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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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16,13-19)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Simon Peter said in reply,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Jesus said to him in reply,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flesh and blood has not revealed this to you,
but my heavenly Father.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맡겨진 양 떼를 사심 없이 돌보아야 한다. 부정한 이익을 구하지도 말 것이며, 양 떼를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열성을 다함으로써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당신이 누구라고 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으신 뒤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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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최근 몇 달 간 미사 드릴 때마다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있습니다. 성찬 전례 때 감사 기도의 전구 기도문을 읽다가 ‘교황 프란치스코’ 하는 부분이 나오면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뭉클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교황님을 선물하신 것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함을 우리 모두는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로잡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격의 매력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파격적’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탈함과 겸손함’이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예언자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이라거나 ‘복음적인 삶’이라고도 합니다. 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황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고 생생한 신앙을 증언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신앙이 그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신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한 이에 대한 깊은 애정뿐 아니라 격식에 매이지 않는, 가슴속에서 샘솟는 신앙의 기쁨 역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외신을 통하여 소개되어 많은 사람을 미소 짓게 하였던, 교황님이 집전하시는 미사 중에 마음껏 뛰놀다가 교황님의 의자에 앉은 어린아이의 모습은 그분의 삶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기쁨과 참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신앙이 짜인 틀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증언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교황님에게서 보며,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생각해 봅니다. 바로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의 기쁨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복음적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만을 돌보는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미소 짓게 하시는 교황님에게서 무엇보다도 경직된 삶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의 기쁨을 배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날, 여행을 위해 세면도구를 챙기는데 늘 가지고 다니던 샴푸를 넣는 통이 없어진 것입니다. 떠날 시간은 가까워지고 통이 없어서 샴푸를 가져갈 수 없어서 그냥 떠나려고 했지요. 바로 그 순간 주방 싱크대 쪽에 조그마한 통이 하나 보였습니다. 여행용 조미료 통으로 이 안에는 간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른 간장을 비우고 이 통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장 냄새가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떠날 시간이 다가와서 어쩔 수없이 그냥 통에 샴푸를 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행 가서 도저히 이 샴푸를 가지고 머리를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샴푸의 냄새와 간장 냄새가 섞여서 아주 이상한 냄새가 제 코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서 분명히 간장 냄새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샴푸를 담기 위해서는 간장을 버리고 우선 빈 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빈 통을 아주 깨끗하게, 즉 냄새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야 했지요.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아주 간단한 원리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 안에 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또한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약간만 비운 뒤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할까요? 도저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안에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만 주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완전히 비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매일의 성찰, 미사, 고해성사, 그리고 각종 피정과 강의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정화시켜주십니다. 그런데 혹시 그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우리들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이 사도좌를 운으로 그냥 얻은 것일까요? 예수님께 특별히 잘 보여서 얻은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대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제대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순교까지 하시게 됩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닦고 닦아서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한 이상한 냄새를 없애고, 대신 주님의 마음을 채워 그리스도의 향기가 끊임없이 풍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은 지름길을 원한다. 나는 최고의 지름길은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랜디 포시).
실패와 성공
교육 심리학자로 유명한 미국의 훼스팅거(L.Festiner) 교수는 “시험 잘 봤느냐?”라는 질문 하나라도 어떤 고등학생이 대학입시에 합격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망했습니다. 못 봤습니다. 기대하지 않아요. 그런대로 봤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면 불합격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자신의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문제가 어려웠는데 1번 문제부터 틀린 것 같아요. 듣기 평가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이런 식의 대답이라면 합격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실패 요인을 잘 아는 학생의 합격률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을 모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패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요. 문제는 그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그냥 실패 안에서 불평불만만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왜 실패를 주셨냐면서 불평불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 실패를 주셨다는 것은 어쩌면 성공을 얻기 위한 준비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요인을 정확하게 찾으십시오. 그래야 실패를 통해서 성공이라는 선물을 주님께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라는 실타래
-김경진 신부-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등지고 으르렁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미워하는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겉으로는 친한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여러 사람과 틀어진 채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 땅에서 매여 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럼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라고 하는 실타래를 잘 풀어야 할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잘 풀려면 서두르지 말고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잘 살펴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이것이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위한 기술입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한 캠페인으로 이렇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서로를 알아줍시다.”
서로를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드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알아주셔서 하늘나라 열쇠까지 맡겨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때문에 살맛 나고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맛이 났을 것입니다.
문득 이런 문구가 생각나네요. “서로를 몰라줄 땐 서운함 가득, 서로를 알아줄 땐 기쁨이 가득!” 서운함은 자칫 미움을 낳고, 미움은 증오를 낳고, 영적 살인인 무관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상대방이 “제 맘 알지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줍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럼 얽혀있는 실타래가 술술 풀리고 오늘 하루가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조명연신부-
지 금 저는 본당신부의 삶이 아닌, 교구에서 성소자 육성을 담당하는 성소국장 신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본당신부를 해보기는 했지만, 본당이 참 재미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사목을 하다보면, 많은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구에 있다 보니 그러한 재미를 얻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본당 신자보다는 신학생, 예비신학생들을 만나야 하고, 오로지 신자는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성소후원회 미사를 통해서만 만날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신부님도 본당신부 하고 싶죠?”
본당신부를 하기 싫다면 거짓이겠지요. 또 본당신부로 살고 있는 신부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운영하는 카페(http://www.bbadaking.com)를 통해 더 큰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 실 본당신부가 미사 때 강론하면 몇 명이나 듣습니까? 아무리 큰 본당이라 해도 평일에 기껏해야 2~300명 듣겠지요. 그리고 미사가 끝나면 그 강론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까? 아니지요. 그냥 미사가 끝나면 어떤 강론을 했는지도 기억 못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제 카페에서 보통 800~1,000명 정도가 제 강론을 읽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제 강론을 읽고서 다른 사이트로 옮겨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제 강론을 읽는 분이 하루 몇 천에서 몇 만 명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 도 많고 탈도 많다는 인터넷이라는 공간. 그러나 이 공간 안에 저는 어마어마하게 큰 본당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모두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이곳저곳으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다른 사이트로 제 글을 옮겨주시고, 열심히 댓글을 다시면서 강론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시는 것 등등). 얼마나 보람 있고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도 ‘본당신부’만을 꿈꾸고 있었던 한심한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중 요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어떠한 상황에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고백 없이 그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통해 남을 딛고 일어서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온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가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아닌 주님이 첫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베드로의 고백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내 자신이 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고백 없이 내 자신을 낮출 수가 없으며, 지금의 내 자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입니다.(앤 랜더스)
확장되는 사랑의 개념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감격스럽고,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는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다양한 선물과 은총은 또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지낼 일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습니다. 동전의 앞면이 있으면 반드시 뒷면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부과되는 여러 가지 의무들이 참 많습니다.
주일미사 의무라는데 왜 그렇게 빨리 빨리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주일만 되면 왜 그렇게 눈도장 찍어야 될 곳이 많은지요? 주일미사 빼먹고 나면 성사를 봐야 되는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사보기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뿐인가요? 꼬박꼬박 교무금 내야지요. 잘 못 걸리면 건축헌금으로 목돈도 내야지요. 뿐만 아닙니다. 조금만 처신 잘못하면 천주교 신자가 저런다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입니다.
거기다 우리 삶의 지침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께서는 요구도 참 많으십니다.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 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살아 계신 하느님
-정순용-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저함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은 현대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유다인들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스승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단순하게 2인칭, ‘당신’이란 표현으로 나옵니다.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과, 둘째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란 고백은 멀리 생각과 상상으로만 만나는 하느님, 철학적 하느님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희로애락을 겪는, 우리와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는, 아드님인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고백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체험이 발생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느끼는 체험,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하느님 자녀 체험,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와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느끼는 해방 체험, 이런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 김인순 수녀-
누군가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 자체이신 분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어느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엄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 늘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정의는 몇천, 몇만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 각자의 처지와 경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표현이 일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 전체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알려주기엔 너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각자가 지닌 인간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저 또한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마음의 경향에 따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규정지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저의 인간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분이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아 나가고 있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지식의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짧고 빈약한 저의 인간적인 깨달음에도 실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올바른 모습을 알려주시려고 끊임없는 인내와 격려로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이해의 영어 단어는 ‘Understand’ 입니다. 그런데 이 영어 단어를 잘 살펴보면 Under + Stand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있어 보는 것이 ‘이해’라는 단어라는 것이지요. 이 단어의 구조를 보면서 이해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이 단어의 구조대로 생각한다면 상대방 내면 깊숙이 들어가 봐야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말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해란 나의 입장을 포기하고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이해가 아닌 오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장애인 소식지에서 본 글입니다.
캠핑을 떠난 일가족이 반대편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대형버스와 정면충돌 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 가정은 두 딸을 잃었고 아내도 전신 마비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2년 3개월 간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에도 남편은 하루하루 아내를 위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를 파괴된 가정이요, 가장 불쌍한 부부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행복합니다.”
남편은 새벽 3~4시면 일어나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아내의 누운 자리를 바꿔 주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밖에도 그가 아내를 위해 하는 일은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지쳐 버렸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3년 6개월 동안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와 같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아내를 이해할 수가 있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주님에게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신 분, 그렇게 당신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보내고 있지만, 베드로를 당신의 넓은 사랑으로 이해해주시고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과연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교회의 반석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해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변화될 수 있고, 실제로 교회의 큰 기둥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해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을 본받아 나의 이웃에게 오해가 아닌 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사소한 것도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사뮤엘 하조).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행복
-고계영신부-
당시 많은 유다인들은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져 ‘역사의 예수’ 안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어부였던 베드로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고 있던 행복한 사나이 베드로!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샤워실에 들어갔습니다. 늘 사용하던 샤워실이었는데, 그날은 타일들 틈에 끼어 있는 때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동체의 욕실 청소 담당자가 바빴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수세미를 들고 닦을 수 있는 만큼 닦아냈습니다. 닦아내는 동안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지저분한 샤워실을 보면, 마음부터 언짢았는데… 이것이 성령의 열매구나 생각했습니다. 샤워실 청소는 일상의 작은 한 조각으로 누군가 해야만 하는, 희생이 따르는 귀찮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귀찮은 일 그 너머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숨어 있습니다. 화장실 타일을 닦으면서 그 순간 일상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고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그 순간 천상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타일 안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바라본 나는 행복했습니다.
신통(神通)한 베드로
-김찬선신부-
시몬은 베드로의 지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천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랍니다. 게다가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답니다.
그의 무엇이 그럴 만한 것이었나요? 그의 지식, 그의 능력, 그의 가문, 그의 업적, 그의 이력, 그의 그 어느 것도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지기가 될 만한 것 못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저의 외할머니는 말하자면 신이 내린 무당이셨습니다. 그러나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지는 않으셨고 단골이 중요한 때 찾아 와 뭘 물으면 꿈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神通하게 잘 맞았나봅니다. 꿈속에서 관운장 신이 알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神이 내리고 神이 알려주면 神通하니 잘 맞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살과 피의 시몬 바르요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베드로가 하느님 덕분에 교회의 반석과 천국의 열쇠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살과 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실행한다면 그의 교회는 무너지고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주역으로 점을 쳐주는 분이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와 교리를 배우셨습니다. 그분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주역을 배우게 되었고 고시에 실패하자 배운 주역을 가지고 점쳐주며 먹고 살았는데, 이 분 말씀이 정신수양을 하지 않고 그래서 욕심이 끼면 점을 잘 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역을 아무리 잘 알아도 살과 피가 작용을 하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로 말하자면 기도에 해당되는 정신수련을 철저히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떤 결정을 내리고 무엇을 할 때 종종 인간의 머리로 판단하고 인간적인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랬을 경우 그것은 아무리 교회의 일이어도 인간의 일일 뿐입니다. 교회의 일이 다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이 일을 많이 벌이는 사람은 너무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하려는 것이 하느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잘 식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를 잘 해야 합니다. 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神通하기 위해서입니다.
See-Judge-act/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요즘 무슨 일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의 방법론인데 우리의 경우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정신으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열정으로 행동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그리스도적 권위
-전삼용신부-
처음 베네딕도 16세가 교황님으로 선출 되고 많이 들었던 말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온화하고 잘 생기셨는데 베네딕도 교황님은 얼굴이 무섭게 생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현 교황님의 얼굴이 나온 강복장을 부모님께 선물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강복장을 액자에 넣어 안방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 처음으로 바라보는 교황님 얼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서 다시 떼어 거실에 걸었다고 합니다.
정말 겉만 보아서는 그 분이 정말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저지른 교황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교황님이 무류권을 발동하여 선포하는 것은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류가 없다고 하니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권위가 믿기 어려운 것은 단지 교황님만이 아니라 모든 주교, 사제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하는 신부님의 비이성적인 지시에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어보입니다.
전에 광주교구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나주 성모 발현에 관련하여 엄한 교서를 발표하셨습니다. 그 곳에 가는 누구나, 성직자 수도자를 막론하고 파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 성직자를 파문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 측에서는 교회가 성모님을 박해한다고 더 크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신자들이나 수도원, 사제들을 막론하고 어리석어보이는 교회 지도자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정말 실수하지 않을까요? 혹시 교회가 정말 성모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인 것 같으냐고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말하지만 올바른 대답을 듣지는 못합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보게 해 주신 분이 아버지시기 때문이지 베드로가 믿음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완전하여 그를 교회의 첫 번째 수장으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불완전했지만 아버지께서 선택하시어 그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를 뽑은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좌의 권위는 하느님아버지로부터 오는 권위이지 자신의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듯이 모든 성직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권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란 것이 보통 권위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데 그 열쇠는 땅에서 매고 푸는 하느님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권위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도 처음엔 교회로부터 공개적으로 미사를 하지 말라고 하여 삼년 동안이나 골방에서 혼자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회는 그 이후부터는 비오 성인을 자유롭게 미사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오상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교회가 자신을 왜 박해하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과 일치하지 않는 주교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느님나라 열쇠 사용권을 잃듯이, 주교와 일치하지 않는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주교로부터 그 권위를 받아 미사도 하고 죄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나가 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 그리고 그 협조자인 사제와 일치해야 합니다. 사제의 뜻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혹은 몰래 행해지는 모든 신심 행위들은 물고기가 물을 뛰쳐나와 물 밖에서 물을 찾는 격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보다 성경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가 성경보다 더 먼저 있었고, 성경을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또 성경을 다 태워 없애도 교회는 존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누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남기셨던 것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지 성경책을 쓰셨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참 뒤에 쓰인 것이고 그 많이 떠도는 글들 가운데 몇 개만 정경으로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개신교는 성경은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정한 교회는 믿지 않으니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당신의 모든 권위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에 대항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교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양승국신부-
<걱정되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간만에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칭찬을 듣습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 나타난 베드로와 관련된 기사들을 종합해볼 때 그는 참으로 약한 사람, 성격적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의지력이 무척 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내가 왜 이러지?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몸이 받쳐주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은 많았지만 꾸준함이 부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쟁의식이 강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한번도 양보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나서기를 무척 좋아했지요.
베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시던 예수님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 이 친구, 수제자로 뽑아놓기는 했지만 걱정되네. 상당히 문제가 많은 친구야. 잘못하다가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겠는데..."하는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수제자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집중적인 제자교육을 실시하십니다.
베드로를 대상으로 한 특별교육의 핵심은 "겸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겸손의 덕을 쌓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쓰신 방법은 상당히 강도 높은 것이었습니다. 때로 베드로는 "내가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이 양반을 따라가야 되나?"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심지어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까지 듣습니다.
그렇게 호된 꾸중을 주로 하시던 예수님께서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베드로에게 깜짝 놀랄 정도로 칭찬을 하십니다.
"아니, 베드로! 오늘은 네가 왠일이냐? 이제야 네가 좀 정신을 차리는구나. 좋아, 베드로!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인데, 죽음의 힘도 그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한마디 덧붙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야, 절대로 자만하지 말거라. 네가 정확하게 대답했다만 그것을 가르쳐주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결국 베드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덕이 "겸손"이었습니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 그 어떤 자리라도 교회 안에서 "한 자리"하고 있는 분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이 한마디 말씀을 꼭 기억하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야, 언제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거라. 한번 돌아보거라. 네가 처참하게 깨지고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진 때가 언제였는지? 기고만장해서 설치고 다닐때가 아니었더냐? 너 혼자 뭘 하려고 했을 때가 아니였더냐? 베드로야, 꼭 기억하거라. 겸손의 덕이야말로 모든 덕중의 가장 위대한 덕이라는 것을."
새벽을 열며
어제 아침 9시 10분쯤 전화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달라는 전화였지요. 미사 하기까지는 50분 정도 남았으니 빨리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을 하고 출발을 하려는데 차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전날 어느 아파트에서 구역미사를 하고서 그곳에 차를 두고 왔습니다. 차 안에 병자성사 예식서가 있기 때문에 안 갈 수가 없었지요.
사무장님의 도움으로 그 아파트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차 앞 유리에 노란색의 이상한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외부차량이 불법주차를 했다는 경고 스티커였습니다. 이 스티커는 잘 떨어지지도 않데요.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대충 제거를 한 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으로 가는 이 길로 수월하지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차가 많은지요. 또한 신호란 신호는 다 걸립니다.
아무튼 이비인후과 8층 67호라는 주소만 들고서 그 병원의 본관 8층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병실 중에 67호가 없습니다. 물어보니 이곳이 아니라, 옆에 있는 또 다른 병동이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계단을 뛰어서 힘들게 8층까지 올라갔는데…….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다시 뛰어서 옆 건물로 이동을 했지요. 그리고 다시 계단을 힘들게 뛰어서 8층까지 갔습니다.
결국 병자성사를 주고서 다시 성당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10분. 10분 늦었습니다. 30분이면 충분히 다녀올 곳을 이렇게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걸려서 다녀왔네요.
이 세상은 내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는 하루였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 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뜻을 주장하고, 내 뜻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다 내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잘못된 모습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바를 이야기하지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하면서 무척이나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는 칭호는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예수님께 최고의 칭호를 붙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칭호를 원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었던 것이지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부족함 그 자체인데 어떻게 이런 답을 말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답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내 뜻만을 내세워서 사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께 정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하세요.
빠다킹신부
주님이십니다
-김상용 수사-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갈망해 마지 않았던 제자들로부터 고백되는 신앙의 핵심을 베드로가 정확히 대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담화 과정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오늘, 너는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물음에 대해 해답을 가르쳐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을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 내 옆에 매우 인격적으로 살아 숨쉬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실존적 현존이 나를 가능케 한다는 차원과 둘째, 우리가 하느님 자녀 됨을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임을 내포하는 하느님 아드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 즉 우리가 그분을 이제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한 존재의 근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을 참 구원자(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일상의 핍진한 삶이 가져다주는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 안에서도 이 질문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안에 바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최종의 가치가 고스란히 숨어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바로 지금 여기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정의하고 있느냐?”
-윤미경-
한창 젊은 나이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정체성 혼란으로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살았다. 정체성의 부재이니 사는 의미도 모르겠고 기쁨도 즐거움도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에 가면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니 그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그 문턱 앞에서 서성거리기를 마흔이 다 되도록 했다.
‘나’를 모르는 방황의 시간 동안 답답한 마음에 점집도 가 보았고, 평일미사 참례와 봉사활동을 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말에 이곳저곳 미친 듯이 봉사활동도 다녔다. 한동안은 수도자·성직자에게 정성을 들이면 은혜 받는다는 말에 솔깃하여 마냥 그분들을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과 말에 좌지우지되면서 살다 보니 점점 사람들이 싫어지고 적대감만 생겨 종내에는 사람들을 피하며 살았다. 깊은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 고통스럽던 혼돈의 시간 끝에서 ‘나’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욕구·감정을 살피고 공감하면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었고, 타인에게 향해 있던 에너지를 내 안으로 향하고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물론 외적인 조건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내 마음이 바뀌다 보니 그저 기쁘고 행복이 샘솟듯 넘친다. 하느님께서 순간순간의 삶을 당신의 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데 이를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다른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아 헤매며 살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 세월 동안 마음 아프셨을 하느님을 생각하니 송구할 따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는 정녕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가까운 보물을 알아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있음’ 그 자체로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오늘날 권위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태를 많이 경험한다. 가정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는 경우가 엄청 발생하게 되고 부모가 늙으면 부모의 권위가 공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학교에서 스승의 권위가 추락된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고 이제 성역이라 하였던 대통령의 권위도, 성직자의 권위마저도 서서히 추락하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 성하에 대한 절대 공경을 표해 왔고, 이는 주교들과 사제들에게까지 확장 적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또 잘못된 권위의 행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올바른 권위에 대한 불순종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의 산물일 뿐이다. 참된 권위에 대한 순종과 공경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잘못된 권위와 올바른 권위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 걸까? 베드로의 사례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
먼저 잘못된 권위는 그 권위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많은 정치가들의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릇된 교주들의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된 권위는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베드로의 권위는 자신에게서,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에 참된 권위일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잘못된 권위는 속임수와 술수를 통해서 얻게 된 권위이고 참된 권위는 진솔한 신뢰와 확신을 통해 얻게 된 권위이다. 일부 정치가들과 사이비 교주들은 대부분 전자의 길을 통해서 권력을 움켜 쥐게 되고 베드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세번째로 잘못된 권위는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데 급급하고 더 누리지 못해 안달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참된 권위는 더 잘 봉사하지 못함에 늘 가슴아파하고 그래서 늘 하루 빨리 그 봉사의 직책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고뇌한다.
내가 만나뵌 교황성하와 내가 모셔본 총장님, 관구장님들과 원장님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이러한 참된 권위의 소유자들이셨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의 봉사에 대한 참된 고뇌와 아픔을 늘 옆에서 지켜보면서 과연 하느님께서 뽑으신 분들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사표들을 보내 주시어 당신의 권위를 대신 전해 주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퇴임 앞둔 대통령에 대해서나 교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성직자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들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 아플 때가 많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통령이든 성직자들이 그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인간적으로 약점과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선생님들은 바로 우리의 자식들 중에서 나오고, 우리 형제 중에서 나오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야 별별 약점과 부족함을 다 안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교황님마저도 인간적인 관점에서야 약점이 없겠는가? 성인들마저도 인간적인 약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참된 권위는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점에서 가장 약점이 적은 제자에게 하느님 나라를 맡긴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약점이 많을지도 모를 베드로 사도에게 그 열쇠를 맡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베드로 사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리 교황님도 주교님도 본당신부님도 나는 그러리라 믿는다. 우리 총장님도 우리 관구장님도 우리 원장님도 나는 그러리라 확신한다. 그러기에 그분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공경을 드리고 싶다. 늘 부족하지만 말이다.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 공경지례를 못드리듯이...
오늘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우리의 장상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들에게 우리의 참 공경을 드리자.
나의 부모님, 장인 장모님, 나의 선생님, 나의 은사님, 우리 신부님, 수녀님, 우리 주교님, 교황님, 우리 관구장님, 원장님,...
더 감사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합니다. 오늘 만큼은 그 봉사의 직무에 너무 짓눌리지 마시고 행복하소서. 아멘.
믿음과 충성의 사도 베드로 -경규봉 신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해마다 2월 22일에 죽은 이들을 기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관습에 따라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의 무덤 곁에서 두 사도에게 공경의 예배를 드렸는데, 여기에서 이 축일이 기원되었다고 한다. 이 축일은 4세기부터 로마에서 지켜져 왔다.
사도좌란 교황좌, 혹은 성좌(聖座)라고도 하는데, 으뜸사도인 성 베드로가 창설한 로마의 주교좌를 말한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로마 사도좌의 주교가 되며, 사도좌는 모든 주교 가운데 첫 번째 지위를 가지는 수위권을 가지고, 전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을 가르치고,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사도좌는 세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계교회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사도좌라고 할 때에는 최고의 주교인 교황과 교황을 보좌하는 로마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재판소 등의 행정기관까지도 포함하여 이를 총체적으로 지칭하며, 교황은 이 기관을 통해서 세계 각국의 교회를 관리한다.
사도 베드로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루가복음(5,1-11)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하여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기까지도 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의 생업을 팽개치고 곧장 예수님을 따라나설 정도로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마태 4,20).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인간적인 연약함과 허약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만은 확고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말씀하시며 교회를 세우셨다. 또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을 뿐만 아니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5-17)라고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다.
베드로는 결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재능이나 학식도, 성서와 율법에 대한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겁도 많고, 성격도 다혈질이며,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평범한 어부였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와 당신의 양들을 맡기신 까닭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나 능력, 학식이나 지위를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과 충성심을 보신다. 당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보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충성심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심, 사랑과 열정을 지녀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장받으며,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 하느님께 충성하는 신앙인이 되자.............◆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의미 -강기정 신부-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성 베드로 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4세기부터 로마에서 지켜왔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에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는 강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온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부르고 모든 사도들과 모든 교부들의 으뜸이 되도록 간택되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많은 사제들과 사목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지만 베드로도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다스린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직분의 부여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몫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다. 또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권한을 갖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베드로를 통해서만 주신다.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호한 대답을 전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들 자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맨 먼저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했던 그분이었다.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세상의 견해가 너를 오류로 이끌지 못하며, 천상적 감도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고 육정이나 혈통이 아닌 외아들의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너는 복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의 신성을 계시하신 것처럼 나도 너에게 너의 높은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부서질 수 없는 반석이고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모퉁이 돌이며 누구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반석이라면, 너도 내 힘으로 견고해진 반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에 참여함으로써 너도 그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즉, 이 견고한 기초 위에 나는 영원한 성전을 짓겠으며 하늘까지 오를 내 교회가 이 신앙의 견고함 위에 세워지리라는 말씀이다. "죽음의 힘도 이 신앙을 누르지 못하고 죽음의 사슬도 이 신앙을 묶어 버릴 수 없다. 이 말은 생명의 말이다. 이 신앙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처럼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린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지극히 복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을 다른 사도들에게도 물려주셨으며 또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도 물려주셨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시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이 권한을 위임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의 으뜸으로 내세우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은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이다. 오늘은 이 강론 내용 중에서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는 성귀 중심으로 함께 묵상하고자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산다. 그 관계, 고리를 연(緣)이라고 한다. 가족과 친척들의 혈연관계에서부터, 같은 고장 출신이라는 지연관계,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학연관계, 아파트 반모임이나 이런저런 계모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모든 모임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모이게 하는 어떤 힘, 어떤 매력을 띠고 있는 구심점이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유대 관계는 단연 혈연관계일 것이다.
혈연관계에서 가장 큰 구심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집안(혈연집단)의 어른일 것이다. 가족의 식구들은 명절이 되면 모인다. 또 특별한 때에 모인다. 그 특별한 때란 다름아니라, 집안의 어른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이다. 살아계시다면 생일이라든지, 환갑이니 칠순이니 하는 그런 날들이 특별한 날이다. 돌아가셨다면 기일 같은 날이 특별한 날이다. 그 날에 가족들은 모인다. 어른을 축원해 드리고 기억하려고 모인다.
그러니 집안의 구심점은 아무래도 어른일 것이다. 형제들이 저마다 따로 흩어져 살더라도 어른이 계실 때에 잘 모이지만, 어른이 계시지 않으면 덜 모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집안의 어른이 식구들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교회도 한 식구이다. 신앙이라는 이른바 '신연(神緣) 관계'로 맺어진 한 집안 식구들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부모나 형제나 자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신연관계로 맺어진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이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관계이다. 하느님과 맺은 관계이니 어찌 이보다 강한 인연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생활하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그래서 서로를 형제 자매들이라 하지 않는가. 교회의 궁극적인 어른은 주님이시지만, 우리가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교회의 어른도 계신다. 곧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이시다. 유식한 말로 교황님은 '그리스도교 백성이 같은 신앙과 같은 통교(친교)를 이루는 일치의 가시적인 원리이며 기초'이시다. 그래서 전 교회가 교황님을 존경하고 사랑을 드린다. 또 교구에는 교구장 주교님이 어른이시고, 본당에서는 본당신부님이 어른으로 계신다. 이분들을 중심으로 우리 신앙의 가족들은 모이는 것이다. 그분들이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세기 교회 때부터 이런 신앙의 가족들은 교회의 어른을 공경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 22일)이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셔서 온 세상의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그렇다면 이 축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날짜는 본래 로마에서 가족들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이 관습에 따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바티칸 언덕(지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경의 예를 드렸는데, 이것이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 되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대축일(6월 29일)이 있지만, 갈릴래아의 어부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만 지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우리 교회에서 어른이시기 때문이다.
이날 전례에서,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영성체송). 교회의 반석이며 기초이고 구심점이 되는, 보이는 어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셨다는 고난의 증인이며, 어른(원로)으로서 형제들이 굳은 믿음을 갖도록 '양들의 모범'이 되셨다(제1독서). 그래서 우리들도 베드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복음).
그렇다. 어른이시지만 인간이시기에 약점도 있고 불완전함도 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은 신앙이 그분을 우리 교회의 어른이 되게 하였고, 우리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든든한 반석, 믿는 이들을 모이고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의 힘, 곧 신앙을 다시 고백해 보자. 우리의 교회를 굳건하게 지켜주고 더욱 하나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는 질문을 하신다. 그러면 개신교에게서, 여호와 증인에게서, 몰몬교에게서, 통일교에게서...등등 온갖 소리를 들은 것을 나열하여 보고한다. 전부 내 말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줏어 들은 말이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다는듯이 지켜보시던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하신다. '남들의 말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그동안 교리나 강론, 서적, 남의 이야기 등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듣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나의 고백이 될 수는 없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동안 제대로 주님을 체험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보니, 막상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저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얼굴은 벌겋게 달이오르고, 애~또 애~또~~만 연속하면서 대답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신앙생활이 벌써 몇 해째인데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어 본다. 물론 그분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한 번으로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변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내 이해와 체험이 계속 성장 또는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에 대해서 묻고 찾는다면 시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친히 당신을 열어 보여주실 것이다..........◆
교회의 반석
-이정호신부-
우리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공사를 합니다. 쉽게 깨지지 않을 바위 위에 집을 짓는다면 얼마나 튼튼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 현실의 교회 생활은 갈라지고 쪼개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믿음의 고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은 객관적으로 확실한 지식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의심과 회의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오는 분열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이 간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불러일으키고 참다운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성령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부족함이 많고 죄도 많은 우리 교회를 받쳐주는 것은 조직의 확고함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보잘것없고 초라하지만 하느님께 드리는 진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금이 간 우리 믿음의 고백을 밑에서부터 받쳐주시는 사도들의 후계자이신 주교님들과 주교 중에 주교이신 교황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과오와 실책을 붙들고 힘겹게 교회를 지탱하고 계신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인격적 관계 만들기
-정순옥 수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으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마닐라 E.A.P.I. 연수시절 산책길에서 만난 동료인 인도네시아 신부님과 그리스도론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부님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슴없이 ‘라뿌니(스승님)’라고 대답했습니다. 유기서원 2년차 때 나의 삶은 더 이상 기쁨도 의미도 없었으며 몹시 메말랐습니다. 이대로 수도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에 몇 달 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고 홀로 수녀원 기도실에 앉아 처연한 심정으로 십자가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의 주님께서 ‘나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너는 나를 버리느냐?’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심정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발을 뻗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기쁘게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 수도생활의 동반자로 초대했습니다. 성녀는 용기와 열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했습니다. 십자가와 무덤까지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제자인 성녀가 부른 주님의 호칭이 ‘라뿌니’였습니다. ‘라뿌니’란 매우 인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칭호라고 생각되어 제게도 예수님은 제가 바라보고 따르기를 원하는 오직 한 분인 ‘라뿌니’입니다. 이 위기를 통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주님을 ‘라뿌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신앙인들한테도 위기는 자신의 정체성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확립하고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는 은총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특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께.
“참 인간 베드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서정웅 신부 -
여러분은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3대 종교의 창시자인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스람교의 마호멛 처럼 인류의 위대한 성인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 물었던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우리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 등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마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 이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초대 사도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말로서, 이 고백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구세주)임을 알고 전 교회를 대표하여 선언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시몬 바르요나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르시며 “그것은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네가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복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되다-너는 행복하다” 베드로가 스승 예수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그 복은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 복된 사업을 인간이 떠맡는 행복한 사명입니다. 이 모든 복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을 한데서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1-42)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요나의 아들 시몬을 베드로-케파 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이름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그 이름이 단순한 개명의 이름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이름임을 예수께서는 확인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다윗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느님 왕국을 세우도록 하느님(성부)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마태오 복음 16장17-19절에서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세우시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세 가지를 주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바위)라는 새 이름, 둘째는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이며, 셋째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김으로써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당신 왕국인 교회의 총리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쇠’는 베드로가 자신의 후계자에 게 물려줄 직책과 수위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세 대대로 계승되어 왔습니다.
(마태오복음 16.18)‘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에서 교회를 내리누르지 못할 죽음(죽음)의 세력에 대한 표현은 ‘교회의 영원성’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반석’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베드로의 믿음이 걸림돌이 될 정도로 부족하더라도, 그는 교회 창립의 반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수제자로) ‘선택’ 했을까요. 그리고 왜 그를 ‘반석’ 이라고 불렀을까요? ’베드로가 가장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삶의 실패를 많이 경험해서 마음의 넓이,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어리석고 부족해 보였지만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 완전함, 하느님께로 나아가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안에서 영혼이 계속 성숙해가고, 사랑이 계속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예수님, 동료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랑의 힘을 빛나게 하는 인간성을 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소신 없이 행동하기도 하였으며 (갈라 2.11-14), 때로는 단호하기도 하고(사도 4.10, 5.1-10) 경우에 따라서는 무분별하고 경솔하였습니다. (루카 22.33) 또 성급하고 화를 잘 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18.10)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다가 빠져서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부족하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마태 14.28-31)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스승님을 버려도 죽어도 배반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놓고 스승님 면전에서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해 버립니다. (마르코 14.17)
반면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눈여겨보았던 인물입니다. 고기잡이에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순명하고 믿음으로 따릅니다. 예수께서 중요한 일(거룩한 변모,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림)이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닌 인물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받더라도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했으며, 형제(사도)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합니다.(루카 22.31-32)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스승 예수를 살아 있는 (구세주)그리스도로 고백(마테 16.16-19)합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납니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인물로, 그리고 예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큰사랑과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요한 21.15-17)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 겪는 여러 가지 실수나 실패, 아픔들을 통해 사랑이신 예수님,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양승국신부-
<어쩔 수 없는 내 사랑>
사랑에 깊이 빠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심리학자인 도로시 테노브 박사는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현상을 오랫동안 연구해왔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절정에 이를 때 연인들은 일종의 천국체험을 하게 된답니다. 상대방과 함께 보내는 것은 천국의 대기실에 있는 느낌이랍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완전하다는 환상도 갖는다는군요. 잠깐 눈이 머는 현상이 지속되는 것입니다(게리 채프먼, ‘5가지 사랑의 언어’ 참조).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랑에 사로잡힌 기간은 평균 2년이란 결론이 나왔답니다. 결국 오래가지 않아 구름 위를 떠다니는 상태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게 되지요. 현실적인 눈이 열리면서 슬슬 상대방의 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실은 엄연히 현실이지요. 꿈에서 깨어나 보니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는데 태산이 되어 다가옵니다. 머리카락이 세면대 위에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쩝쩝, 후루룩 밥 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무 곳에나 던져놓은 냄새나는 양말이 기분을 잡치게 만듭니다.
사랑에 빠지는 황홀한 감정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각한 착각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벗어나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사로잡힌 감정 아래서 이루어지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일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서도 지속적인 친절과 너그러움이 계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약한 인간의 특성 상 항구한 사랑, 3년, 5년. 10년 이상 지속되는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이나마 강렬했던 사랑의 기억은 우리의 인생 여정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단 한편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만 뜨면 생각나는 사람,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사람, 그와 한 세상, 한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 그가 없는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게 만드는 사람, 그로 인해 세상만물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삶은 송두리째 사라지게 만들어 오로지 그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사람,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랑을 갈구해오면서 절절히 체험했던 바처럼 그런 사랑은 사람에게서보다 하느님에게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제대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제대로 된 사랑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제 주님이십니다. 스승님은 제 불멸의 연인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 어디가도 느끼지 못할 강한 사랑의 향기를 풍기시는, 그래서 저를 늘 취하게 만드는,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인간으로부터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그 감미로운 사랑, 꿈결 같은 사랑을 영원히 주실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 나라의 열쇠
-유 광수신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열쇠란 무엇인가? 열쇠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기구이다. 열쇠가 없으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다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들어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살아날 수 있었는데 열쇠가 없었다.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아서 결국 안에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질식사를 하고 불에 타서 죽었다. 자동차 열쇠를 잃어 버리면 차가 있어도 차를 움직일 수 없다. 아파트 열쇠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금고 열쇠가 없으면 돈을 꺼낼 수도 넣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열쇠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열쇠를 이용할 수 있는 용도가 다르다. 나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열쇠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가? 하늘 나라의 열쇠는 내가 만들 수는 없다. 하늘 나라의 주인만이 만들어서 나에게 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하느님이 만들어서 준 열쇠인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늘 나라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즉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내가 하는 일이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 하느님께 달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하늘 나라의 열쇠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떤 것인가? 내가 아무리 하늘 나라의 열쇠라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열쇠가 아니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열쇠란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예수님을 알아 본 그 믿음이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이다.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다른 예언자"라는 열쇠를 가지고는 하늘 나라의 문을 도저히 열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가 아무리 좋은 열쇠라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의 문에 맞지 않는 열쇠인데 어떻게 열 수가 있는가? 어느 열쇠이든 열쇠는 반드시 맞는 열쇠가 있는 법이다. 또 열쇠가 모조품도 많고 불량품도 많다. 열쇠란 비슷하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틀려도 열리지 않는다. 열쇠는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반드시 구멍에 맞아야 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조품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직접 매고 풀 수 있어야 한다. 매고 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즉 구세주라고 고백했다면 그분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풀고 맺어야 한다. 내가 풀려고 하지 말고 또 돈이나 권력으로 풀고 맺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고 풀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어디 계시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통해서 맺고 푸는 것인가? 그것은 복음을 통해서 맺고 푸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결정하든지 또 무엇을 생각하든지 모두 다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으로 생각하고 복음의 가치로 보고 판단하고 복음의 잣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복음 따로 나 따로 생활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존재를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즉 복음에서 답을 찾고 복음에서 길을 찾고 복음에서 기쁨을 얻고 복음에서 힘을 얻고 복음에서 희망을 보고 복음에서 위로를 받고 복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맺고 푸는 것이다.
그럼 하늘 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모양은 말씀해주셨다. 즉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미래 동사를 사용하셨다. 따라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하늘 나라의 열쇠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고난과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왜 베드로보고 반석이라고 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니, 엘리야니,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으나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를 세워도 열쇠가 없어서 또는 맞지 않아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는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베드로가 고백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반석은 가장 밑받침이 되는 주춧돌이다. 반석이 약하면 또 반석이 본래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 위에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무너지고 만다.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앙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고 또 나의 신앙으로 영향을 받는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즉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그 위에 세워진 교회는 안식교도 될 수 있고 개신교도 될 수 있고 가톨릭 교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신앙에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자녀들에게도 이웃에게도 친척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과연 지금 내가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늘 나라의 열쇠는 어떤 모습의 열쇠인가? 나는 어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느 반석 위에 나의 신앙을 키웠는가? 즉 나의 신앙을 받쳐주고 있는 반석은 어떤 반석인가? 열쇠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다.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복은 본래 받아들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할 때 하느님이 그곳에 당신 은총을 채워 주시는 것이지 내가 복음 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만 만들고 그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 담아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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