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상인의 옥 -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군사는 내가 직접 맡을 것이니, 의정부와 육조에도 물어보고 내게도 물어봐라" 라고 했음. - 병사를 관장하는 병조, 병방대언의 지휘, 종래의 3군부 이외에 의건부를 설치하고 그 휘하에 두는 병권등을 가져갔다. - 강상인은 태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여러 군직을 거쳐 병조참판에 올라, 병조판서 박습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 - 하지만 강상인이 병권에 관여되는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만 했고, 동생 강상례를 불법으로 취직시켰다. - 이에 태종이 빡쳐 강상인을 국문했다. - 8월, 대간의 요구를 뿌리치고, 태종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전리 귀향을 보냈다. - 9월, 직첩을 몰수하고, 병조 관리도 가볍게 벌만 주고 처벌은 일단락이 되었다. - 11월, 심온을 엮을 심산으로 재거론되어, 박습, 심증, 심온이 연좌되어 죽었다. - 이 사건은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착과 외척을 없애려는 목적에서 벌어진것임. |
* 대마도 정벌 -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 출몰하는 해적집단. - 여말선초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 - 고려말 40년간은 왜구가 창궐해 피해가 극심. - 여말 장군 툴신 태조 이성계는 왜구를 방어하는 한편, 귀화왜인을 우대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 대마도는 본래 신라 소속, 차차 왜인들이 거주. - 대마도주는 소씨(宗氏) - 가마쿠라막부시대, 지쿠젠주의 다사이부소이 무토가 그의 가신 소(宗尙重, 소 나오시게)를 대마도에 보내 점령하고 수호대로 삼았다. - 이후 소씨가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 -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척박, 농사에 적합하지 않음. 더구나 당시 일본은 내환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해 식량 구입이 힘듬. - 이에 대마도를 비롯 삼도(쓰시마對馬, 이키섬, 松浦地方) 가 왜구의 근거지가 됨. - 여말선초 수군 확충과 화기 발달에 도움. - 규려말 도부서를 사수서로 개편, 전함들을 건조 수군을 재정비. - 세종 때는 72곳에 829척의 병선, 5만 169명의 기선군을 보유. - 화기는 1377년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 20여 종을 제조. - 첫번째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1) - 동원된 군대는 전함이 1백척 이상, 1만 정도의 군대. -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 고려인 남녀 1백여인을 데리고 돌아옴. - 이 정벌로 고려는 자신감을 가졌고, 이 후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었고 유구국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대마도 정벌의 영향. -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왜구가 120척으로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 수군만호를 살해. - 통양포(18일), 영해성(23일), 11월에도 5회나 침입. - 우정승 김사형을 5도병마도통처사에 임명,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5도의 병선을 모아 아키도와 대마도 정벌. -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로 실행단계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함. -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하에 참예한 후 거의 매년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갔다. -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를 돌아다니며 폐단이 생기기 시작. - 이에 부산포와 내이포에 한해 출입을 허가, 그것도 행장(통행증명서)을 소지한 선박해 한해 기항하도록 함. - 이 지역에 많은 왜인이 거주, 풍기를 문란, 스파이들도 이썽ㅅ다. - 1418년, 경상도의 염포(울산), 가배량(통영시)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 - 하지만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60여회나 되었음. - 그래도 대마도주는 왜선들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 소가 죽은 후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실권은 산미(三味多羅, 대마도 만호)가 장악. - 산미는 여러번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왜구의 두목으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세력을 형석. - 왜구는 명으로 가는 길에 조선 연안을 약탈, 이에 대마도 정벌이 결정. - 1419년 5월, 왜선 49척이 명나라 가던 중 비인현 도두음곶(충만 서천)을 침탈이 결정적 원인. - 해주도 침임했고, 행해도 조전절제사 이사검이 왜구를 치려다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받는 사건이 일어남. -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삼아서 정벌을 감행. - 6월 8일, 병선을 견내량에 모이도록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했다. - 조선에 거주하던 왜인에 조처를 취하고,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인을 목베었다. - 경상도 왜인 591인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분치시켰다. - 이 때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 이종무의 병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 -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 6월 20일,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 -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대답이 없자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 -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포로로 잡고,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쓸만한 것 20척만 남기고 모두 태웠고,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 이종무는 주유 지점에 책을 새워 오래 머물 뜻을 보여주었고, - 6월 29일, 두지포를 수색해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 본국인 8명을 찾아냈다. - 하지만 산으로 숨은 왜군을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 김해 등 수와 군사 백수십인이 전사. - 일본사료 "조선통교대기"에서는 이때 아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함. - 7월 3일, 박실의 패전과 대마도주의 애원에 거제도로 출군. - 이후 대규모 왜구는 없어졌 평화적 내왕자로 변했다. -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 이런 무력시위로 왜국에 많은 위협을 줬다. - 하지만 왜구가 재침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중지. - 1420년, 대마도주는 항복의 뜻을 전해왔고 뒤에 번복하자, 11월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 하지만 실행되지는 않았음. - 1421년,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줄것을 애원, 요구를 들어주었다. * 길재 (1353~1419) - 자는 재보, 호는 야은, 금오산인 - 이색, 정몽주와함께 고려 3은으로 불린다. - 1387년, 성균학정이 되고, 이듬해 순유박사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 - 1389년, 창왕 1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감. - 1391영, 공양왕 3년,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우왕의 부고를 듣고 3년상을 행했다. - 1400년, 정종 2년, 방원이 그를 부렀지만 두왕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니, 이를 갸륵하게 여겨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 1403년, 태종 3년, 길재가 사는 곳이 척박하다 하여 다른 곳에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했다. -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성리학을 가르쳤다. - 그의 문하에는 김숙자등 많은 학자가 배출, 김종직,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
* 집현전. - 집현전은 중국 한나라에서 연원. 정비된 것은 당나라 현종. - 학사를 두고 시강(강의), 장서(책의 보관), 사서(책을 베껴씀), 수서(도서관), 지제고(왕의 교서를 지음)등을 담 -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유사한 제도, -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 -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대학사, 학사를 두어 시강기관으로 삼았지만,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 - 조선 초기 유교주의 국가를 표방하면서, 유교주의적 의례, 제도, 대명사대관계의 문제를 풀기 위해, - 인재의 양성과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드는것이 필요하게 됨. - 1420년, 세종 2년 집현전을 궁궐 안에 설치. - 실무 책임자는 정3품인 부제학. - 전임관(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 10인. 그러다가 15일(1422), 16인(1426), 32인(1435)까지 늘었다가 1436년 20인으로 고정. - 인문계 학생 중에 재주있는 어린 학자들을 뽑았다. - 설치 동기가 학자를 양성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학구적인 특성. - 세종대에는 집협전 학사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그 안에서 승진해 부제학에 이르고, 그 뒤 육조나 승정원으로 진출. - 편의를 위해 많은 도서를 구입, 휴가를 주어 산사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 - 이 밖에도 여러가지 특권. 이로 인해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에서 배출. - 학문연구기관으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수장(수집과 보관)과 이용, 학문 활동, 국왕의 자문. - 하지만 37년의 짧은 기간동안 3기로 나눔. - 1기, 1420~27, 준비기라고 함. - 경연관, 서연관, 종학교관, 강서원관으로 시강과 왕실 교육, 사대문서의 작성, 명나라 사진 접대, 사관으로 역사를 기록. - 사관으로 예조와 더불어 과거 주관, 지제교로서 왕의 명령을 짓고, 제례를 행하고, 공문서의 전달과 접수, - 왕의 교시를 반포하고, 풍수학 연구 등을 담당. - 2기 (1428~36), 전성기, 32인까지 증가. 유교주의적 의례, 제도, 문화 정리 사업, 고대 제도 연구. 편찬 사업. - 고대 제도 연구는 근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실제로 시행하는데 있어서 부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했고, - 실제 정치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참고하기 위해서, - 세종이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명분을 세우는 수단으로 사용. - 편찬사업 - 치평요람, 자치통감훈의, 정관정요주, 역대병요,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실록, 세종실록. - 유교화를 위한 유교 윤리서인 "효행록", "삼강행실" - 국가의 유교적 의례 제도 정리집 "오례의주상정", "세종조상정의주찬록" -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운회언역", 용비어천가주해",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서서언해" - 3기 (14337~55), 정원이 20명으로 축소 조정. 지위가 점차 정치성을 띠는 전환기. - 집현전 초기 지위는 높지 못함. - 1422년, 세종 22년 세자의 정무 처결 기관인 첨사원이 설치되면서 학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 - 이후 언론 활동이 활발해져 언론 기관의 성격, 국가 시책의 논의에도 참가. - 문종 즉위 때부터는 집현전 학사가 대간에 차출되어, 학문적 성격에 질적인 변화가 왔다. - 집현전의 이런 대간의 활동은 세조와 충돌. - 1456년,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도모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남. - 이를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 - 성종 때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이 설치. * 이종무 (1360~1425) - 관련사건 : 2차 왕자의 난, 대마도 정벌 - 1397년, 옹진만호로 재직중 왜구가 침입해 격퇴했다. 이 공으로 첨절제사(일선 진영을 관장하던 무관직)에 올랐다. - 1400년, 상장군으로 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 통원군에 봉해졌다. - 1406년, 태종 6년에 좌군총제가 되어 우군총제를 겸했다. - 1413년, 영길도도안무사가 되었다. - 1418년, 계속 승진하여 삼군도제찰사에 올랐다. - 대마도 정벌에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사 1만 7천을 주어 대마도로 가게 했다. - 귀국한 뒤 찬성사에 올랐으나, 불충한 김훈, 노이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상원에 유배되었다. - 곧 복관되고, - 1412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허조 (1369~1439) 하양허씨 12세손 문경공 좌의정 허조 - 권근의 문인이다. - 1392년, 조선 건국 후 좌보궐 봉상시승으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를 바로잡는데 노력했다. - 태종 즉위 후 사헌부잡단에 발탁, 하지만 강직한 발언으로 왕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 - 1402년, 강직한 성품이 인정받아 이조정랑, - 1404년, 세자시강원좌문학. - 1406년, 경승부소윤,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 -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 - 이 때 명나라 여러 제도를 조사. -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의 공자묘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을 제향하고 양웅을 몰아냈다. - 1408년, 조대림사건에 연루, 춘주(춘천)로 귀양갔다. 곧 복빚. - 1411년, 예조참의, 이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 - 태종조의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 이조, 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다. -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 보고하고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했다. - 세종 즉위 후에는 예조판서로 부민고소금지법(하급관리나 아전이 상급관원을 고소하거나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을 제의 - 1422년,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일정한 수의 관리들을 전문인력화하여 장기근무 시키는 제도) 제정 - 전곡을 다루는 경관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했다. - 또한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는 법제를 만들었다. - 1423년, "속육전" 편수에도 참가. - 1426년, 이조판서에 재임해 대간들의 간언을 보호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 -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 - 1423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효자들과 충신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장려에 힘썼다. - 1424년, 세종이 파저강야인 이만주를 치려 했을 때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며 반대. - 1435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과거시험에 사장보다 강경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함. - 1438년, 세종을 도와 신숙주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다. * 부민고소금지법 -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던 법제. - 1420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에 따라 제정. "경국대전" 형전 소원조에 규정. -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모반대역죄와 불법살인죄를 고소하는 것은 허용, - 하지만 이전, 복례(종)이 그 관원을 고소한 경우, 품관, 이(吏), 민(民)이 관찰사 수령을 고소하는 경우 수리하지 않으며, - 고소자를 장 100, 도 3년에 처했다. - 하지만 관원, 관찰사, 수령의 비리, 불법행위, 오판 등으로 인한 원통한 일은 서울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 이 법의 목적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상하존비의 명분을 확립. - 수령의 탐욕으로 폐단이 있었지만, 관찰사로 하여금 감찰하게 하고 완화 내지 폐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음. |
* 임군례 (~1421) - 부친은 개국 공신에 녹훈된 역관 임언충으로 한족이다. - 임군례는 역관으로 여러번 명나라에 따라가서 큰 부자가 되었음. 하지만 아부를 많이 한다 하여 평판이 안좋았음. - 관의 목수를 사사로이 부렸고, 관의 재정을 도적질한 일로 제거직에서 파직. - 이에 원망하여 태종에게 글을 올렸다. - 하지만 이 글이 아주 거만하고 이징의 참소라는 밀이 있으므로 태종이 노해 임군례를 의금부에 하옥. 교사한 정안지를 심문. - 이 과정에서 임군례가 한 "상왕이 무시로 놀러다니니, 신우가 호곶에 가서 놀며 즐겨하던 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 "정종이 병이라 칭탁하고 왕위를 전위한 것을 황제가 만약 안다면, 충혜왕의 뒤집힌 전철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 알려졌다. - 1421년, 대역죄로 백관을 저자에 모아 놓고 다섯 수레에 찢어 죽였다. * 자치통감강목 - BC 403년 부터 960녀넹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정통, 비정통으로 나누어 대요, 세목으로 기술했다. - 주희는 대요만 썼고, 제자 조사연이 세목을 완성. - 역사적 사실보다는 의리를 중요시하여 너무 간단히 적었기 때문에 앞뒤가 모순되거나 틀린 내용도 적지 않다. - 3국시대에는 촉한을 정통, 위나라를 비정통으로하는 송학의 사관. - 세종 때 교주한 사정전 훈의본인 "훈의자치통감강목"이 유행. * 변계량 (1369~1430) - 네 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 1407년, 태종 7년에 문과중시에 을과 제 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 이 때 가문이 심해,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에 빌기를 청했다. -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 - 1419년, 모두가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를 앞세운 기해동정을 성공하게 했다. - 1420년, 세종 2년에 집현전이 설치된 뒤 대제학이 되었고, - 1426년, 우군도총제부판사가 되었다. -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말의 폐단을 개혁했다. - 대제학으로 귀신을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 세종의 양녕 감싸기. - 태종의 상중에 대신들이 양녕을 내쫓으라고 했음. - 세종은 "부모가 죽었는데 이 무슨 .... " 하면서 봐줬다. - 양녕이 폐서자가 된 후에 편지 한장을 두고 가출한 사건이 있었다. - 양녕은 이틀 후에 돌아왔지만, 태종은 이제 양녕은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말하게 됨. - 대신들이 태종의 이런 일을 고하자, 한 달여의 실랑이 끝에 결국 이천으로 돌려보냈다. - 양녕은 이천에서도 사고를 침. ㅠㅠ -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냥을 다니고, 사람들을 불러 술을 너무 많이 먹여 죽이기도 하고, 남의 개도 훔치기도 했다. - 개를 훔친일은 양녕이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기도 함 ;; - 다시 청주로 내보낸다. - 여기서도 세종은 계속해서 배려해 줌. 쌀과 술을 보내기도 하고, 젖소를 보내기도 했다. - 이후로도 종친들의 잔치나 사냥에 양녕을 부르기도 했고, 계속 양녕이. 어쩌니 저쩌니 하자 이제 양녕에 관해서는 간하지 말라고 했다. - 다시 서울로 불러올렸고, 죽을 때까지 양녕은 잘 살았음. * 박은 (1370~1422) - 관련사건 : 1차 왕자의 난. - 대표관직 : 우의정, 좌의정. - 1394년, 지영주사로 잇을 때 방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 1398년, 1차 왕자의 난때 군사를 동원했다. - 1400년, 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을 도왔다. - 방원이 왕세자가 된 후에 세자좌보덕으로 그를 보필했다. -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 호, 병, 이조의 4조 전서를 두루 역임. - 1406년,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제주도의 동불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해 칭송을 받았다. - 1407년, 진향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 1409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마쳤다. - 1412년, 겸판의용순금사사가 되어 옥무에서 존장을 사용 횟수를 1차 30대로 정해 합리적인 형정 제도를 시행. - 1414년, 이조판서로 고공(인사 고과)의 행정 제도를 개선. - 1416년, 47세로 우의정이 되어 어린나이에 입각하는 예를 만들었다. -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과 대립. - 1418년, 심온의 옥사 때 심온의 반대 입장에 관여했다. -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 죽었다. * 김한로 -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장인. - 1404년, 이조전서로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지만, 명나라에 있는 동안 사리사욕을 채운 사건이 탄로나 파직. - 1407년, 딸이 양녕대군과 혼인, 좌군동지총제가 되었다. - 1408년, 한성부판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 1418년,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켜 세자를 오도했다는 대간의 탄해을 받고, 직첩이 몰수되어 죽산으로 쫓겨나 세자와 인연이 끊겼다. - 1425년, 보관하던 사초를 불태와 자손금고의 처분이 가중되어 자손들의 벼슬길도 막혔다. |
* 서운관 -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관측을 관장하던 관서. - 천변지이를 관측,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 - 1308년, 충렬왕 34년에 서운관으로 개칭. - 관원은 정3품에 해당하는 제점 1인의 책임 아래 20인에 이르는 직원으로 구성. - 고려시대에는 천문대로서 개성에 첨성대를 가지고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운행,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 - 서운관에는 원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고, - 태양 흑점과 1264년, 1374년에는 2개의 보기 드문 큰 헤성을 관측. - 1395년, 조선 건국 후 권근 등이 돌에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 - 세종 때는 영의정의 책임하에 60인에 달한 관원들이 큰 업적을 남겼다. -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물시계, 천체관측용 기기인 간의, 사계절과 일월 5성의 운행을 알아볼 수 있는 혼천의. -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 - 천문대로서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의 두곳에 각각 간의대 또는 관천대를 건립. -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와 하천의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수표를 제작은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세종 이후 몇 차례 개편되었다가 세조에 이르러 관상감으로 개칭. * 제생원 - 조선 초기 서민들의질병 치료 기관. - 1397 태조 6년, 조준의 건의에 따라 설치. - 의료, 의약, 특히 향약의 수납, 보급과 의학교육 및 편찬 사업. - 1406 태종 6년, 창고궁사의 동녀 수십 명을 선발, 맥경, 침구법을 가르쳐 부인의 질병을 치료하게 했다. 이것이 의녀의 시작. - 편찬사업으로는 향약을 써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향약제생지성방, 1398" - 혜민국, 전의감과 함게 일반서민들의 질병을 구료함과 동시에 동서대비원처럼 구호사업에도 관여. 조선 초기 의학발전에 크게 이바지. - 1459 세조 5년, 용관(중요하지 않은 벼슬)을 정리할 대 혜민국에 합병. |
* 유정현 (1355~1426) - 관련사건 : 대마도 정벌 - 대표관직 : 영의정. - 1410년, 형조판소로 승진. - 1416년, 영의정에 임명. - 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삼군도통사에 임명, - 대체로 순탄한 관직생활을 보낸 인물. - 성품은 과단성이 있고 검소 근면했다 함. - 일을 처리 함에 있어서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할 때,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그가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경복 (1377~1438) - 조선 초 무신. - 1402년 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 - 1411년, 경성등처병마절제사가 되어 국경을 수비했다. - 1432년, 판중추원사가 되어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14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 - 백성을 사랑하고 야인들을 진무하여 변경지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 1433년, 정흠지, 정초, 황보인 등과 함께 진서를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 - 이것이 "계축진설"이다. - 진도와 함께 주인으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개국 초기에 국가의 방어를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다. * 최윤덕 (1376~1445) - 그의 가문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 - 아버지 최운해는 이성계에 협력해 위화도 회군에 참여 한후 원종공신이 되었고, 왜구 토벌에 공이 많았다. - 통천 최씨라는 낯선 관향은 이때 전공으로 하사 받은 것이다. - 최윤덕은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변방을 지켰기 때문에 마을에 사는 양수척에게 양육되었다. - 양수척은 천민이었음. - 비참한 생활은 한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경우보다 거칠고 험한 환경에서 자랐다. - 어려서부터 힘이 좋았음. - 특히 활을 잘 쏘았고, 호랑이를 쏴 죽인일 도 잇었다. - 서미성이 합포(마산)을 지킬 때 양수척이 찾아가 최윤덕이 무예가 좋다고 칭찬. - 서미성이 데리고 와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가르쳤다고 함. - 1394년, 18세로 소과에 급제. - 이 때부터 최윤덕은 함경도 이성순무사, 경상도 병마도절제사 등으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참전해 여러번 전공을 세운다. - 태종 10년에는 무과에도 급제. 이러면서 당시 주요한 무장으로 성장. - 이 때부터 그는 동북면 방어를 맡으면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하기 시작. - 만주 지역은 여진족이 흩어져 점거하고 있었더랬음. - 압록강 일대의 건주 여진, 흑룡강 일대의 야인 여진, 지린성 장춘을 근거지로 한 해서 여진.등이 이었는데. - 그중 가장 강성했던 건주 여진은 나중에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를 배출. - 태종 세종 초반까지 여진족이 계속 남하, 두만강 압록강은 물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까지 왔음. - 조선에 복종하면서도, 갑자기 침략과 약탈. -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최북방인 여연과 경원. - 태종 10년 4월, 올량합이 경원 등지를 습격해서 군사 90명을 죽이고 남녀 80명과 말 소 120마리를 빼앗긴 사건이 벌어짐. - 최윤덕이 경성병마사에 임명 현지로 파견. - 이후로도 최윤덕은 이 지역의 야인의 습격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 태종 17년 도성으로 돌아오기까지 6년동안 머물렀다. - 1418년. 이러던 중 세종이 즉위. - 하지만 병권은 여전히 태종이 가지고 있었고, 태종의 신임을 받고 있떤 최윤덕은 이 시기에 국방 사안에 대해 중심적 역할을 함. -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태종에 의해 참찬 겸 삼군도절제사에 임명되면서 무반을 넘어 고위 문반직에 올랐다. - 1419년, 대마도 정벌에도 참여. - 그 뒤에는 공조판서로 서울 성곽 보수를 주도. - 정조사(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명나라에 가는 축하사절)로 명에 파견되기도 함. - 1422년, 태종이 죽고, 최윤덕이 세종 북방 개척을 주도. - 여진족이 자주 칩입했고, 경원에 있던 도호부를 용성(함북 청진 남쪽)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까지 있었음. - 하지만 세종은 경원 일대가 조선의 발상지이므로 내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는 역공을 선택. - 최윤덕은 7세 아래의 김종서와 함게 북방 개척의 주역으로 활약. - 1423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에 제수. 이후 2년 동안 변방에서 복무. - "경이 변진에 간 것이 두 돌이 되었으니 당연히 교대되어야 하지만, 장수의 적임자를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또 지금 북쪽 국경에 사변이 있으니 경을 더 머무르게 해 변방의 안정을 기대하려 한다. 짐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라" - 중앙으로 복귀한 후, 세종 10년에 병조파소로 임명되어 국방정책을 줃도. - 그의 정책에서의 특징은 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 - 공조판서로 있었을 때도 도성 성곽을 보수. 병조판서가 되자 더 본격적으로 추진. - 우선 동북면 일대에 성을 쌓았다. 그후 남방으로 확대. - 세종 11년,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순문사에 임명되자, 해당 지역에서 보수하거나 신축할 성을 보고하게 하고, - 곤남(경남 사천), 합포, 전라도 임피, 무안, 순천 충청도 비인, 보령 등지에 성을 쌓거나 수축했다. - 이때 대간은 비용과 시점의 이유로 반대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의 판단을 믿었다. - 1432년, 8년을 중앙에서 재직한 후, 다시 북방으로. - 건주 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함길도 여연을 침범해 조선군 50여명을 죽이는 사건 발생. - 이듬해 최윤덕이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 기병 1만, 보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정. - 이 전투에서 180명을 죽이고, 230명을 사로 잡고 마소 80여 마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 이 승전은 침범한 여진족을 응징했다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4군 개척을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압록강 상류 지역의 4군(자성군, 우예군, 여연군, 무창군) 영토를 편입시키기 시작. - 이때 설치된 것은 자성군이고, 우예균과 무창군은 이후로부터 3년 후에, 여연군은 태종 때 이미 설치. - 이로써 국토확장과 강력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목표를 추진. - 이후 6진은 김종서가 추진. - 1433년, 이 공으로 우의정에 임명. 열달 뒤에는 맹사성의 후임으로 58세로 좌의정에 제수. -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출동. - 1443년, 서북면 변경에서 야인이 침범 햇을 때, 69세의 몸을 이끌로 출정. |
* 세종 시대의 백성들. - 세종은 흔히 애민의 군주로 불림. - 실제 그런 사례 - 재판을 오래 끌지 않게 하고, 적용법규가 모호하면 가벼운 쪽을, 죄인들의 위생상태도 신경씀. - 관비들의 출산휴가를 100일을 주었고(원래 7일), 산모를 위해 남편도 산후 한달간의 출산휴가. - 하지만 명나라의 과도한 요구로 서민들은 고통을 받았고, - 유랑민이 넘쳐나고, 황해도 일대에는 도적때가 끊이지 않았다. - 북방 개척으로 사민정책으로 역시 고통받았다. - 화폐정책실패. - 세종은 화폐 유통을 적극 추진. 하지만 백성은 호응하지 않음. (쌀이나 포를 사용했더랬음). 그래서 화폐가치도 계속 떨어짐. - 그럼에도 시장에서 화폐가 아닌 다른것으로 매매를 금지한다는 강경책을 쓴다. - 법으로 가산몰수, 벌금. 곤장 등에 처해졌는데, 가산몰수 햇는데 무슨 수로 돈을 냄?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원성은 깊어갔다. - 세종은 포기하지 않고, 동전을 주조했지만 이 역시 외면당했다. - 사회의 보수화. - 여자가 대궐 문에 말타고 출입하지 못하고, - 서자가 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금하고, - 부인들이 외출시 얼굴을 가리고, 가죽신을 서민들이 신지 못하고, -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령고소금지법이다. - 이로 수령들은 날개를 달았고, 백성들은 마지막 보호막마저 잃어버렸다. - 이 시대의 태평성대라 함은 사대부들에 한한 것이었음. |
* 황희 (1363~1452) - 무려 24년을 정승으로 있었고, 그 중 19년은 영의정으로 있었다. - 그는 배려의 아이콘 ;; "니말도 옳다. 니말도 옳다. 그래 니말도 옳구나" - 그의 이미지는 온화, 청렴. 두루뭉술. -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상당히 다름. - 사례 1. 권력형 비리? -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시골에서 사고를 쳤다. - 아전이 인사를 안한다고, 뚜드려팼는데 이를 보고 동료 표운평이 항의했지만, 그도 매타작을 했는데 곧 죽고 말았다. - 아내가 고발했고, 상부로 보고되어 황희에게도 알려졌다. - 황희는 맹사성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 맹사성이 가족을 설득했고, 현감에게 편지를 썼다. - 이렇게 해서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떠넘긴 사건 보고서가 올라가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전모가 들어난다. - 이에 황희와 맹사성은 파면되었다. - 1주일 뒤 두 정승은 복직되었음. - 사례 2. 재주 감목관으로 있으면서, 말 천여 두가 죽은데 책임이 큰 태석균을 두둔했다. - 사례 3.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세워 개간한 땅 상당부분을 차지. - 사례 4. 매관매직 : 교하 수령에게 땅을 받는 대가로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비난을 사기도 했다. - 사례 5. 아이들도 편판이 좋지않았고, 사고도 많이쳤다. - 서자 황중생은 세자궁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고, 조사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이 더 많이 훔친것이 걸렸다. - 이에 황희가 서자를 조종생으로 바꿔버리니 이도 비난을 받았다. - 한 사관은 그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재산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음. - 하지만 그가 정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 - 이 시대 황희보다 깊이 생각하고 멀리 보는 이는 없었음. - 세종의 견제자이자 보완자 역할을 했음. -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내는 세종을 홀로 강력히 저지, 여러번 포기시킨 적이 있었다. - 하지만 세종도 이런 황희를 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그릇으로 사용. - 또한 "황희의 의견을 따랐다"라는 구절이 수도 없이 나옴. - 그의 주장은 결코 두루뭉실하지 않았다. 오히려 맹사성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반면. - 황희는 거침없이 주장하는 타입이고, 큰일을 결단하는 태도도 단호했다. - 황희가 왕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면, 맹사성이 황희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 거침없고 분명하지만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는 얺았다. - 늘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잘 찾아내었음. - 그리하여 일흔을 넘기면서 여러번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은 계속 들어주지 않았음. - 결국 여든 일곱에 영의정에서 물러났고, 90살에 죽었다. |
* 박연 (1378~1458) - 박연의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앙의 주요 관직을 역임. - 좋은 가문의 전도양양한 수재로 소문났고, 효자로도 명성. -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3년상을 위해 산소 옆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살때 호랑이가 그를 지켜주었다는 민담도 있음. -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는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함. - 그가 가야금을 연주하면 새와 짐승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함. -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음악을 위해서라면 미천한 광대에게도 배움을 청했다. - 피파뿐 아니라 비파, 거문고 등도 익혀서 매우 수준급으로 연주. -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음악을 접고 2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 그 후 관료로 승승장구. -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등 출세가도인 청요직을 두로 섭렵. - 그의 음악적 재능이 발한 순간은 아직 세자였던 세종의 시강원 문학직을 맡으면서부터였다. - 세종이 즉위하면서 세종이 그를 관습도감(음악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청)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했다. - 고려 때까지 국가행사에서 사용하던 음악은 정형화된 바 없이,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 - 그래서 음악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향악, 당나라의 당악, 송나라 때 전해온 아악 등등이 혼재. - 세종은 박연에게 명하여 음악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도록 했고, - 성리학을 국가 기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 음악인 아악을 공식음악으로 하고자 했다. - 이제 박연은 우선 악보를 정릴 편찬하고 악기를 만들어 제각각이었던 악기의 음을 조율할 필요를 느꼈다. -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보법(악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악서를 만들었다. - 석경을 비롯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 많은 아악기를 제작. - 모든 악기들의 음을 모두 정확히 조율하여 연주 시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절대음감이었음) - 여러 악기의 조율에 필요한 것이 편경이라는 악기이다. - 편경은 돌로 만든 것이어서 쇠로 만든 종같이 더운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이 변하지 않는다. - 편경은 여러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 - 하지만 편경은 중국의 악기였기 때문에 편경을 마들 돌이 우리나라에 없다고 생각해 쇠로 편경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더랬음. - 운 좋게도 화성에서 편경을 만들 경석이 발견되었고, 편경을 조율할 율관 제작에 필요한 거서(곡물의 일종)이 웅진에서 발견되었다. - 이렇게 되니 박연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편경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박연의 감독하에 세종 8년 가을부터 10년 여름까지 종묘와 영녕전 및 제세아 쓸 편경과 등가에 쓸 편경, 특경등 528매가 만들어졌다. - 이 편경은 중국의 경보다 음이 더 잘맞았다고 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궁중음악으로 아악을 연주하기 시작. - 1431년, 아악에 맞는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이 악기로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 세종은 안마(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하면서 매우 흡족해했다. - 이후 옛 문헌 등을 참고하여 잘못된 부분을 점차로 고쳤고, 마침내 세종 20년 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으로 정통적인 아악을 확립. |
* 농사직설. - 저자 : 정초, 변효문 등 - 1429년,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간행. - 1430년, 각 도의 감사와 주, 부, 군, 현 그리고 서울 안의 시직, 산직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반포. - 정초의 서문에 의하면 - 풍토가 같지 않으면 농법도 같을 수 없다 하여 세종이 각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 주현의 노농들에게 지역에 따라 경험한 바를 자세히 듣고 수집하도록 해서 본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 종래는 중국의 농서를 이용했기 때문에 농업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는데. "농사직설"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숙지. - 1428년 세종 11년에 관찬으로 간행된 이래 조선의 대표적인 농서로 자리매김. 권농 사무의 지침서가 되었다. - 1492년 성종 23년, 1656년 효종 7년, 1686년 숙종 12년 등 수차례 간행. - 판본이 거듭되면서 새로운 항목과 내용이 첨가ㅏ. - 조선후기 농법의 발전에 따라 그 효용성이 반감. "신림경제", "임원경제지" 등 신종 농서가 등장했다. - 하지만 농사직설은 그 기초 자료로 널리 활용. - 목차 - 비곡종(종자의 선택과 저장법), 지경(논밭갈이법), 종마(삼의 파종과 재배법), 종도(벼의 재배법), 종서속(기장, 조, 수의 재배법) - 종직(피의 재배법), 종댇소두녹두(콩, 팥, 녹두의 재배법), 종맥(보리와 밀의 재배법), 종호마(참깨 재배법), 종교맥(메밀 재배법) - 이렇게 10항목. 10 항목의 내용은 주요 곡물에 대한 것이고 설명도 매우 간단. - 벼의 파종법 - 직파법(논에 볍씨를 뿌려 그대로 키우는 방식), 건답법(밭벼처럼 파종하여 키우다가 장마 이후로 물을 담은 채 논벼로 기르는 방법) - 묘종법(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논에 옮겨 심어 재배하는 법), 산도법(밭벼)이 실려있다. |
* 승정원 -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 -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조선의 중추적인 정치기구, -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고, 정원, 후원, 은대, 대언사라고 불렸다. - 고나서가 없고 군무 등 군국기무의 일을 맡아보던 중추원에 정3품의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 각 1명을 두어 일을 맡아 보게 했다. - 1400 정종 2년, 중추원 군무를 의흥삼군부로 이관하면서 승정원을 따로 설치, 승지의 기능을 맡게 했다. - 1401 태종 1년, 의흥삼군부와 병합하여 승추원으로 개편하고 도승지를 지신사, 승지를 대언으로 개칭. - 1405년, 승추부를 병종에 병합하면서 다시 승정원을 독립관서로 설치, 지신사,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 및 당후관 동부대언을 새로 두었다. - 1433 세종 15년,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고쳐 승정원 제도를 완비, 육조의 업무를 분담했다. -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다. -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6방이라 했다. - 6방의 승지는 모두 정3품 당상관으로 임명, - 당후관으로는 정7품 주서 1명을 두어 일기 등 기록을 담당, 중기 이후 사변가주서(정7품) 1명을 더 두었다. - 1894 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 과제를 두었을 때 궁내부 예하의 승선원으로 개편. 그 권한도 축소. - 1895년, 시종원의 비서감이 되었다가 11월 독립하여 비서원으로 개편. - 1907년 폐지. * 정인지 (1396~1478) - 1421년, 상왕(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요하라"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했다. -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 예조의 정랑을 역임. - 1424년, 집현전관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직전에 승진. - 1431년, 정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했다. - 1433년, 지중추원사로 당시 찬, 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을 극력 주장. 그 실시를 확정하는데 공헌했다. -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전품을 분정하는 등 내외의 전제사를 주관. - 1446년, 집현전 대제학으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했고, 훈민정음 서문을 지었다. - 1447년,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하는데 참여. -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 - 1451년, 김종서와 함께 "고려사"를 개찬. - 1452년, 김종서 등과 함게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 - 단종 즉위년, 병조판서가 되어 병정을 관장하면서 단종을 보필. - 그의 강직함을 꺼리는 황보인,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품계는 숭정대부에 올랐으나 관직은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체직. - 1453년, 계유정변의 성공으로 좌의정에 발탁,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하동부원군에 봉군되었다. - "세종실록"을 총감수. - 1455년 세조 1년, 세조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 - 1458년, 공신연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 고신이 몰수되었으나 곧 회복. -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 무례를 범했다고 해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쫓겨났다가 곧 복귀했다. - 1468년, 예종 즉위년에 남이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이 되었고, - 1470년 성종 1년,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를 겸대했다. - 세조 13년(1467)에 설치된 원상제에 따라 원상에 임명된 후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 - 유학과 전고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 - 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문종대에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을 관장하고 역사, 천문, 역법, 아악을 정리. - 아울러 한글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 - 단종~성종 초기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기여. |
* 세종시대 역법 (칠정산) -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 역서를 수입. - 조선시대 우리 실정에 맞도록 처음 만든 역법이 세종시대 "칠정산" - 칠정산은 내, 외편이 있는데, 내편은 날짜, 24절기, 한양의 일출, 일몰 시각. 외편은 일식, 월식을 예보하는데 사용. -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야 임금으로 정당성이 있었고, 하늘의 변화에 잘 부응해야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음. - 그리하여 천문, 역산학을 발전, 매년 역서를 만드는 것이 국가에서 아주 중요한 일. - 고대부터 중국에서 해, 달, 별의 운행을 관찰하여 계산한 음력의 성분인 삭과 양력의 성분인 기를 절충한 태음태양력을 사용. - 역(曆)은 삭(날짜)과 기(절기)를 일치시키는 것이 기본. - 이는 농업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 - 1일과 보름은 달의 위상변화로 알아 낼 수 있지만, 농사는 태양의 운행에 따른 계절의 변화, 곧 24절기에 따라아 지을 수 있다. - 태음태양력을 사용하려면, '달과 해', '해와 별'의 운행을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이들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태음력에 '19태양년 동안에 7개의 윤달을 넣는 것'이다. - 이렇게 해야 태음력과 계절의 주기(태양력)가 서로 일치되어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계절을 알 수 있었다. - 중국에서는 수명개제의 전통에 따라 왕조가 바뀌면 역법도 바뀌어 80여 회의 개력이 있었다. - 그리하여 중국은 역서를 제작하여 외교관계에 있는 국가에 나눠주는 전통을 수립. - 조선초기에는 명나라와 사대관계로 천자가 만든 역서를 받아 사용. - 매년 가을에 연경에 보낸 동지사는 다음해의 역서를 받아오기 위해 보낸 사신. - 세종때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농사를 위해 역법개정에 착수. - "칠정산"을 제작하여 명나라의 "대통력"과 함게 사용. - 칠정산은 말 그대로 해, 달, 수성, 금성, 목성, 토성의 운행을 계산하는 일곱 천체의 운행 계산법이다. - 역 대신 '산'이라 부른 것은 역은 천자가 만든 역서에만 붙일 수 있기 때문. - 하지만 칠정산내편은 역의 원전임 역원을 '대통력'의 홍무 17년(1384)가 아니라 원나라의 지원 17년(1280)으로 정함. - 사실상 대통력 대신 '수시력'을 교정하여 전체운동을 나타내는 역을 계산하고 한양을 기준으로 상수들을 결정. - 이렇게 하여 지방시는 한양을 기준으로 일출, 일몰, 시각과 주야시간을 계산. - 조선이 전세계에서 지방시를 시행한 몇몇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 이는 큰 의의를 가진다. - 세종 4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서 임금과 백관은 인정전 앞에서 소복을 입고 구식례(일식, 월식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을 행했다. - 하지만 일식을 예보했던 담당관은 예보한 시각이 1각(15분)이나 틀렸다는 이유로 구식례가 끝나고 곤장을 맞았다. - 담당관은 억울했고, 세종도 그 억울함을 모르진 않았을 것. - 이것이 다 중국의 역법을 썼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독자 역법계획을 진행. - 정초, 이순지 등을 필두로 이론적인 연구를 시키고, 이천, 장영실 등을 시켜 관측 기구를 만들게 했다. - 양팀의 협력으로 간의, 규포, 혼천의, 천문 관측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 이를 이용해 한양의 국극고도가(위도) 확인, 칠정의 운핸 궤도와 주기도 밝혀졌다. - 이렇게 해서 칠정산이 만들어 졌음. - "칠정산 내편"으로 구한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는 39.13각(수시력에서 1각은 현대의 14분 24초), 밤의 길이는 60.87각. - 원나라 수시력으로 구한 연경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38.14였으므로, - 북경보다 위도가 낮은 한양이 연경에 비해 현대시간으로 14분 이상 동짓날 낮이 긴 것이 밝혀졌다. - 하지만 이렇게 해서도 세종 14년 7월 1일의 일식예보에 실패. - 이순지와 김담이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데 장점이 있다고 알려진 "회회력"을 교정하여 외편을 편찬했다. - 1442 세종 24년, 이 둘을 합하여 칠정산을 반포했다. - 이 책들은 "세종실록" 후기 권 156~163에 전문이 실려있다. - 칠정산의 우수성은 세종 29년에 일어난 일식을 예보한 "정묘년교식가령"에서 확인. - 현대적인 계산 값과 1분에서 3분의 시간차이(오차범위+-7.2분내)가 있다. - 회회력은 원나라 때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어 회회사천감에서 이슬람 학자인 마사이헤이 부자가 만든 것. - 태종시대 조선에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칠정산외편"에 교정되어 활용. - 명나라에서는 이보다 70년이나 뒤에 흠천감 관원인 패림이 게산법을 개발하여 활용. - 세종은 "회회력"에 없는 '태양최고행도와 일중행도표"등 중요한 도표들을 추가하여 편찬했다. - 중국 천문학자들이 외편을 높이 펴가하면서 아울러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이유다. - 일본은 1634년 조선통신사의 독축관 박인기에게 "칠정산" 추보법(계산법)을 전수받고, -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가 일본 최초의 역서 정향력을 완성. |
* 세종의 사대외교 - 세종의 대명외교는 비굴한(?) 사대외교였음. ;; - 사신이 오면 의주부터 길목길목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서울로 들어오면 임금이 백관과 맞이한다. - 경복궁에서 칙서를 받고, 사신 전용 숙소인 태평관에서 하마연을 베푼다. 다음날은 익일연, 이후로도 계속 잔치, - 떠날 때면 다시 송별연을 하고, 가는 길목길목 잔치. - 이때 명나라 황제는 영략제. - 조명간의 갈등은 해결되었지만, 과도한 사대가 요구되었음. - 영락제의 정벌에 쓰일 비용을 대주기도 했고, 금 은 말을 요동으로 보내기도 했다. - 태종의 기본입장은 "지성으로 섬기다" - 1423년, 태종이 죽고, 영략제는 북원정벌을 위해 말 1만필을 요구. - 관마색을 설치하여 나라를 뒤져 말을 모으고, 700여필씩 게속 나누어 요동으로 보냄. - 계속 퇴짜를 놓고, 우리는 다시 모아서 보냈다. - 이외에도, 처녀와 음식을 잘하는 여자도 보내라고 했음. - 선덕제가 즉위하면서 또 엄청난 요구를 한다. -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조선 여인 한씨, 영락제가 죽자 순장을 요구받자, 자살했다. - 한씨의 동생도 중국에 잡혀가서 선덕제의 총애를 받았다. - 누이들의 희생으로 출세한 이가 한확임. - 한확은 나중에 세조와 사돈을 맺고,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그의 딸이다. - 선덕제는 말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사냥 매니아여서 매, 개, 스라소니 이런걸 요구했다. - 전국 감사, 수령, 절제사의 가장 큰 업무가 "해청(해동청) 잡기"가 되었음 ;;; - 그리고 사신으로 오는 명나라 내시들에게 바치는 뇌물도 졸라 많았음. - 이들은 뇌물도 요구하고 조선의 가족들의 한자리도 요구했다. - 이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기본입장은 "지성으로 섬기는 것"이었다. - 선덕제가 죽고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비정상적인 사대관계도 많이 정리되었음. * 맹사성 (1360~1438) - 자는 자명, 호는 고불 - 이조판서, 우의정. - 최영의 손녀사위다. - 1407년, 예문관제학이 되어 진표사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으로 수행. -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박안신과 함께 평안군 조대림(태종의 사위)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했다. - 이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지만, 영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 1411년, 다시 복직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 - 그는 음률에 정통해, 에조에서 그가 서울에 머물면서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 이듬해 그가 풍해도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이 그가 음악에 밝다 하여 거울에 머물며 악공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 1417년, 생원시에 시관이 되어 권채등 100인을 뽑았고,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이 되었다. - 고향의 노부를 위해 사직을 원했지만 허락치 않고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했다. - 1418년, 공조판서가 되었고, 노부를 위해 사직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419 세종 1년,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디 되었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 우의정 재임시 "태종실록" 편찬 감관사로서 감수했다. -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이 보고자 했다. -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세종이 이에 따랐다. -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 1435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 하지만 세종은 중요한 정사에 그의 자문을 구했다. -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봉급받은 쌀)로 하였다. - 출입할 때 소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줄 몰랐다 한다. -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 권진 (1357~1435) - 우의정. - 어려부서 총명해 스무살에 문과에 급제해 촉망을 받았다. - 권세가인 염흥방이 자기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고자 했지만, 이를 거절해 염흥방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 의창현령으로 왜구를 막고 민심을 안정, 이성계가 이를 듣고 박탁해 전주판관으로 삼았다. - 1398 태조 7년, 성석린이 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해 경력으로 삼았고, - 1400년, 조박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 축산도로 귀양갔다가 얼마안되어 돌아왔다. - 태종이 등극하자, 지형조사에 이어 우사간대부를 지냈고, 강원도관찰사(1406)에 부임해 선정을 펼쳤다. - 청렴함이 알려져 대사헌에 발탁,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데 노력. - 1417년, 경상도관찰사, 충주목사를 거져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 호조, 이조, 판서를 지냈다. - 1430년, 이조판서. -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 형률을 잘못 적용해 백성 10여 명이 강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 1433년, 겸판이조사 재직 때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 세종 때 정인지 등과 함께 목조 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가지의 사적을 서술했고, - 의례상정소의 제조가 되어 악률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
* 풍수학 논쟁. - 최양선이라는 자가 "경북궁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승문원 뒷산이 주산으로 그곳이 진짜 명당이다, 창덕궁을 그쪽으로 옮기자" 라고 했다. - 그러자 세종이 풍수학자들과 대신들이 혈맥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섬. - 유학자 : 풍수가 중요했다면 주공과 공자가 한마디도 없었겠습니까? - 태종 : 풍수가 정통 경서는 아니지만 못쓸일도 아니오. - 그러고서는 직접 산에 올랐다. - 원칙주의자 허조가 허황된 말을 하는 최양선을 벌주라고 함. - 태종은 의견을 낸것으로 어찌 벌을 주느냐?, 태조도 한양에 도읍할 때 풍수를 썼다. 니들도 묘를 쓰려면 풍수를 쓰지 않느냐. * 혼천의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 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 -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어 BC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 한국에서는 아마도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듯. - 1433년, 기록상 이해 정초, 정인지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 장영실 등이 이를 제작. -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의 표준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되었다. - 효종 8(1657) 최유지, 현종 10년(1666)에 이민철과 송이영이 각각 만들었다. - 이 중 송이영의 것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펴 추를 시계 장치의 동령으로 이용했음. * 이천 (1376~1451) -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 - 세종 때의 무신, 과학자. - 1393년, 17세의 나이로 별장에 임명, - 1402 태종 2년, 무과에 급제,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을 만드는 일에 노력. -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무예도 닦으면서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 연구. - 금속공예와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했다. -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륙은 많이 좋아졌지만, 좀더 아름다운 자체와 인쇄능률을 높이기 위해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 - 1434 세종 16년, 갑인자의 완성을 보았다. -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 - 1437년, 서운관에서 정초, 장영실, 김빈 등과 함께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대간의, 소간의, 앙부일구, 현주일구, - 천평일구, 정남일구, 규표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이라 불리는 혼천의를 제작. - 평안도 도절제사로 평안도 변방의 야인(만주족)의 침략을 막고, -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무쇠)을 연철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 병선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갑조법, 즉 판자와 파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했다. |
* 김종서 (1383~1453) - 자는 국경, 호는 절재 - 1418 세종 즉위년, 감찰로서 강원도의 담험손실(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했다. - 1419년, 행대감찰로 충청도에 파견, 진휼 상황을 조사. - 1426년, 이조정랑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 - 1427년,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 - 1433년,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좌대언으로 이부지선(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 - 같은해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 1445년,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 - 1449년, 달달(타타르, Tatar) 야선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드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소환. - 1451 문종 1년,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 "고려사"를 지었고,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 1452년, 세종실록의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올렸다. -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 육진 개척의 수장으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 -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 개척을 이룩한 공로로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 엄정하고 밝은 문인 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였다. - 강직, 엄정한 면모는 사헌부, 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잡, - 과제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 * 김종서와 육진 개척. - 최윤덕의 정벌전이 성공하자 세종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번엔 두만강쪽으로 눈을 돌림. - 조선의 최북방인 이 지역에 영북진(뒤에 종성군으로 바뀜)을 설치. 여기에는 경원부가 있었음. ;; - 영북진의 책임자는 10년간 경원을 맡아온 무장 이징옥. - 이것만으로는 세종이 불안했다. - 마침 이만주 세력이 쳐들어와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고 아들을 납치해 간일이 벌어짐. - 세종은 김종서를 불렀다. - 김종서는 무신 출신도 아닌 체구도 작은 유학자임. - 세종의 입장에서는 동북면은 개척이 주임무라 생각했고, 행정능력이 있는 김종서를 택했던 것임. - 함길도 최북단에 부임한 김종서는 곧 새 진을 설치. - 기존의 경원, 영북(종성), 회령, 경흥, 온성군이 설치. 김종서가 떠난 뒤 부령군이 설치. - 이에 이 지역으로 백성을 옮기기 시작. - 함길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국경의 새 고을로 강제 이주, 하도 사람들이 함길도 남쪽을 채우는 방식. - 대상자들은 빠지기 위해 로비도 하고, 없는 이들은 자해도 했다. - 이 사민정책은 원망과 분노를 동반. - 세금 감면도 해주고 편의를 봐주려 했지만, 추운 날씨와 가뭄으로 가축들이 죽고, 역질까지 돌아 수천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 그럼에도 세종과 김종서는 멈추지 않음. - 동맹가첩목아 이후 이 지역 야인들의 우두머리는 그의 동생 범찰이었다. - 그는 황제에게 직접 하소연하면서 파저강의 이만주에게 가서 같이 살겠다고 함. - 황제 정통제는 들어주라고 했지만, 조선은 응하지 않았지만 범찰은 몰래 달아나 버렸다. - 그 후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들이고 굳히기에 들어간다. - 흉년을 당한 야인들을 구제하고, 귀화를 장려하고 이렇게 두만강 남쪽은 실질적인 조선 따잉 되어갔다. - 마무리로는 황보인을 투입했다. - 황보인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여진과의 경계로 삼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 갑인자 - 경자자가 납을 판에 밑에 펴서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아 사용하는 형태이므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등 정밀하지 못했음. - 이에 세종이 명을 내려, 이천,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2달 동안 20여만 자의 글자를 주조하게 했다. - 글자는 경연청에 소장된 "효순사실", "위선음즐", "논어" 등 명나라 초기 판본을 자본으로 삼았다. -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글자의 크기가 고르게 조립. - 자판의 빈틈을 납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를 이용하였으므로 글자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 하루에 활자를 찍어 내는 양이 40여 장에 달하여 경자자 보다 배 이상의 생산력을 가질 수 있었다. - 갑인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번에 걸쳐 개주되었다. - 세종 때 만들어진 갑이자는 조선시대 활자의 기본,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 - 갑인자는 우리 글자를 말들고 처음 만들어진 활자본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 세종때 만들어진 갑인자에 의해 인쇄된 책으로는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된 "대학연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분류보주이태백시"등이 있다. |
* 문종의 세자빈 잔혹사 ;;; -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 - 그는 조선 왕실에서 상징적인 왕세자. - 최초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초의 인물. - 왕실은 문종에 대해 기대가 컸고, 문종 역시 세종을 빼닮은 활동으로 기대에 부응. - 그의 재위 기간은 2년 3개월이었지만, 1421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1450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29년을 세자로 있었다. - 1427 세종 9년, 세자는 김오문의 딸을 휘빈으로 맞아들였다. - 문종은 휘빈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휘빈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압승술을 쓰려 했다. -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이를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 - 또 하나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는 것. - 휘빈은 신을 태운 재를 갖고 있다가 발각되었다. - 결국 2년만에 쫓겨났다. - 못생겼다고 함 ㅠㅠ - 두번째 세자빈을 고를때 세종은 외모도 선발 기준에 넣었다. ;;;; - 허조가 반대했지만, 결국 외도도 기준에 넣어 선발했으니 그녀가 순빈 봉씨였다. - 1429년 10월 15일, 무종의 두번재 세자빈인 순빈에 봉해졌다. - 외모는 검증이 되었지만, 성격이 ;;; - 세종은 문란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사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 하지만 그녀는 교육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는다. ;; - 또한 술을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생활하였다. 실록에는.. -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다. -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 마시기도 하였다. -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했다. -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의 문종에게 술을 좋아하고 주사까지 있는 그녀는 버거운 상대였다. -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후사가 없자, 세종은 후궁을 세명 뽑아 넣어주었다. - 후궁 중에 권승위(후의 현덕왕후)가 임신을 하게 되자 질투가 폭발했다. - 이에 "권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가 쫓겨날꺼야"하면서 울었고, 이 소리가 궁중에 퍼지기도 했다. ;; - 세종과 소헌왕후가 며느리 순빈을 타일렀지만 순빈은 뉘우치지 않았다 ;;;; - 세종은 세자에게도 "적실 부인도 좀 돌봐주어라"고 당부했다. - 그러자 세자는 순빈을 조금 우대하는 예절도 보였고, 순빈 스스로 태기가 있다고 말하면서 왕실의 분윅기가 고양되었다. -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순빈이 스스로 낙태를 하였다고 말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 아마 그녀의 불안한 정신상태로 인해 상상임신을 했었던 것인듯 하다. - 하지만 이 거짓 임신이 밝혀지면서 순빈에 대한 왕실의 신뢰가 무너졌다. - 순빈은 여기에 더하여 여러 번 궁인을 구타하기도 하고, 거의 죽을 지경까지 팼다. ;; - 또한 세자가 종학에 옮겨 거처할 때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 사이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거나, -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 세종은 봉씨의 이런 성품과 가벼운 행동들을 어느정도 용인해 주었다. -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행동 "동성애"만은 참지 못했다. - 당시 궁궐에는 궁녀 사이에 동성애가 암암리에 퍼져 있엇다. - 세종이 시녀와 종비(계집종)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앟여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중에 금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음. - 순빈은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 궁인들ㅇ느 순빈이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수군. - 세자가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소쌍에게 정말 자냐고 물었고, 소쌍이 그렇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 세자의 경고 이후에도 순빈은 소쌍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 순빈은 소쌍에게 너는 날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라고 말하기도 했고, ;; - 소쌍은 다른 사람에게 빈께서 나를 너무 사랑하시니 내가 조금 무섭다. 라고 하기도 했다. - 소쌍은 권승휘의 사비인 단지와 함께 자기도 했는데, 이를 알게된 봉씨는 사비 석가이를 몰려 붙여 소쌍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 세종과 부인은 소쌍을 불러 진상을 물었다. - 소쌍은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 실록에는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라고 ;;;; - 결국 순빈도 폐출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 1436년, 사정전에 전교를 내려 순빈 봉씨의 폐출을 발표했다. - 이후 다시 간택하려 했으나 마땅한 처자가 없어, 세자의 후궁중에 뽑았다. - 이렇게 해서 문종과 사이도 좋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 1441년, 권씨(현덕왕후로 추증)은 단종을 낳은 지 이틀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세자빈 사망 후 문종은 이후로 적처의 빈을 두지 않았다. - 왕에 즉위한 이후에도 문종은 왕비를 들이지 않았고,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재위 기간 중 왕비가 없는 왕이 되었다. - 이는 어린 왕 단종이 지원해줄 대비가 없는 불운을 겪게 되었음 ;; |
* 장영실 - 조선 세종시대의 최고의 과학자. -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위기와 수표를 발명(1441),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수 있게 했고, -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 - 실록에도 여러번 등장하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 그는 동래현의 관노였다. - 장영실의 부친은 원나라 사람으로 소주, 항주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 -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관노였던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 - 하지만 아버지가 원나라 귀화인이었다는 점이 다른 관노와는 다름 점. - 귀화인은 주로 관노와 결혼했고,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양인과 결혼시켰던 점에서 장영실의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 또다른 설은 아버지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귀화인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부친이 조선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렸다는 이야기 ;; - 태종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 -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수리에 뛰어났고, - 1421 세종 3년,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다. - 이조판서 허조가 기생의 소새이라 하여 반대했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찬성했다. -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그를 다시 정4품의 벼슬인 호군의 관직을 내려 주려 했다. - 이때도 논란이 있었다. - 황희가 태종시절에도 관노가 호군이 된 적이 있음을 들어, 찬성하니,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내렸다. - 기계 시계가 없던 시절, 태양광선이 던져주는 해 그림자를 통해 하루의 시간을 알았고,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쟀다. -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런 방법을 쓸수가 없었음. - 그래서 물시계를 만들었음. - 물을 넣은 항아리 한 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하나씩 얼어지는 것을 다른 항아리에 받아서 부피를 잰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부피는 일정하게 늘어나는데 하루에 흘러들어간 물의 깊이를 자로 재서 12등분 하면 한 시간의 길이가 나오게 된다. -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했고 7세기에 발명, - 하지만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했고, 항상 사람이 시간을 재야 했다. - 사람이 태만히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고, 시간이 안 맞으면 큰 소동이 일어났다. - 자동 시계는 송나라 학자 소송이 만들어냈음. - 1091년,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 하지만 이 기계는 너무 복잡해 소송이 죽은 뒤 아무도 만들지 못했다. - 12~13세기 아라비아 사람들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를 만들었다. - 장영실은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를 비교. -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 이 후 장영실은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전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를 결합한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 이 둘을 합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절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백성에게 전달할 수 있다. - 1438년,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완성했고, 세종은 경복궁 침전 곁에 흠경각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 - 1442년, 장영실은 임금의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 - 하지만 이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셔졌다. - 장영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고, 곤장까지 맞았다. - 그를 그토록 총애하던 세종도 배려라고 해준것이 100대를 80대로 감해 준 것이다. - 이 후 장영실의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 간의대 사업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로 장영실을 보호했다는 주장과, -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장영실이 더 필요없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신빙성 있지는 않다. |
* 박호문 허위 보고 사건 - 북방으로 떠난 김종서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진을 세우고, 백성을 이주시키고 야인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 김종서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곧 다시 돌아가게 했다. - 북방 개척 사업은 중단되지 않았고, 김종서는 이를 맡아 처리했음. - 그러던 중 회령 절제사 박호문이 허위 사실을 퍼트린다. - 김종서가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갈때 기생을 데리고 갔고, 야인들이 그 기생에 뇌물을 쓴다는 것. - 그리고 김종서는 사냥에만 신경쓰고 술에 절어 산다는 내용이다. - 세종은 "다 거짓말임" 이라고 했다가. 조금씩 의심한다. - 마침 범찰이 300호를 이끌고 파저강 지역으로 도망간 일이 일어났다. - 범찰이 편지를 보내왔다. "김종서가 너무 빡세게 해서 도망갔습니다." 라는 머 그런 ;;; - 하지만 함길도 도 제찰사로 떠났던 황보인이 김종서의 해명 편지를 들고 온다. - 박호문이 병영청사를 화려하게 지어 나무란 적이 있었고, 병을 핑계로 군무를 보지 않아 책망한 일이 있었다는 것. - 그리고 풍문에 대해 자세하고 근거있는 해명을 했다. - 이에 세종은 급미안해졌고 ;;; 박호문을 잡아다 국문했다. - 그 후 세종의 북방정책은 달라졌고, 김종서는 형조판서에 임명되면서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
* 훈민정음 -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 - 이 책이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면서,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 이책은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께서 아주 비싼 가격을 치르고 샀고, 6.25때도 이 책 한권만 들고 피난갔다고 함. - 인류는 상형문자로 언어생활을 시작. - 상형문자가 발전한 한자같은 문자의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는 것. - 그래서 일본 문자같은 음절(syllable) 문자를 만들어 낸다. - 일본어도 표음문자. 하지만 자음과 모음이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다. - 한글과 로만 글자는 정확히 분리되어 있음. 근데 한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감. - 한글의 자음에서 기본 되는 것은 "ㄱ,ㄴ,ㅁ,ㅅ,ㅇ" - 자음은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는 것으로 다른 글자를 만든다. ㄱ ㅋ ㄲ - 앞 다섯글자만 알면 나머지는 따라옴. - 이 기본이 되는 자음도 발성 기관이나 그 소리 나는 모습을 가지고 만들었음. - 예를들어 ㄱ 은 "기역" 혹은 '그' 라고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떠 만든 것임. - 영어의 t, r, n 은 같은 어군이라 서로 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 하지만 한글은 이것이 설음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ㄴ,ㄷ,ㅌ,ㄸ(ㄹ은 반혓소리)의 형태들을 유사하게 만들었다. - 이런 점에서 언어학자들이 경탄한다고 함. - 모음도 점하나와 작대기 두개로 가장 많은 모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음. - 또한 이에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철학까지 담겨있다. - 이를 단순함 때문에 휴대폰에서 괴력을 발휘. -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짱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베이셔도 마참네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핧 노미하니라. - 내 이랄 윙하야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 여듫 짜랄 맹가노니 -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뻔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나라. - 내 이를 위하야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맹그노니 사람마다 |
* 전분6등법 (양척동일법) -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세의 단위로 편성한 기준. - 1444 세종 26년, 전품을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에 따라 전지의 결(結)·부(負)의 실적에 차등을 두는 수세 단위로 편성. - 고려의 전시과체제에서는 농경지 휴한(흙을 개량하기 위해 작물 재배를 중지하는 일)의 빈도를 기준으로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눔. - 고려 후기 휴한농법이 없어지고 연작농법이 널리 보급, 1. 등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비(肥, 비옥). 척(瘠, 척박)의 정도로 바꿈. 2. 상,중,하의 전지는 각기 전품에 따라 양전척(땅을 재는 자)을 달리하는 수등이척의 제도로 바꿈 - 토지의 비옥과 척박의 정도에 따라 토지 측량의 자의 길이를 달리해 면적을 산출했음. 3. 대신에 각 전지의 모든 결,부에 대해 조세를 동일하게 했다. (동과수조) - 고려말 전시과체제의 모순점. 1. 결, 부(논,밭 넓이의 단위)를 재는 기준이 손가락 마디 폭의 넓이 즉 수지척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조잡했음. 2. 3등전품제에서는 전국 전지의 절대 다수가 하등전. - 게다가 동과수조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토지생산력의 실제에 상응하는 수세제가 운영될 수 없었다. 3. 전품이 각 도단위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었다. 4. 각 전품 내에서도 3등급은 실질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너무 간단했음. ;; - 이제 이전의 상중하 3등전품제를 고쳐 6등전품제, 즉 전분육등법을 채택. 1. 양진척의 근거 척도를 이전의 수지척에서 주척(1척이 약 23cm)으로 바꿈. - 1등전은 주척으로 4,775척, 2등전은 5.179척, 3등전은 5.703척, 4등전은 6.434척, 5등전은 7.55척, 6등전은 9.55척. - 각등전은 1척평방이 1파(把),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부가 1결(結) 2. 비옥한 토지는 길이가 짧은 자로 지어 같은 1결이라도 척박할수록 실질적 땅은 넓었다. - 이렇게 토지생산력을 상대적으로 접근했다. 3. 이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하등전을 6등전품의 1,2,3등전으로 많이 편입시켰고, - 이전의 산전을 상대적으로 축소된 결적의 5.6등전으로 편입. - 전체적으로 1결의 실적은 축소되는 반면, 전국 결의 총량은 크게 증대되었다. - 이 제도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타당성을 크게 갖춘 법제였지만 시행 과정에서는 그러한 원리가 그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 전품의 분등은 의연 각 지역별로 난립되어 갔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양전 자체도 결코 객관적인 실정에 상응하는 결부수를 산출하지 못함. * 연분9등법 -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세의 단위로 편성. - 고려의 전시과 체제에서는 농경지의 휴한 빈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었다. - 각 농경지의 작황을 파악하는 손실답험은 현지의 유력자인 촌전이 일차로 수령에게 보고, - 수령은 호부에게, 호부는 삼사에게, 다시 중앙의 지시로 관원을 파견하여 재심하게 하는 방법. - 고려말 과전법에서는 3등전품제를 운용하되, 수손급손의 제도를 실시. - 수손급손은 농사의 작황에 손실이 전혀 없을 때를 10분으로 하여 1결당 최고 30두의 조율을 정해 놓았다. - 1분의 손해가 있을 때마다 3두씩의 비율로 조세를 감면했고, 손실이 10분중 8분에 이르면 조세 부과를 면제. - 따라서 과전법체제에서의 세금은 손실담헙을 통한 수손급손에 따라 수조율을 책정하는 정률세제로 운용 - 1결당 30두 한도 내에서 수조액이 책정. - 사전에서는 그 수조권자의 자의에 따라 과중한 수탈이 자행. - 1419년을 기점으로 하여 사전에서의 손실답험도 공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담헙방식으로 전환. - 하지만 이런 답험방식도 실제로 공정하지 못했다. - 산야에 흩어진 전답을 일일이 답하하지도 못했고, - 답험관의 자의성을 배제하기 위해 감찰제도를 법제화했지만, 손실의 집계는 사실상 토호와 향리의 수중에서 자의적으로 운용. - 이런 배경에서 세종은 전분육등법, 연분구등법을 골자로한 공법전세제가 확정. 1. 농경지의 매필지마다 손실답험함에 다라 자행되는 불공정을 제거하기 위해 손실답험의 단위를 각 군현별로 정했고, 2. 연분은 농작에 따라 상상년, 1결 20두에서 상중년 18두, 이하 차례로 체감하여 하하년 4두로 하며 그 이하는 면세. 3. 각 군현의 수령이 심정한 연분은 관찰사에게 보고, 각도의 관찰사는 도내의 군현별 연분을 중앙에 보고. - 의정부 혹은 육조에서 전체를 논의하여 각도, 각 군현별 연분을 정하거나 혹은 조관을 파견하여 다시 심사한뒤 연분을 정함. - 하지만 당시 농업생산력 수준에서 1개 군현을 묶어서 하나의 연분등제 단위로 삼는 다는 것은 큰 무리. - 1454 단종 2년, 각 군현마다 읍내와 4면으로 나누어 각기 연분을 등제하는 이른바 면 단위 등제의 방식으로 고쳤다. - 연분등제의 실상은 15세기 말까지는 현지 수령, 관찰사의 보고보다도 중앙에서 정하여 세수의 증대를 기하는 것이 상례. - 이는 외방 향리나 수령이 지나치게 낮은 책정을 염려한 때문. - 16세기에 가서는 지주, 전호제의 확대와 공물, 요역, 군역 등 여타 수취관계가 가혹해지면서, - 연분은 현지 수령, 감사의 보고보다도 강등하는 방향으로 관행되어갔다. - 16세기 후기에는 이윽고 연분등제가 대개 하하의 1결당 4두로 고정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
* 용비어천가 - 조선왕조의 창업을 송영한 노래. -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 한글로 엮은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 - 왕명에 따라 새로이 제정된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짓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하였다. - 정인지가 서문을 쓰고 최항이 발문을 썼다. -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무시하고 충분한 표현과 운율을 얻지 못하여 시가로서는 미흡한 점이 많다. - 하지만 한글로 기록된 최고의 문헌으로 15세기의 언어와 문학 연구에 중요한 사료. - 주석 중의 여진, 왜 등에 관한 기록은 역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 * 의방유취 -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 - 266권 264책. - 세종은 조선의 자주적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1433년 "향약집성방"을 완성한 후, - 한방 의서들의 유취를 편집하기 위해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과 저작 유성원등에게 명하여 의방을 수집 편찬케 했다. - 처음 365권으로 편성, 이후 교정하여 266권 264책으로 정치 축소. - 곧 인쇄되지는 못했고, 문종 세조 까지 정리 축소. - 1477 성종 8년, 한계희, 임원준 등이 30질을 인쇄 출판.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등 관계 관아에 반포. - 내용을 보면 모든 병증들을 91종의 대강문으로 나누고, 각 문에는 먼저 문에 해당되는 병론을 들고, 모든 약방들을 출전 연대순으로 열기. - 방문의 인용도 방서의 연대 전후와 문자의 중출 및 이동에 따라 그 아래에 자세히 주해를 했다. - 각 방서들의 원문을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유취편입, 각 병문에 대한 고금의 약방을 원문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파악. - 하지만 분류된 병문들은 분류 방법에 있어 병증을 중심으로 한 것과 신체의 부위를 본위로 한 것이 섞여 있다 - 그리하여 각 분과별로 계통적인 지식을 밝히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 근세 임상의학의 각 분과들이 거의 포괄되어 있다. - 인용된 서적은 한, 당 이래로 명조에 이르기까지 164종의 고전 의방서가 수록. - 이 중에는 오늘날 그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망실한 것이 40여부나 들어있다. |
* 동국정운 -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 - 6권 6책, 활자본 국보 71호(간송미술관 권1, 권6), 국보 제 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완질) - 이 책은 세종의 언어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혼란상태에 있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 -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이듬해 의사청에 물어 훈민정음으로써 "운회"를 번역하게 했다. - "운회"는 원나라의 웅충이 고쳐서 다시 지은 "고금운회거요"를 뜻하는데 이 번역본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 - "동국정운"의 내용으로 보아 "운회"의 번역본을 탈바꿈시킨 것이 "동국정운"일 가능성이 있다. - "운회"의 반절음을 우리나라 음으로 번역하여 훈민정음으로 표음하고, 훈민정음의 초성 차례에 따라 글자를 배열. -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 감독은 동궁(세자)에서 하고, 진양대군, 안평대군이 보좌했고, - 실질적인 주관은 신죽주와 성삼문, 우리나라 한자음의 사정은 최항과 박팽년. 중국음에 대한 자문은 조변안과 김증.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 - 신숙주의 서문에 의하면 기본방침은. 1. 민간에 쓰이는 관습을 널리 채택. 2. 옛날부터 전해오는 서적을 널리 상고할 것. 3. 한 글자가 여러 개의 음으로 쓰일 때는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기준으로 할 것. 4. 옛날부터 전해오는 협운(어떤 음운의 글자가 때로는 다른 음운과 통용되는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고려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