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정말 강의에 오기 싫었습니다. 강의를 듣기 싫은 것과는 결이 좀 달랐습니다. 지난 주부터 몰렸던 일을 처리하느라 쫓긴 탓인지, 한결 같이 한 쪽 어깨를 짓누르는 집안 사정 때문인지 그냥 혼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나눔을 하는 둥 마는 둥.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힘드네, 어렵네.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알아차립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나를 만납니다.
나를 알아차리는 나는 고요함으로 평온함으로 드러납니다. 항상 그자리에 있지만 세상의 소음에 묻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나에게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참 힘들다고, 정말 어렵다고. 나를 바라보는 나는 침묵으로 대답합니다. 김주환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텅 비어있음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득채움으로 텅 비어있게 만든 하루였다고.
본래의 나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의지하지 않는 고요하고 평온한 존재하는 가르침을 되새기니 침묵 가운데 평안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텅 비어있음으로 가득찬 나를 만납니다. 그렇게 힘을 얻고 내일을 다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자본주의가 소비사회를 부추긴다 강조하십니다. 저는 청년세대와 자본을 연결시킬 때 소비보다는 축적이라는 키워드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학교, 더 큰 직장에 다니기 위해 스펙을 쌓고, 결혼하고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과정은 인생을 위해 개인의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처럼, 미디어에 나오는 워너비들처럼 마음껏 소비하는 인생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자본이라는 것은 이름 붙이기 나름 아닐까요. 소위 말하는 '유산'은 자본의 다른 얼굴 아닐까요. 신앙의 유산, 하늘 나라를 상속 받는다고 할 때 우리는 믿음이라는 신앙이라는 자본을 물려 받는 거 아닐까요.
습관, 삶의 관성에도 자본의 속성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저본을 축적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본의 크기가 임계치를 넘으면 자본이 자본을 불러오 듯, 습관도 삶의 관성이 되면 너무 쉬워지죠.
결국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어떤 자본을 쌓으며 살아가냐의 차이이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껏 어떤 자본을 축적하며 살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