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9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전쟁의 신 》
슥 12:1~9
<하나님을 낮추려는 지식인들>
종교학자들, 종교 다원주의자들, 유신진화론자들,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들을 포함하여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폄훼하려는 경향을 띱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힌두교 불교 유교 등에서 섬기는 신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종교학이나 종교다원주의 진영에서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폄하합니다.
전쟁의 신, 어떤 의미일까요?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쟁을 할 때면, 각 부족들은 저마다 전쟁의 신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대의 부족들은 전쟁의 승패는 신의 섭리와 조화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최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우세한 병력으로 전쟁에 나서지만, 승패는 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전쟁은 “콩 심은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콩심은 곳에서 팥이 나고, 팥심은 곳에서 콩이 나기도 하는 예측불허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전쟁에서 유리하다”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승패는 늘 인간의 예측을 불허합니다.
전쟁은 끝이 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승리자다!” 이 말은 전쟁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아득한 고대시대부터 전쟁의 이러한 속성을 알고 부족마다 고유의 신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만들어진 신입니다.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신”이라는 말에는 “신은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상징성’이 묻어있습니다.
만들어진 신, 가짜 신, 그 신 중에서 대표적인 신이 “전쟁의 신”입니다.
안티 기독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폄훼하는 제1원칙이, “여호와도 전쟁의 신이다!”입니다.
반 기독교 진영에서는 “여호와도 전쟁의 신”이라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 나열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 현대의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하고 신앙해야 할까요?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
현대인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크리스찬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심으로써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나님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의 하나님”으로 만납니다.
내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복잡한 현실에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전쟁 참전 경험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도 있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오직 나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때부터 “나와 하나님” “하나님과 나” 관계가 시작됩니다.
___ 어떤 분은 평생 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으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___ 소천할 때까지 “나의 하나님”만 예배합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해서입니다.
___ 여기서 신앙이 자라면, 나만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과도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___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신앙이 성숙할수록 “나의 하나님”에서 “나와 너의 하나님”으로 확장됩니다.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중보기도가 가능해집니다.
중보기도는 공동체가 합심하여 한 가지의 주제를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공동체 안의 어느 한 사람의 기도제목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에서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하나님”에서 더 나아가면 “우리 지역의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 지역의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백성과 만나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지도자를 위한 기도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혹은 러시아의 크리스찬이라면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전쟁에 발발하면 양 당사국의 국민들의 기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전쟁 당사국의 국민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기도 제목은 없습니다.
☞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크리스찬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신 _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 당사국의 크리스찬에게 “전쟁의 신”이 되어주십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물매돌 다섯 개를 준비하고 나아가면서 외친 말입니다.
이 순간 이스라엘에게,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말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다윗의 선포와 기도대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위업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스가랴 12장 1절로 9절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으로 등장합니다.
(3절)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스가랴서의 수사적 표현은 감히 ‘넘사벽’입니다.
전쟁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겁게 하시면, 누가 감히 그 돌을 들어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권세들은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른다고 예루살렘을 깔보고 모여듭니다.
하나님이 무거운 돌로 만들어놓은 예루살렘을 들어올리려고 덤벼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라는 무거운 돌을 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무겁게 해 놓은 돌을 들다가는 크게 상하게 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선전포고했다가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진정한 “전쟁의 신”으로서 위용을 드러내셨습니다.
<붕어빵 이야기>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라리”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나라나 민족도 들어올릴 수 없는 무거운 돌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의 책 붕어빵이 생각납니다.
붕어빵은 신정론을 다룬 책입니다.
붕어빵의 출발은 “아무도 들어올릴 수 없는 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중세 비기독교인 철학자들이 기독교회에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그렇다면 1과 2 사이에서 자연수를 찾아낼 수 있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전제하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하나님은 세모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어?”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창녀를 처녀로 만들 수 있어?”
등등의 질문을 쏟아냅니다. 이어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전능자라면, 하나님은 자기가 들지 못하는 바위도 만들 수 있어?”
☞ 교회를 난감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도 못 드는 바위를 만드셨다면, 그 순간 하나님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바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위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 안 만드신다”라고 대답하면,
“그런 바위 한번 만들어보라고 해 봐!”라고 공격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의 대답 중 그럴듯한 것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므로 그런 바위를 만드셨더라도 이내 그 바위도 들게 된다.”입니다.
그러나 명쾌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 질문을 실마리로 붕어빵은 신정론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꼭 읽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__어쨌든 하나님이 무겁게 하신 돌은 아무도 들어올리지 못합니다.
__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__예루살렘과 전쟁하여 이길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__하나님의 “전쟁의 신” 되심을 유감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전쟁의 신 하나님>
기독교인이 되면, 처음 만나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신앙이 성장하면서 기독교인은 “너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됩니다.
“나와 너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우리 지역 하나님, 우리나라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성도에게 영역을 넓혀주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 되어주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 비교종교학자들, 비기독교인 지식인들,
그들이 말하는 “전쟁의 신”은 “우리 부족이 전쟁할 때 이기게 해 주는 신”으로 한정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전쟁의 신 여호와”는 “만들어진 신”으로 정의합니다.
고대 부족국가들이 전쟁의 신을 만들어 섬기다가, 전쟁에서 패전하면 그 신을 팽개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을 모색합니다. 새로 만든 신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면 그 신을 섬깁니다.
전쟁에서 승리가 지속되는 한 그 신은 교체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쟁의 신이기도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스가랴 12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불가침의 나라로 만드셨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처절하게 망하게도 하시는, 전쟁의 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에만 지속적으로 승리를 안겨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기게 하시지만, 그들이 죄악에 빠지면, 전쟁을 통해서 망하게 하십니다.
예수 안 믿는 지식인들이 말하는 “전쟁의 신”은 늘 승리를 안겨주는 일시적인 신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이기는 나라의 신이며, 또한 전쟁에서 패전하는 나라의 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긴 횟수 못지않게 패전 횟수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면서 “너의 하나님”이시듯,
전쟁의 신 하나님은 “승전국의 하나님”이시면서 “패전국의 하나님”이십니다.
스가랴서 12장 3절에서 스가랴는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 12장 1절에서 더 중요한 말씀을 먼저 선포합니다.
(1절)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만유의 주재 되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모두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도 다가가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심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무리>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떠오르는 라훈아의 노래 한 곡이 있었습니다.
“너와 나의 고향”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향은 나의 고향이지만 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지만, 너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지만, 너희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전라도의 하나님이시고, 경상도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의 하나님이시고, 미국의 하나님입니다.
아시아의 하나님이시고, 아프리카의 하나님입니다.
지구의 하나님이시고, 해달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최근 과학계에서는 빅뱅이전에는 ‘에너지만 있었다’라는 가설을 주장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 에너지까지도 창조하신 분이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1절)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얼마나 복됩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자기의 뿌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들이 진정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살이 힘들고 어렵고 고단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는 포근함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품을 누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