太祖에서 明宗까지 13대에 걸친 實錄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이들 실록은 春秋館·妙香山·太白山·五臺山·江華 摩尼山에 史庫를 설치하여 보관했는데,
춘추관실록은 李适의 亂(1624)으로 소실되고, 마니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丙子胡亂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肅宗 4년(1678) 가까운 鼎足山 사고로 옮겼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 전라도 茂朱 赤裳山 史庫로 옮겼다.
藏書閣 소장의 적상산본은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졌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1997년 10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151호 <朝鮮王朝實錄>
=국보 제151-1호 朝鮮王朝實錄 鼎足山史庫本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所藏
=국보 제151-2호 朝鮮王朝實錄 太白山史庫本 부산 연제구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소장
=국보 제151-3호 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국보 제151-4호 朝鮮王朝實錄 其他散葉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87) <實錄閣> 현판
建陽 2년(1897)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奉化 覺華寺에 걸었던 현판
(88) 국조보감 편찬과정을 기록한 책-태조임금 국조보감(오른쪽)
*國朝寶鑑: 조선 역대 국왕의 治績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수록한 編年體 역사책.
*<국조보감>은 世宗 때 정치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모아 후세의 龜鑑으로 삼기 위하여
太祖·太宗寶鑑을 편찬토록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여 世祖가 이를 계승하여 修纂廳을 두고
世祖 4년(1458) 太祖·太宗·世宗·文宗 4祖의 寶鑑을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纂: 지을 찬)
(89) 세종임금 국조보감과 함
太祖·太宗·世宗·文宗 4祖의 寶鑑을 처음으로 완성한 후 여러 차례
발행되어 1908년 哲宗과 憲宗의 국조보감까지 모두 90권 28책이
편찬되었다.
(90) 조선의 중앙관청
(91) 조보
朝報는 조선시대에 承政院의 발표사항을 筆寫하여 배포하던 전근대적인 官報 겸
新聞形態이며, 高宗 31년(1894) 甲午改革 때 ‘官報’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92) 六曹判書의 職印들
(93) 대전통편-대전회통(오른쪽)
=大典通編: 正祖 9년(1785) <經國大典>과 <續大典> 및 그 후에 간행된 법령집을 통합하여
편찬한 法典으로 <경국대전> 이후 300년 만에 새로운 統一法典이 이룩되었다.
=大典會通: 高宗 2년(1865) 왕명에 따라 領議政 趙斗淳, 左議政 金炳學 등이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94) 英祖가 써서 戶曹에 내린 현판[御筆書下戶曹]
영조 10년(1734) 戶曹에 걸었던 현판으로 ‘씀씀이를 절약하여 財力을 축적하고 貢物을
고르게 배정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95) 정조가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
正祖 23년(1799) 정조가 신하들에게 傳敎한 내용을 베껴둔 것으로 燕京(北京)에 가는
使臣들에게 下諭하는 내용으로 두루마리 첫 부분에 ‘己未 七月 十六日’이라고 적혀있어
1799년 7월 16일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傳敎: 임금이 명령을 내림. 또는 그 명령
(96) 文興 政策의 노력
(97) 왕실도서관 奎章閣
(98) <奎章閣> 현판, 昌德宮의 규장각에 걸었던 현판. 일명 內閣이라고도 한다.
正祖가 즉위한 1776년 闕內에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詩文, 親筆의 書畵·顧命·遺敎·
璿譜(王世譜)·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昌德宮 北苑(後苑)에 건물을 신축하고 故事에 따라 ‘奎章閣’이라고
命名하고, 職制를 갖춘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당시 王權을 위태롭게 하던 戚里·宦官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건국 이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1910년 국권피탈로 그 이름이 없어지고, 소장되어 있던 도서는 한때 李王職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고 있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 取調局으로 넘어가고, 1912년 총독부
參事官室로 移管, 1922년 學務局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되어
15만 1519권의 책이 이 대학의 도서관으로 옮겨지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99) 규장각 내부 모습
(100) 조선왕실 도서(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朝鮮王朝實錄-承政院 日記-儀軌-國朝寶鑑-日省錄
=承政院日記 -국보 제303호, 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所藏-
조선시대에 王命의 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자료로 국왕의 동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다.
특히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논의 내용,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등이
加減 없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實錄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朝鮮後期史 연구에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1년 9월에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日省錄 -국보 제153호, 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英祖 36년(1760) 1월부터 隆熙 4년(1910) 8월까지 조선후기 151년간의
國政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日記體의 年代記이다.
<日省錄>은 <朝鮮王朝實錄>·<承政院日記>·<備邊司謄錄>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官撰 年代記로 다른 연대기에는 수록되지 않은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 상황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史料的 가치가 크며,
2011년 5월에 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3);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