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가장자리 오래전 얼어 죽은 감나무를 타고 능소화가 붉습니다. 날이 무더운 까닭에 카페 앞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 하나 없고 이따금 차만 무료하게 지나갑니다. 복지경입니다. 일기예보로는 35도를 훌쩍 넘은지는 오래고 40도까지 갈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하루 종일 냉방기를 가동해 방을 식히고 있지만 마땅치가 않습니다.
이런 무더위에도 텃밭을 수놓는 것들이 있으니 몇 해 전부터 가꾸기 시작한 야생화입니다. 참나리가 꽃잎이 두툼한 오렌지색 꽃을 피워 올렸고, 범부채가 또한 단아한 모습으로 꽃을 매달았습니다. 그 곁에는 금잔화가 범부채의 무릎쯤에 노란 꽃을 피워냅니다. 키 작은 소나무 아래에는 청보라 도라지가 그늘에서 성하(盛夏)를 즐깁니다.
우리 집 빨간 능소화를 보면 한여름 뙤약볕 아래 양산을 받쳐 들고 빨간 구두를 신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중년의 여인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녀는 흰 바탕에 붉은 꽃이 수놓아진 긴 치마를 입었습니다. 한 손으로 양산을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살짝 감싸 안고 염하(炎夏) 속을 걷습니다. 한 번쯤 손수건을 꺼내 땀을 찍어 내거나 부채를 꺼내 바람을 일으킬 만도 한데 이것이 무슨 무더위야! 나의 아름다움만 해? 하며 냉소라도 던지듯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을 보는 기분입니다.
농촌 마을의 여름은 농염은 있을지언정 무더위는 없습니다. 농촌 사람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도 냉방기 정도로 물리쳐야 할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의당 그럴 것이니 겪을 일로 알고 이미 땀에 전 수건으로 이마 한 번, 가슴 한 번 닦는 일로 그만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호사도 모르고 보상도 모르는 무지렁이지만 저녁나절 슬쩍 불어오는 바람에 행복을 느낍니다. 무더위가 있어야 참나리, 범부채의 색깔이 곱고 능소화의 요염과 도도함이 제법임을 알기 때문에 여름을 탓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이곳에 사는 이들은 풀과의 전쟁에 진저리를 치지만 그래서 얻어지는 실한 뿌리와 열매를 맛보는 즐거움을 아는 농부들은 더위 투정을 하지 않습니다.
한낮 무더위가 극성을 떨면 한 소나기 시원스레 지나갈 것 또한 이치인 것을…막걸리 한 잔에 열무김치 한 젓가락이면 복 지경 무더위도 어찌해볼 도리는 없습니다. 무슨 값나가는 고급술을 마주 놓고 냉방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무더위에 밀려서 쫓겨 간 사람들의 궁여지책이요, 궁색함입니다. 우리 마을 누구도 그런 일을 호사라 하지 않습니다. 만금을 주고 하라고 해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은 늘 능소화 같은 삶을 삽니다. 참나리의 싱싱함과 고고함을 일상으로 압니다. 청보라 도라지꽃의 여유작작함을 즐깁니다.
농촌은 늘 이렇게 더운 줄 알아도 더위를 나무랄 줄 아는 찌르레기가 울기 시작하고 초저녁부터 고논에서 개구리가 울면 여름이 깊어진 것입니다. 더위에 못 견디기로는 뻐꾸기와 산비둘기 그리고 소쩍새입니다. 봄밤을 노래하던 놈들은 더위가 올 것을 알아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마을이 온통 조용합니다. 이른 아침으로 새들의 노랫소리가 쟁쟁하다가 햇살이 퍼지면 목청이 처집니다. 새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언제 무더위가 물러갈까 하지만 농촌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건 견디고 난 후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며 여름이 더워 곡식이 익는 것이야말로 그 보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도시에서 짜증스럽게 여름을 나고 있는 사람들이 서둘러 피서를 떠나도 농촌 사람들은 모르는 체합니다. 그것이 호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피서와 무더위를 바꾸고 얻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소나기를 몰고 온 광풍에 어렵게 얻어다 심은 ‘꽃범의꼬리’가 꺾이고, 옥수수가 일제히 반쯤 누웠고, 붉은 능소화 꽃이 우르르 떨어졌어도 오늘은 또 다른 능소화 꽃이 자태를 드러냅니다.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덩달아 나도 그런 모습에 숙연해집니다. 마음속으로는 일으켜 세운 옥수숫대나 무릎이 꺾인 꽃범의꼬리보다 내 마음이 더 안달합니다. 뿌리가 남았으니 내년에 새싹이 돋을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입니다. 나는 도시인도 아니고 농사꾼도 아닌 반거들충이지만 점차로 농촌 생활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능소화가 붉은 꽃을 피워 올리고 텃밭이 꽃으로 소란할 것을 알기에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