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폭발하는 별들의 뒤란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히 시인선〉이 출범한다. 새롭게 출범하는 시인선의 상징이자, 그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시집으로 정수자 시인의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을 펴낸다. 정수자, 라는 이름 자체로 하나의 계보가 되어버릴 만큼 그녀의 시조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존재 자체가 한국 현대시조의 현주소이자 미래인 정수자의 이번 시집은 가장 완벽한 순간에 언뜻 시야에서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폭발함과 동시에 여백을 만든다. 그 폭발하는 여백이 독자의 머릿속에 깊은 여운과 상흔을 남길 것이다.
시인의 말
시의 본적을 찾아
말 너머의 말을 찾아
삶의 본래면목을 찾아
난망 사막을 건너보려니
사람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2024년 3월
정수자
작가 소개
정수자 시인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아주대학교 국어국
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박사.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
나다』 『비의 후문』 『그을린 입술』 『파도
의 일과』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현대불
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
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추천사
정수자 시인의 시는 장쾌하다. 군말 없이
곧장 직입하는 언어가 시원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각(刻)하듯 정교하게 꼭 들어맞게
고른 언어의 빛은 하나하나 눈부시다. 시행
의 뒤편에 맑게 생겨나는 여운에는 향기가
그윽하게 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의 고상
한 격조와 예지를 이 시집에서 만나게 된
다.
-문태준 (시인)
윤슬 농현
보았는가, 저 꼼질은 틀림없는 물이렷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모래 노래 아니라
사막 속 윤슬을 켜는 신의 미소 같은 것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대는 물비늘들
가히 홀린 눈썹을 술대 삼는 신기루에
다저녁 물때를 놓치듯 버스도 지나칠 뻔!
잡아보려 다가서면 고만큼씩 멀어지던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했네
가을의 밑줄
저녁을 일찍 하니 저녁이 길어졌다
외등도 조곤조곤 곁을 더 내주고
접어둔 갈피를 헤듯
책등들이 술렁였다
등불과 친해지면 말의 절도 잘 짓는지
하품 같은 농 끝에도 코가 쑥 빠지지만
저녁에 길게 들수록
행간은 더 붐비리
가을의 질문 같은 동네 책방 창문들도
길어진 모서리를 모과 모양 밝히고
누군가 밑줄을 긋다
별로 솟곤 하리라
그리움의 유적지
당신이 귀해졌다
격조를 얻고 나서
초승달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려 봐도
오늘은
거리가 마음이다
그리움의 유적지다
멍한 날
촐촐히 속이 비면 말개지는 느낌이야
제삿날 올리던 놋접시의 무나물이
슴슴히 둘레를 괴며 달무리를 흉내내듯
말 많은 모임에선 뭇국조차 못 사귀고
그냥 마냥 걸으며 홀로나 더 맑히듯
촐촐히 멍한 날이면 뭔가 이룬 기분이야
소년의 긴 손가락이
신전의 부조들을 아다지오로 쓸다 말고
하늘을 훅 그으니 별들이 쏟아졌다
나일강 만파를 고르듯
파피루스 잎을 타듯
피아노를 타고 놀던 파리한 손가락이
별 사이를 촉진하자 은파랑이 튀었다
콤옴보 신화를 토할 듯
열주들이 울렁였다
불러 봐 너의 별을, 은파 만파 지휘하듯
반달 깃든 손톱이 뱃전을 두드릴 때
누천년 사막 능선 켜온
달도 뺨을 붉혔다
칼
야밤에 칼을 샀네, 비색에 홀려 들어
오늘의 운세 삼아 입술이나 대볼까
꿉꿉한 묵언 끌탕이나 채로 진탕 쳐볼까
직입은 똑 놓치면서 푸념만 후 늘어져도
대낮에 칼을 품고 나갈 일은 없을지니
쪼잔히 노염이나 썰어 바람길에 뿌려볼까
[ 서평 ]
오랜만에 큰 그림의 시들을 만났다. 정수자의 시들은 메시지에 사로잡혀 절절매지도 않고 표현을 궁구하느라 겉멋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대상을 넉넉히 껴안고도 남을 언어의 거대한 그물을 세계에 던진다. 그것은 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섬세하고, 완결을 지향하면서 완결을 의심하는, 완성과 회의의 탄탄한 그물이다. 그것은 확고한 중심을 견지하면서 대상을 향하여 아름다운 비례의 날개를 던진다. 그것이 사물을 포착할 때, 가장 잘 들어맞는 것들끼리 부딪힐 때만 낼 수 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삑사리’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정확한 투구는 비례의 왕국에 도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전적 기술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달의 순간에 자신을 지울 줄도 안다. 압력이 가장 높은 단계에서 폭발하는 별처럼, 가장 완벽한 순간에 언뜻 시야에서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그녀의 언어는 폭발하면서 동시에 여백을 만든다. 폭발하는 별들의 뒤란이야말로 그녀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풍경이다. 폭발하는 별들의 뒤란은 아름다운 빛의 여운과 조용한 성찰과 새로운 길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이다.
정수자의 시들이 폭발할 때, 독자들은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환호한다. 그 뒤란에서 부재와 해체의 고요한 성찰이 이어질 때, 독자들은 자성의 시간에 빠져든다. 작은 힘들이 모이고 모여 어느 순간 손끝으로 에너지가 폭발할 때, 몸은 춤이 된다. 그녀의 시들은 축적된 에너지의 폭발과 해체, 힘의 모음과 놓음 속에서 마침내 춤이 된 언어이다. 발끝에서 치고 올라 적삼을 타고 흐르다 마침내 손끝에서 폭발하는 춤사위처럼 그녀의 언어는 지고한 완성을 향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언어는 완성의 순간에 허공을 만지는 손끝처럼, 축적된 에너지를 저절로 소진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완성의 욕심에 대한 자성이면서 완성의 완성성에 대한 회의이고 사태 후에나 만날 수 있는 고요한 뒷자리이다.
보았는가, 저 꼼질은 틀림없는 물이렷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모래 노래 아니라
사막 속 윤슬을 켜는 신의 미소 같은 것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대는 물비늘들
가히 홀린 눈썹을 술대 삼는 신기루에
다저녁 물때를 놓치듯 버스도 지나칠 뻔!
잡아보려 다가서면 고만큼씩 멀어지던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했네
- 「윤슬 농현」 전문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취 중의 하나인 이 작품을 보라. 시인은 사막에서 바람에 따라 흐르는 모래의 움직임을 물의 윤슬로 읽는다. 그것은 마치 시신을 어르고 달래 살려내는 마법사의 행위 같다. 죽음의 마당엔 “율”을 이룰 악기의 현도 없다. 사막의 윤슬이라는 모순 형용 속에서 생명의 “물비늘들”은 마치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댄다. 현이 없는 곳에서 현을 가지고 놀다니. 죽음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작업은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는,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의 마당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읽는 것은 오로지 “홀린 눈썹”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홀린 자가 자신을 홀린 대상을 향해 다가갈 때 그것은 자꾸 멀어진다. 이 다가섬과 멀어짐의 “사막 속 윤슬” 어딘가에 삶의 닻들이 내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착각이 삶이다. 시인은 이 착시의 과정을 절정에 이르는 춤사위처럼 접었다 펴고 폈다 접으며 그려낸다. 마침내 그 절정에서 시인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이 착각은 다름 아닌 시 쓰기의 과정으로 전치된다. 결국 시적 화자는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서 헤맨 것이다. 이 마지막 진술 속에서 모든 신기루는 해체되고, 그 폐허의 뒤란에서 엄밀한 진실이 반짝인다. 시인이 하는 일은 바로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하는 것이다. 시인의 작업이 독특한 것은 사막 속에서도 “물의 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