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병은 증상이 나타나기 몇 년 전부터 뇌가 변화하기 시작하고, 뇌세포가 서서히 퇴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변화는 영상진단기기를 이용해 뇌스캔을 해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처럼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혈액검사로 간단히 알츠하이머병을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나왔다.
‘신경퇴행성질환 독일 센터’(DZNE)와 헤르티 임상 뇌연구소(HIH), 튀빙겐대학병원 및 미국 워싱턴대 의대(세인트루이스) 과학자를 비롯한 국제 협동연구팀은 최근 혈액 속 단백질로 알츠하이머병의 첫 임상 징후가 나타나기 오래 전에 병의 진행을 정확하게 모니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단백질은 널리 알려진 아밀로이드 베타나 타우 단백질이 아닌 신경미세섬유 단백질 중합체다. 이번 연구는 의학저널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 21일자에 발표됐다.
연구팀이 제시한 혈액 표지자(blood marker)는 또한 새로운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도구로서의 가능성도 제시했다.
피검사로 알츠하이머병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국제연구팀에 의해 개발됐다. 혈관 속을 흐르는 단백질 조각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그린 그림. Source : DZNE /qimono
“치료 늦게 시작하는 것도 치료 잘 안되는 원인”
연구를 이끈 마티아스 저커(Mathias Jucker) 박사(튀빙겐대 교수 겸 DZNE 튀빙겐지부와 HIH 선임연구원)는 “현재 알츠하이머병을 고칠 수 있는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치료를 너무 늦게 시작한다는데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더 나은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과학자들에게는 기억 변화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질병 경과를 살펴보고 예측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방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값비싼 뇌스캔 같은 방법보다 혈액검사가 더 적합하다.
최근 이런 혈액검사의 발전에서 얼마 간의 진전도 있었다. 알츠하이머병과 관련한 혈액검사의 대부분은 이른바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기반으로 한다. 알츠하이머병에서 아밀로이드 단백질은 뇌에 축적될 뿐 아니라 피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커 교수팀은 이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저커 교수는 “우리가 개발한 혈액검사는 피에 있는 아밀로이드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아밀로이드가 뇌에서 하는 일, 즉 신경퇴행을 관찰한다”고 말하고,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뉴런의 사멸을 관찰한다”고 덧붙였다.
‘네이처 메디신’에 실린 논문. ⓒ Nature Medicine
혈류에서의 흔적
뇌세포가 죽으면 혈액 속에서 그 유해가 검출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단백질은 피 속에서 급속히 분해되기 때문에 신경퇴행성 질환의 지표로는 그리 적합치 않다는 게 저커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그러나 예외적으로 신경미세섬유(neurofilament)로 불리는 작은 조각이 이런 분해에 놀라울 정도의 저항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저커 교수팀의 혈액검사는 바로 이 단백질을 기반으로 한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팀은 알츠하이머병의 임상적 증상이 나타나기 오래 전에 신경미세섬유가 피에 축적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또 이 신경미세섬유는 질병 진행과정을 매우 민감하게 반영해서 미래의 발병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405명에 대한 개별 데이터와 샘플을 기반으로 수행됐다. 이 자료들은 국제 협동연구 작업인 ‘우성 유전된 알츠하이머 네트워크[Dominantly Inherited Alzheimer Network" (DIAN)] 안에서 분석된 것이다.
연구에는 DZNE와 HIH, 튀빙겐대학병원, 미국 워싱턴대의대와 전세계의 여러 연구기관들이 참여했다.
이 네트워크는 어떤 유전적 변이로 인해 중년에 이미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한 가족들을 조사하고 있다. 유전자 분석을 하면 가족 구성원들이 치매에 걸릴 것인지 또 언제 걸릴 것인지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다.
뇌 신경세포(뉴런) 그림. 신경미세섬유는 직경 10나노미터에 길이는 수 마이크로미터로 척추동물의 뉴런 중 특히 축삭돌기(axon)에 높게 분포돼 있다. 축삭의 긴 축을 따라 평행하게 연속적으로 겹치는 배열을 형성하며 신경전도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Credit: Wikimedia Commons / BruceBlaus
치매의 징조
저커 교수팀은 이 네트워크에 참여한 개인들을 대상으로 신경미세섬유 농도 변화를 해마다 모니터링했다. 계산으로 예측된 치매 증상 발병 전 16년 동안 대상자들의 혈액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발견됐다.
저커 교수는 “그것은 완전 순수한 신경미세섬유 농도는 아니지만 이 농도의 시간적 변화는 의미가 있을뿐더러 미래의 질병 진행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실제로, 추가 연구에서 연구팀은 신경미세섬유 농도 변화가 신경세포 퇴행을 매우 정확하게 반영하고, 뇌 손상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저커 교수는 “우리는 2년 뒤 실제로 일어난 뇌질량 소실과 인지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뇌의 퇴행은 신경미세섬유 농도 변화율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독성 아밀로이드 단백질 침착과의 상관관계는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질병 유발인자이기는 하지만 신경세포 퇴행은 독립적으로 일어난다는 가정을 지지하는 것이다.
치료 연구를 위한 도구
혈액 내 신경미세섬유 축적은 알츠하이머병뿐만 아니라 다른 신경퇴행성 질환들의 진행과정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이 검사는 어떤 주어진 조건 아래서만 알츠하이머병 진단에 적합하다.
저커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검사는 질병의 진행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임상시험에 올라온 새로운 알츠하이머 치료법의 효과를 조사해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