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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식 백과 사전 스크랩 문화재 불국사의 가람 배치의 의미
푸른날개(푸른샘) 추천 0 조회 124 16.04.19 17: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국사의 가람 배치의 의미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세 가지 설이 전한다.

불국사고금창기((記)의 기록에 의하면,  528년(법흥왕 15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년)에는 무설전(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년)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불국사 사적기(蹟記)에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건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여지나  삼국유사() 권5 <대성효 2세부모()>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불국사 사적이나 불국사고금창기는 기록의 오류가 많이 발견되어 신빙성이 떨어지므로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김대성이 창건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불국사의 입구 코오롱호텔 뒷쪽에는 김대성이 곰을 위해 지었다는 장수사지와 삼층석탑도 있어 삼국유사의 창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당시의 건물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백운교,극락전 12칸,무설전 32칸, 비로전 18칸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하나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사찰내의 불물(佛物)들이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사리함의 유물들은 모두 일본으로 몰래 밀반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불국사의  ‘불국’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차안(此岸)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나라 불국토는 피안(彼岸)으로 부른다.

온갖 번뇌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차안의 세계에 비해 피안의 세계는 정토(淨土) 그 자체다.

그래서 사바세계의 불자들은 불국토에 태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차안의 세계를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불국사는 이러한 신라인들의 염원이 그대로 반영된 사찰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신라 땅 한 곳에 불국토의 염원을 담아놓은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이곳이 곧 불국토라는 정토사상의 실현을 간절히 표현하고자 했으며 절의 이름도 부처님의 나라 곧 '불국(佛國)'이라고 지었던것이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염원은 불국사의 전체적 가람 배치를 통해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불국사는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한 공간 속에 표현해 놓고 있으면서도 석축과 다리(청운교,백운교), 연못(구품연지) 등을 통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두 세계를 명확히 구분해 놓고 있으며 사바세계에서 불국토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는 의미로 거기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계단(다리)이나 연못 등으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불국사는 감은사지와 함께 구릉 2탑형의 대표적 가람배치로서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되 토함산 기슭이라는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각각의 영역으로 나눈 다음 여기에 알맞은 전각들을 세웠다.

따라서 각각의 영역에는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계단, 영역을 둘러싼 회랑, 영역의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되는 건물 등 4개의 기본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불국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가람의 배치가 특이하다는 점이다.

사찰 공간이 4가지 영역으로 따로 공존하여 구역이 확연히 구분되는데. 특히 이 구분은 지면의 높이로 차별을 두고 있으며 다른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단(다리)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공간의 크기와 높이가 서로 다르고 다양한 부처들이 독립되어 모셔져 있으면서도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것이 불국사 가람 배치의 특징이다.

즉 획일적이지 않고 떨어져 각각 존재하면서 하나로 조화가 되도록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영역마다 지면에서 높이가 다르다

 

 

불국사에서는 크게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뉜 불국토를 만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재하는 대웅전 영역,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세계를 표현한 극락전 영역, 그리고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세계가 구현된 비로전 영역 등이 그것이다.

 

불교적인 해석을 하면 

▶ 대웅전 영역은 법화경을 근거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을,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경에 근거해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불국을,

비로전 영역은 화엄경에 근거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불국을 나타낸다고 한다.

▶ 그리고 가장 낮은 백성, 가장 고통 받는 자를 돌보는 관세음 보살은 가장 높은 관음전에 머문다.

 

이들 4개의 영역이 한 공간 안에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의 모습이야말로 신라인들이 그려내고자 했던 이상적 불국의 세계였을 것이다

 

이들 네 영역은 각각 그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극락전이 있는 아미타 영역이 가장 낮으며 이곳에서 건물 하나 높이로 석가모니의 세계인 대웅전이 있고,

비로자나불이 있는 연화장 불국은 대웅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있는 관음전은 사바불국인 대웅전에서 낙가교라고 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불국사 전각의 높이에 따른 배치

 

 

불국사 안내 자원봉사단인 구품연지회에서 발행한 '구품연지요람'이라는 책에는 극락전이 대웅전보다 낮은 곳에 지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교리상 서방정토나 도솔천 모두 수미산 위의 같은 높이에 구축된 천상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국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은 대웅전과 극락전이 같은 높이의 평지에 지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국사 극락전이 대웅전보다 한 단 낮게 지어진 이유는 대웅전 영역은 자력신앙영역이고 극락전은 타력신앙영역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주류였던 자력신앙, 즉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처가 되려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교리와는 다르게 자력신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조성함으로서 그 당시 사회상을 불국사 구조물에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자력신앙이란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자각(自覺)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불 부터 시작해서 수행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해야하는 자력신앙은 그만큼 참선수행이 고통스럽고 힘들다.

 

타력신앙이란 스스로 부처가 되기보다 '아미타불'에게 귀의하고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서방정토에 태어나고 정토에서 다시 수행하여 긍극적으로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타력신앙이다.

 

스님들의 참선수행이 스스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력신앙이 근본이라면, 일반 불자들은 아미타불의 원력을 힘입어 정토에 이르고 다시 부처가 되려는 타력신앙으로 이해하면 될 것같다.

 

 

자력신앙을 의미하는 청운교, 백운교                              타력신앙을 의미하는 안양교, 칠보교

 

이같은 의미는 불국사의 건축 구조물에서도 나타나는데

차안에서 피안(수미산)으로 바로 오르는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는 길고 높아 힘이드는 자력신앙을 의미하며, 타력신앙으로 불국정토(극락세계)에 들어가는  안양, 칠보교는 자력신앙보다는 힘이 덜 들기 때문에 청운 백운교보다 낮고 짧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안양 칠보교를 건너서 오른 아미타불 극락정토에서 사바세계인 대웅전 영역으로 오르려면 또 다른 수행을 의미하는 다리를 건너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다리(계단)가 48대원교이다

극락정토에서 정진수행을 하면 부처님이 되는 긍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양산 통도사의 전각배치도 

 

 

이와 같이 극락전이 대웅전보다 낮은 곳에 배치된 예는 양산 통도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통도사의 많은 전각들은  상노전, 중노전, 하노전라고 하는 3개의 구역이 높이를 달리하며 배치되어 있는데 극락전과 영산전은 가장 낮은 위치인 하로전영역에 위치하고 대웅전은 가장 높은 위치인 상로전에 배치되어 있다.

극락보전에는 당연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가장 위계가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고 혁명적인 파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불국사에서 비로전이 대웅전보다 높게 배치된 것은,

비로자나불은 화엄신앙의 주불로서, 모든 부처와 보살 가운데 최고의 부처이며, 석가모니불조차 비로자나의 현신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그래서 대웅전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관음전은 그 사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이며 불국사 관음전도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관음전을 높은 곳에 짓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머물렀던 곳이 남쪽 바다에 솟아있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으로 바위 절벽으로 된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사찰내에서 가장 높은 곳을 선택하여 전각을 지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이 높고 낮은 곳에 있다고 해서 부처의 품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부처는 동일하다. 다만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배치일 뿐이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오르는 48대원교                                  관음전으로 오르는 낙가교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불좌상

 

불국사의 4영역중 중심공간은 대웅전 영역으로 바탕을 이루는 것은 법화경이다. 이 영역은 다리(청운교?백운교) - 중문(자하문) - 건물(대웅전)에 이르는 축선과 이를 감싸고 있는 회랑으로 구성되며, 중심건물 뒤에 강당(무설전無說殿)을 두어 고대 가람의 전형적 배치형식을 이룬다.

 

대웅전 앞 마당엔 유명한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고 가운데에 석등이 있어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형성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고 쌍탑식 가람배치로는 특이하게 탑 모양이 다른 것은 경전에 충실히 따?음을 보여준다. 즉 석가탑은 석가모니 부처의 세계를, 다보탑은 법화경에 따른 과거불인 다보여래의 상주처를 각각 상징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대웅전 영역의 넓이가 극락전의 넓이 보다 두 배가 넘고, 전각의 넓이도 대웅전(64평)이 극락전(27평)보다 훨씬 크다. 넓이뿐 아니라 높이도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대웅전 영역이 극락전 영역보다 석축 한 단만큼 더 높다.

이렇게 아미타 부처의 극락전보다 석가모니 부처의 대웅전이 크고 높게 강조된 이유는 당시의 신라인이 내세보다 현실세계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며 또한 현실세계를 부처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염원이 강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부분이 강조되었다고 해서 다른 부분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다. 신라인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세상으로, 불국사는 이런 신라인의 생각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이고 다포식 건물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모두 갖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구성미를 지닌 지붕으로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을 합쳐 놓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설전

 

대웅전 뒷편에는 무설전(無說殿)이 있다.

무설(無說)이란 '말이 없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이는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은 말로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다시 말하면 깨달음이란 말이나 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가경에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달을 가켰으면 달을 쳐다 보아야지 왜 손가락만 보느냐?'라는 구절이 있는데, 눈에서 달까지가 공부의 전 과정 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까지의 과정이 유설이고 손가락 끝에서부터 달까지의 과정을 무설의 과정으로, 설명이 없고 실체가 보이지 않아 깨달음으로 깨쳐야하는 이 과정이 힘들고 어려운 공부가 바로 무설이기 때문에 무설전이라고 한다고 한다

 

무설전은 신라 문무왕 10년에 왕명으로 무설전을 짓고 화엄경을 강의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 창건 보다 약 100년 앞서 지어진 건물이지만 1593년 임진왜란 때 불 탄 뒤 1708년에 중건하여 보존하여 오다가 허물어진 것을 1972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무설전은 조선 초기양식으로 지은 맞배지붕이고 주심포식 건물로서 차분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앞뒷면에만 지붕면이 형성되는 가장 간단한 형식의 지붕으로 구조가 간단한 만큼 재료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고 주로 주심포 건물에서 많이 사용된다

 

 

극락전(極樂殿)

 

 

아미타여래불좌상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를 거쳐 안양문(安養門)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는 극락전은 대웅전의 서쪽 한단 낮은 곳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3칸, 측면 3칸의 건물의 비교적 작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750년(영조 26)에 오환(悟還)·무숙(武淑) 등이 중창한 것이지만, 기단(基壇)과 초석·계단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 안에는 내고주(內高柱) 4개를 세웠는데, 뒤쪽의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우고 그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전의 아미타 부처님(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의 수인은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은 가사를 양 어깨에 걸치는 통견이 보통이나 극락전의 아미타불은 편단우견을 하고 있으며 대좌가 없다

또한 아미타불은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모시지만 불국사 극락전의 아미타불은 협시불을 모시지 않고 독불로 좌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전(盧舍殿)

 

 

비로자나불

 

비로전은 불국사 복원 시에 중창된 건물로 불국사 대웅전 일곽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터를 발굴할 때 이 건물터가 불국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형식의 유구였음이 확인되었다. 건물의 양식은 불국사 내에서 유일하게 고려 시대 양식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측면의 중앙 칸이 비교적 넓어 건물평면은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건축의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팔작집형식을 취하였고 내부의 가구구조를 특이하게 한 일례라 할 수 있다.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의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 검지를 왼손 주먹으로 감싼 모양이 특징이며 중생과 부처님, 미혹함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으며 극락전과 같이 협시불이 없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상

 

불국사에서 무설전 뒤 가장 높은 곳에 관음전이 위치하고 있다.

관음전을 높은 곳에 짓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학기 위하여 머물렀던 곳이 남쪽 바다에 솟아있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으로 바위 절벽으로 된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일반 사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설전 뒷편에서 관음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낙가산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로 낙가교(洛迦橋)라 부른다

 

관음전(觀音殿)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볼관() 소리음()자를 써서 관음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가 아기의 울음소리만 듣고서도 배가 고픈지 오줌을 쌌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이 고뇌를 당할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만 듣고서도 그 음성을 관하고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하여 관음(觀音)이라 한 것이다

관음전에는 경명왕 6년(992년) 경명왕비가 악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복으로 만든 관음상이 있었으며 영조 45년(1769년)까지 개금을 한 사실이 있다하나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고 지금있는 불상은 1973년 관음전 복원시 조상하여 봉안한 것이다.

 

관음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이며 내부에는 4개의 안두리 기둥이 있고 다포식의 사모지붕을 얹었다. 불국사에서는 유일하게 모듬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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