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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태후전
여명태후는 송화(宋和) 여씨집 자손이다. 조부 운태는 4대 명종(明宗)때 등용되어 6대 황종(皇宗) 시절 예조정랑과 이조참판 그리고 경강 관찰사를 역임했다. 성품은 온순했으나 주색(酒色)을 즐겨 여러차례 사사로이 세금을 탕진하니 이로인해 탄핵당했다. 슬하에 아들이 없이 딸 영신이 있어 배필로 종원이란 이를 맞아들여 여씨(呂氏)성을 하사 가문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 영신이 종원과의 사이에 딸 다섯을 낳으니 이중 막내 이름을 명(鳴)이라 지었다. 애초 아명은 봉명(鳳鳴)이었으나 발음이 쉽지 않아 그냥 ‘명(鳴)’이라 부르게 했다.
7대 신종(神宗) 재위 십년에 태자의 나이 20세에 이르니 금혼령을 내리고 태자비를 맞이하게 했다. 이때 영신이 부친이 진사반정(辰巳反正)때 공이있어 2등공신에 올랐음을 내세워 딸 명을 추천 태자비로 맞이하게 했다. 신종이 재위 15년만에 사망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8대 교종(敎宗)이다. 재위 2년때 거란 황제 마르크가 서신을 보내니 그 내용이 심히 무례하고 거칠었다. 이에 여명황후가 마르크의 서신을 찢으며 어전에서 말하기를
“ 오랑캐의 서한이 어찌 이리도 무례할수 있습니까. 외교의 기본 예의도 없는이들과
어찌 동등한 관계로 동맹을 맺을수 있으리이까. 금선(金鮮)은 결코 거란의 속국일수
없으니 폐하께선 마땅히 마르크를 징벌하시어 천하도리를 밝히소서. ”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황후를 만류하기를
“ 거란,여진,몽골,흉노등과의 화친은 금선왕조 태조(太祖)시절부터 내세운 정신이오
니 마땅히 황후께선 고정하시고 심신을 가지런히 하시오. ” 하였다. 황후가 탄식하기를
“ 대소신료들이 나라와 백성의 근본은 생각지 않고 오직 강국(强國)의 군사(軍士)만
을 두려워하니 실로 답답한 일이로다. 후세에 비웃음 거리가 될것이로다. ” 하였다.
4년 3월 여진황제 어나이가 서한을 보내 “ 금선의 곡물 벼,보리,콩등 10여종 각 2,000석과 소,돼지,닭,멧돼지,양,염소,사슴,토끼등 가축 10여종 각기 1,000마리, 재목(材木)으로 쓸 나무 20여종 각 3,000관, 인삼을 비롯한 약재 70여종 각기 500관, 만 15세부터 25세까지의 여인 500여인 ”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그 댓가로 “금 5,000냥과 은자 십만냥 그리고 황동 100만관”을 지불할 것을 제안하였다. 5월에 이번엔 거란황제 마르크가 서한을 보내 “ 금선의 곡물 10여종 각 1,500석과 가축 10여종 각 2000마리, 재목 10여종 각 3,000관, 약재 100여종 각 800관 그리고 만 15세부터 25세까지의 여인 700여인”을 요구하였다. 댓가로 “금 7,000냥과 은자 5만냥, 황동 70만관”을 지불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종이 거란과 여진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약조하니 여명황후가 다시 분노하여 외교사절단이 출발하는날 그 앞에서 손수 의렴(衣斂 : 의복)을 늘어뜨리고 나신(裸身 : 알몸)을 보이며 막아서며 말하기를
“ 이것이 어찌 외교며 교역이라 할수 있는가 ? 이것은 굴욕외교며 공물이고 조공일
따름이니 중지하라. 중지하지 않을것이면 나를 밟고가라 ”며 피를 토하며 외쳤다. 대신들이 차마 어쩔줄 모르고 황망하며 두려워하였다.
교종이 거란과 여진황제에게 사죄의 서한을 보낸뒤 ‘황후가 어린시절부터 심병(心 病 : 정신병)’이 있어 그런것이니 이해해달라며 해명했고, 대신들과 논의 끝에 황후를 병을 핑계삼아 남쪽 호남도(湖南道) 진선(珍善)땅 별궁에서 요양토록 하였다.
황후가 3년의 요양생활 끝에 돌아왔다. 그동안 교종이 후궁 둘을 맞이했으니 이름은 세정과 미정이라고 했다. 황후가 말하길 ‘천하의 도리가 한명의 남성이 다수의 여인을 맞아 많은 자손을 보기 원함이 자연순리이니 내 어찌 역류(逆流)할수 있겠는가’ 하며 탄식한뒤 세정과 미정에겐 각기 보석 두관을 보내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세정이 교종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고 미정이 교종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여명의 성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함부로 행동하여 황후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삼갔다.
여명이 교종과의 사이에 아들 셋을 낳았으니 장남 홍(弘)을 금성대군(金成大君)이라 했고 차남 현(鉉)을 금안대군(金安大君)이라 했으며 삼남 원(原)을 금목(金穆大君)이라 했다. 교종 재위 15년이 되는해 이때 여명이 나이 40이었는데 장남 금성대군이 17세, 차남 금안대군이 15세, 삼남 금목대군이 12세였다. 하루는 황후가 장군 김세호와 어윤영을 불러 말하길 “옛 화려왕조 시절에는 거란이나 몽골,여진등의 침략이 잦았으나 현명한 군주와 슬기롭고 지혜로운 장수와 책사들이 있어 능히 적은 군사로도 대군을 무찌르니 반도(半島)의 기세를 북방오적(北方五賊 : 거란,여전,흉노,몽골,말갈)들이 두려워하여 초원이 벌벌 떨었다. 허나 금선왕조에선 오히려 옛 화려왕조가 잦은 전란으로 백성들만 피폐하게 했다며 화친정책을 폈으나 오히려 이로인한 잦은 북적(北狄)의 공물요구로 백성들의 삶만 더 피폐해지고 여러차례 오랑캐와의 혼인동맹으로 조정(朝政)에 파벌과 간신배들이 늘어나고 황실의 혈족과 정통성마저 어그러지고 있도다. 무엇보다 그 정도가 금상(今上)에 이르러 더해지고 있으니 내 현왕(現王)을 몰아내고 삼남 금목(金穆)을 세우려하니 그대들의 뜻이 어떠한가 ? 내 대사(大事)가 성공하면 그대들을 대장군(大將軍)에 봉하고 북적을 정벌할 때 마땅히 선봉에 서게 하리다.” 하였다. 김세호가 말하기를 “옛 화려왕조 시절에 북적과의 전란이 잦아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나 금선왕조들어 전란이 없고 화친이 되었으며 북적과의 교류로 특히 국경의 백성들 삶이 평온해지고 경제도 번성하게 되었는데 어찌 황후께서 무모한 전란을 도모하려 하시나이까 ?” 하니 황후가 반론하기를 “오히려 북적의 잦은 공물요구로 인한 백성들의 피폐함이 더 심하도다. 북적은 이제 국내(國內)의 어린 처자들까지도 해마다 수백을 요구하니 이로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이 딸이 있으면 빨리 시집보내고 젊은 며느리가 있으면 아들과 함께 멀리 떠나 숨게 하는 폐단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찌 평온한 치세라 할수 있겠는가. 마땅히 도모함만 못하도다.” 김세호가 반론하기를 “북적이 비록 공물을 요구한다하나 그때마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국가의 재정이 넉넉해지고 백성들 살림에 보탬이 되니 마땅히 황후는 세 번 생각하시옵소서” 하였다. 여명은 고개를 가로젓고 김세호와 어윤영을 여러차례 불러 거듭 설득하니 비로소 두 장수가 넘어왔다. 여명이 계책을 내니 “내관 황현과 제조상궁 엄상궁에게 명을 내려 원진월(元辰月) 목황일(木黃日) 술시에 황궁 서문밖 통로를 은밀히 개방하게 할테니 두 장수는 마땅히 군사를 몰고와 황제를 포박하라. 황제의 신병(身柄)은 내가 맡을 것이다” 하였다.
거사일에 황후가 몸소 독주를 가져와 황제를 대접하니 황제가 뜻밖이라 여겨 “내 황후를 맞은지 20년이나 거친 성정이 두려워 함부로 가까이 하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어인일이오 ?” 하니 황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소첩이 일찍이 사가(私家)에 있을때부터 자모(慈母)로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부덕(婦德)을 익혔으니 어찌 저버림이 있으리이까” 하였다. 이에 황제가 의심없이 황후가 따라주는 독주를 다 마셨다. 마침내 황제가 곯아 떨어지니 황후가 손수 밧줄로 황제를 묶은뒤 내관 황현에게 명해 황궁문을 열게하여 마침내 김세호와 어윤영의 군사가 들이닥쳐 황제를 도모하였다.
다음날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 황후가 황제를 끌어내게 하여 손수 그의 74가지 죄목을 늘어놓으며 폐위(廢位)의 당위성을 밝혔디. (譯註 : 교종(敎宗)의 폐위사유로 여명태후가 밝힌 74개 죄목은 실록에 세세하게 적혀있으나 후세의 사가들은 이중 상당수를 여명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조작이나 허위라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실제 여명이 밝힌 교종의 74가지 폐위 사유엔 ‘강아지를 수백마리 학살하였다’느니 ‘소가 알을 낳게 하는 실험을 하려 들었다’느니 ‘북방의 산림을 이유없이 훼손하고 불을 질렀다’느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적혀있기 떄문이다.)
마침내 황후가 스스로를 ‘여명태후’라 칭하고 삼남 금목대군을 세로운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섭정(攝政)을 할 뜻을 밝혔다. 이에 노신 노관택이 먼저 나서기를 “현 황제가 나라에 큰 죄를 지은일이 없고 오히려 북방과의 화친정책으로 나라살림을 평온케 하고 있는데 황후께선 어찌 허망하고 어이없는 말들을 지어내어 대주(大主 : 남편)를 핍박하시나이까 ? 이는 실로 부당하니 모든 것을 바로 돌려놓으시오서” 하자 태후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무도한 황제와 함께 백성들을 핍박하고 나라 살림을 황폐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천벌을 받아 마땅한자들이다.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섬멸해도 시원치 않을 것을 내 덕망(德望)을 보여 살려두었는데 어찌 너희가 간악하기가 이럴수 있느냐 ? 이후 다시 부당함을 말하는 자는 선왕(先王)과 같은죄를 지은자로 간주 처단하리라” 하였다. 병조판서 백승원이 말하기를 “황후께선 이미 장성한 장남 금성이 있고 차남 금안도 그 지혜와 총명함이 부족함이 없는데 아무런 이유없이 삼남을 세우셨으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오히려 황후의 야심만을 드러낼 뿐이오이다. 옛 중원의 법도에도 ‘황위는 무난할 경우엔 장자에게 물려주며 장자가 부족하거나 능력이 없을시 다른 지혜롭고 능력있는 왕자(王子)를 찾으라’ 하였는데 황후께선 아무런 이유없이 나이어린 삼남을 택하시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시려 드니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하였다. 태후가 거듭 노하여 말하기를 ‘더는 거론치 말라’ 하였다.
이후 태후는 황궁 북서쪽에 ‘여명전(呂鳴殿 : 또는 여명전(黎明殿)이라고도 한다.)’을 짓고 황금과 구리 그리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케 하니 평수가 수천여평에 달했고 새로 지은 전각만 50여채에 달했다. 그 화려함과 위세에 모든이들이 놀랐다. 이후 태후가 여명전에서 손수 정사를 주무르니 국사의 크고작은 모든 것 함부로 여명전의 허락 없이는 행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들은 국사의 모든일을 태후의 측근인 궁녀 홍련과 금화를 통해서만 보고하고 재가(裁可)여부를 받아볼수 있었다.
원래 태후가 사가(私家)에 있을 때 여인의 부도(婦道)를 가르치는 책보다는 역사와 철학 또는 종교 혹은 병서(兵書)와 중원에 떠도는 전설과 설화를 조합하여 만든 무협지(武俠誌) 읽는 것을 좋아해 자모가 근심하였는데 하루는 불러 꾸짖기를 ‘너는 계집으로 태어나 사내가 보아야할 책만 하필 골라 즐기니 장차 무엇을 하려 그러느냐 ?’고 하자 오히려 여명(태후)이 말하기를 ‘서책을 택하는데 있어 어찌 여(女)와 남(男)의 도리가 따로 있을수 있으리이까’ 하니 자모가 어이없어하며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여명전을 짓게한지 6개월만에 비로소 완성되니 태후는 손수 여명전에 머물며 정사를 총괄하였다. 먼저 조정을 개편하고 직제를 바꾸니 기존의 대소신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옛 명종때 주류를 이루던 남서인(南西人)의 후예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남서인이 원래 황종,신종때는 다른 당파의 핍박을 받았는데 여명태후의 시대에 이르러 대거 등용되니 모두 기뻐하며 앞다투어 태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직제를 개편하며 특히 군제를 개편 군의 조직을 확대 특히 육군과 수군을 모두 총괄하는 육수총장(陸水總長)을 두게하여 그 반열을 정승과 같은 ‘정1품’이라 하고 ‘대부(大夫)’라 부르게했다. 이에 대제학 오세암이 말하기를 ‘무관을 문관과 동등한 지위에 놓는 것은 화려왕조 시절에도 없던 일이옵니다. 마땅히 태후께서 통촉하소서’ 하자 태후가 노하여 오세암을 가둬버렸다.
여명전을 지은뒤 책사 제갈탄을 등용 이후 병서와 전략지(戰略誌)를 읽으며 제갈탄에 묻기를 ‘옛 구려(句麗 : 고구려) 시절에 ‘비녀전사단(秘女戰史團)’이 있어 주로 적국의 정보수집이나 요인암살,테러등을 전문으로 하여 적국의 화력이나 무력을 약화시키는 주 업무를 맡았다고 들었소. 고구려가 북방오적과 싸워 백전백승한데는 바로 이러한 ‘비녀전사단’의 ‘비밀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란 말을 들었소. 허나 이후엔 비녀전사단의 맥이 끊기고 말았으니 어찌된 일이오 ?’라고하니 제갈탄이 답하기를 ‘구려가 신국(神國 : 신라)에 의해 멸족된뒤 옛 구려의 법제와 기록은 모두 불살라 없어지고 단지 구려의 왕맥과 문화,제도만을 기록한 간략한 약사(略史)만이 전해질 뿐이외다’ 답하였다. 여명이 답하기를 ‘아무리 신국이 승자라 하나 구려의 옛 서책과 문헌을 고찰해볼만한 것들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고작 왕맥과 제도만 고찰할수 있는 소수의 기록만 남겨놓았으니 답답할 뿐이오’하며 탄식하였다. 그리고는 구려시절 ‘비녀전사단’을 부활시킬 의사를 밝히고 장군 이재영과 숭무도감(崇武都監) 원태윤을 불러 이 문제를 논의했다. 또한 장군 원영권과 천성호를 불러 ‘반도가 화려왕조 시절 북적과의 전란때 백전백승한 비결은 반도에 산지가 많아 적은 군세로 열배의 군사를 물리칠수 있는 방책이 있었기 때문이오. 허나 북적이 사는곳은 넓은 평야와 초원지대뿐이니 적은 군사로 평야와 초원에서 싸워 이길수 있는 새 전략과 신무기를 개발해주시오’ 하였다.
여명태후가 세운 삼남 금목대군을 훗날 무종(戊宗)이라 부른다. 마침내 무종 5년에 대소신료와 장수들을 모두 여명전으로 불러 밝히기를 ‘그 옛날 구려가 북적과 싸워 백전백승 패한일이 없고 화려왕조는 북적의 잦은 침략에도 오히려 적은 군사로 대군을 패하게 하여 북적을 떨게 만들었도다. 허나 오늘날 금선은 유약한 황제들이 계속 즉위하며 오랑캐들에게 굴욕외교를 하며 무수한 공물을 바치며 나라와 민족의 자존심을 짖밟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니 더는 두고볼수 없도다. 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여진과 거란 그리고 흉노,몽골,말갈등 북방오적을 모두 섬멸코자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 하였다. 귀양갔다 돌아온 노관택과 백승원이 다시 돌아와 부당함을 간하니 오히려 태후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금상을 세울때도 반대하더니 오늘도 또 고(孤)가 하는일을 부당하다 하니 실로 역심을 품었음이로구나. 뜻을 같이하지 않는 신하가 어찌 황제앞에 있을수 있으리’ 하며 결국 노관택과 백승원을 목베게 했다. 다시 충신 황충이 나서서 부당함을 가로되 ‘옛 중원의 현자 태완선도 서책에서 말하기를 ‘화친과 친교로 이웃과 교류함이 전란을 일으킴만 못하다’ 했고 ‘전란에 드는 비용이 어찌 외교에 드는 비용만 못하다 할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전란이 평화보다 백성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뜻이라 할수 있사옵니다. 이미 금선의 태조께서 옛 화려왕조가 잦은 전란으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든 것을 보다못해 들고 일어나 평화의 금선왕조를 세우신것인데 이제 태후께서 어찌 태조(太祖)의 정신을 어그러뜨리려 하시오이까. 이는 금선의 개국정신과 정통성에 모두 맞지 않는것이니 마땅히 태후께선 심사숙고하시오소서’ 하며 눈물로 아뢰었다. 이에 태후가 황충의 말을 막으며 다시 격노하기를 ‘너희가 전란을 두려워함이 계집인 고(孤)보다 못하니 어찌 사내라 할수 있겠느냐 ? 이제부터 ‘부적남류(不適男流)’는 마땅히 본보기로 다스리겠노라’ 하고 우선 황충을 옛 대조전(大造殿 : 여명전이 세워지기전까지 황제와 신하들이 국사를 논하던 전각) 앞으로 끌어내어 신료들이 보는앞에서 능지처참한뒤 황충의 일곱아들들을 모두 붙잡아 저자거리에 끌어낸뒤 손수 신혹검(辛酷劍)을 들고 와서는 황충의 일곱아들을 모두 옷을 벗기게 한뒤 몸소 일곱아들의 성기를 신혹검으로 잘라내었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말하기를 ‘앞으로 부적남류는 이와같은 형벌을 받을터이니 그리알라 !!!’고 호령하니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차마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애초 태후가 적은 군세로 대군을 거느린 북적을 깨트릴 묘안으로 ‘비녀전사단’의 부활을 꾀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호 이형진과 남태현을 불러 거액을 헌금케 하여 ‘비녀전사단’ 창설을 독려하였으나 때마침 들이닥친 지진과 수해로 비용은 이재민을 구휼하는데 다 써버렸고 이후 다시 비녀전사단 창설비용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자금을 몇몇 신하들이 횡령,착복했음이 드러나버렸다. 사실을 알게된 태후가 대노하여 ‘고가 대업을 이루려 하는데 너희가 어찌 사사로이 간사한 짓을 벌여 일을 그르칠수가 있느냐. 마땅히 부적남류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이전 황충과 같은죄로 처단하였다. 비녀전사단 창설이 계속 늦어지자 태후는 답답함에 때로는 책상을 뒤엎고 전각의 집기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무종 8년에 마침내 거란과 여진을 정벌할 것을 천명하고 군대를 몰아 진격하였다. 이후 5년동안 거란과 여진을 모두 네차례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태후는 ‘비녀전사단이 진작에 창설되거나 신무기 개발만 빨랐어도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라며 비통해했다. 한편 금선이 이전의 화친을 깨버리고 거듭 침략하자 마침내 거란의 신 황제 대톨라가 노하여 금선을 침략하니 단숨에 길림도와 요동도를 점령하고 평강도( 平康道)를 거쳐 황안도(黃安道)의 경계까지 이르렀다. 다행히 평강도와 황안도의 경계에서 지장(智將) 웅산과 부사인의 지략으로 거란을 격퇴할수 있었다.
이때 태후의 차남 금안대군이 어느덧 28세에 이르렀으나 태후의 명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산경도(山慶道 : 산지가 많아 이와같이 부른다. 호남도(湖南道)와 충성도(忠成道) 동쪽에 위치해 있다.) 문성군(門城郡)의 정무고문으로 가 있었다. 하루는 답답함에 측근들을 불러 ‘옛부터 무난하면 장남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장남이 부족하면 다른 재능있는 왕자중에 물려주는 것’이 천하 왕국의 왕위승계 법도였소. 헌데 현 태후는 내 형님이 엄연히 살아계시고 나 역시 튼실하거늘 이를 무시한채 어린 막내를 세워 수렴청정을 하고 국사를 좌지우지하였소. 게다가 무모한 전란을 거듭 일으키며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수많은 충신들을 귀양보내고 척살하였으며 심지어 급기야는 북적의 침략을 받게 하기에 이르렀소. 무엇보다 북방의 국가들과 화친하자는게 금선 왕조 태조이래의 정신이었는데 그 정신마저 흐트러뜨리고 있는게 현 태후요. 또한 내 아우 금목이 이미 스무살을 넘겨 성인이 된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섭정을 거두지 않고 스스로 국정을 주도하고 있소. 태후의 국정농단이 이와 같으니 내 반드시 이를 바로잡고자 하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물었다. 측근들이 모두 옳다 여겨 결국 금안이 도모하려 하였다. 허나 이미 태후의 측근 홍련과 금화가 보낸 첩자들이 엿듣고 홍련과 금화에게 보고하니 바로 태후의 귀에 들어가버렸다. 격노한 태후가 금안을 소환하여 몸소 친국하였다. “어미를 도모하는 자식을 어찌 자식이라 하겠느냐 ?” 몸소 인두로 금안의 왼쪽눈을 지져 눈을 멀게 하였고 한쪽 다리를 손수 신혹검으로 끊어 다리를 절게 하였다. 이후 지하감옥에 가두어 49일을 굶긴뒤 영월땅으로 귀양보냈다. 영월에서 금안이 손수 칡뿌리와 산나물을 캐먹으며 저는 다리로 겨우 연명해가니 영월 백성들이 이를 모두 애석해하여 금안을 ‘애꾸왕자’라 불렀다.
이후에도 태후는 흉노와 몽골 정벌을 몇차례 더 꾀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 생각있는 식자들은 모두 탄식하기를 ‘그 옛날 화려왕조 초창기에 ‘서안(西安)태후’란 자가 있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농단하더니 오늘날 여명태후 하는짓이 꼭 이와 같구나. 어찌 그 말년이 온전하겠는가’ 하였다. 원래 반도는 화려왕조 시절 ‘석문교(釋文敎)’를 국교(國敎)로 하였는데, 삼생(三生 : 전생,현생,내생)의 존재함과 인과응보와 업보의 문제를 중심윤리로 하는 종교였다. 허나 석문교는 이런저런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기보단 출가해서 득도하기를 바라는 자가 늘어나 폐단이 많았다. 따라서 금선왕조는 국교를 폐하고 석문교를 금하며 별도의 국교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민가에서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무속(巫俗)이나 민속(民俗)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는 무녀 하나가 태후를 찾아와 “태후께서 마땅히 천하를 도모하시는데 어찌 천지신령의 도움없이 되겠습니까. 제가 믿는 신령(神靈)께 공양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면 마땅히 천지신령께서 태후마마를 도와 대사가 순조로이 진행될것이옵니다” 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네 어찌 요사스런 말로 고(孤)를 현혹하느냐’ 하며 몽둥이로 몸소 300대를 때린뒤 내쫒아버렸다.
본래 금선왕조 4대 명종시절 정비 소생의 세명의 왕자가 있었고 이후 거란과의 혼인동맹으로 맞아들인 후비(거란인)와의 사이에 두명의 왕자를 더 두었다. 명종은 거란과의 화친이 지속되게 하기위해 후비소생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였고 여기에 장남이 반발 측근 한회명을 시켜 거리를 떠도는 무사 40여인을 동원 새로 즉위한 거란인 왕자를 쫒아내고 황위에 오르니 이를 ‘진사반정’이라 불렀다. 진사반정으로 왕위에 오른이가 6대 황종(皇宗)이라 부르며 황종에 의해 즉위 6개월만에 쫒겨난 황제를 후세에 ‘단종’이라 부른다.
명종의 셋째아들 남명대군(南明大君)은 황종이 즉위하자 화를 두려워하여 산골로 숨어들었고, 자손이 계속 이어가니 증손자대에 이성(李成)이란 이가 태어나 안정군(安定君)이라 불렸다. 여명태후의 전횡으로 국정이 난맥상에 빠지고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지자 하루는 명화섭이란 이가 경강도 경단(景檀 : 경강도 동해안 끝부분에 위치한 도시로 훗날 이 지역을 ‘강릉시(江陵市)’라 부르게 된다.)땅에 숨어사는 안정군을 찾아와 여명태후의 폭정을 울면서 고하고 ‘군(君 : 안정군)께서는 이미 태조대왕의 혈손으로 마땅히 황위에 오를 자격이 있으며 또 그 학문과 지혜와 총명함이 예사롭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날 여명이 나이 60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니 현왕(現王)은 나이 이미 서른을 넘겼음에도 그 모후(母后)에게 한마디 말도 제대로 못한채 태후에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종사를 걱정해야할 태조의 혈손으로서 어찌 이를 보고만 계시옵니까 ?’ 하며 대성통곡하였다. 정안군이 충심에 감복하여 ‘공의 뜻대로 하리다’ 하여 결국 태후를 도모함에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어 명화섭은 장군 백충국을 시켜 황궁을 포위하게 한뒤 묘계를 써서 태후를 황궁밖으로 나오게 한뒤 병사들로 하여금 태후를 납치하게 하였다. 이후 여명전을 불태운뒤 옛 대조전으로 태후를 끌어내었다. 화섭은 측근 이명과 정과리를 시켜 경단에 있는 안정군을 모셔오게 하여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 태후는 새 황제와 신료들,장수들이 보는 앞에 하얀 소복차림으로 끌려나와 이와같이 말했다.
“ 내 오늘날 폐위가 됨은 내 부덕의 소치로 받아들이리라. 허나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금선왕조 태조의 건국정신을 부정하려 함이 아니요. 다만 외국과의 친교가 자
칫 굴욕외교가 되고 속국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소. 잦은 전란만이 능사
가 아니듯 외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수도 없음을 경들은 명심하기 바라오. 전쟁
도 화친도 따지고보면 일장일단이 있으니 경들은 새 황제를 받을어 이후 균형있는
국사를 처결키 바라오. ”
태후를 함거에 싣고 흑룡도 동북쪽 오성군을 귀양지로 정했다. 오성군은 아리수의 가장 동북쪽에 있는 군으로 말갈족 국가의 국경과 맞닿아 있다. 마침내 함거가 떠나는날이 되니 뜻밖에도 백성들이 저마다 통곡을 하며 몰려나와 귀양지로 떠나는 폐후(廢后)에게 물과 음식과 옷가지를 저마다 내어놓으려 했다. 당황한 명화섭이 잠시 함거를 멈추게 한뒤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명하니 ‘폐후가 나라에 대죄를 지어 귀양을 떠나는데 너희가 어찌 천도를 거스름이 이와 같을수 있으냐 ? 귀양지로 떠나는 폐후에게 인지상정으로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겠다. 허나 폐후의 귀양떠나는 모습을 보며 우는자는 폐후와 같이 천도를 거스르는 대역죄를 물어 다스릴 것이다’ 하고 명했다. 이후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서 떠나는 폐후를 보며 감히 울지 못했다.
오성군까지 한달하고 열흘이 걸려 태후가 귀양지에 도착하였다. 이후 태후는 귀양지에서 혼자 감자와 토란을 심어 키우며 살았다. 이따금 마을에 가난하거나 부모잃은집 아이들을 불러 토란국을 대접하니 지켜보는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다. 나이 60에 폐위가 된 태후는 이후 귀양지에서 20년을 더 살다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