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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주일 기획좌담 “선교, 삶의 대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선교사’이다.
하지만 일반 신자들에게 선교, 특히 해외선교는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와는 다른 뭔가 특별한 사람들이 실천하는 소명이란 의식이 여전한 것이다. 또 해외선교를 낯선 곳에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행위로만 한정 지어 바라보는 시선들도 넘쳐난다.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지부장 변승식 신부)는 해외선교사들은 물론 신자 누구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선교 소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영적·물적 연대의 다리가 되어 주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전교 주일(전교의 달) 특별좌담을 통해, 한국 교회 신자들이 해외선교에 관해 올바로 인식하고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공유하도록 돕고 있다.
● 올해 좌담에서는 해외선교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교, 삶의 대화’를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이웃을 찾아가 그들과 같은 문화 ·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해외선교사 삶의 가치와 그에 관한 성찰, 선교사의 삶을 보다 폭넓게 나누어야 할 필요성, 해외선교 활성화를 위해 실천할 과제 등에 관한 다양한 제언이 이어졌다.
● 패널로는 정신철 주교(주교회의 해외선교 · 교포사목위원회 위원장), 변승식 신부(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장), 김성현 신부(전 몽골 피데이도눔 선교사), 강승원 신부(한국가톨릭해외선교사교육협의회 회장)가 참가했으며, 좌담 진행은 주정아 기자(가톨릭신문)가 맡았다. 이번 좌담은 전교 주일에 앞서 9월 8일 인천교구청에서 마련됐다.
# 사회 - 선교사의 열정은 복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올해 전교 주일 담화에서 바오로 성인의 말을 인용해 “복음은 모든 인간의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원천이며, 교회는 이 선물을 인식하고 있기에 지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끊임없이 선포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른 나라 곧, 역사와 문화, 언어 등이 다른 민족들을 찾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해외선교’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 김성현 신부(이하 김 신부) : 사제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열린 존재이기에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몽골에서 선교사로 살아왔는데요, 사실 세상 끝까지 나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는 생각으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모두 각자가 서 있는 곳,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있기를 바라시는 곳이 선교지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이 세상 끝에서 만나는 복음 선포의 대상이지요.
* 변승식 신부(이하 변 신부) : 해외선교는 내가 그들 공동체와 그들 삶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제가 각 본당에 파견될 때에도 다양한 문화적, 환경적 차이를 겪게 되는데요. 항상 그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만약 도시본당에서 사목하던 사제가 시골본당에 갔을 때 수준 차이가 난다는 둥, 신자들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둥, 내 생각만을 고집하며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그릇된 행동입니다. 해외선교에서는 더욱 극심한 문화와 환경 차이를 겪는데요. 해외선교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겠다는, 현지인들이 나를 따라와야 한다는 생각 등에 매여서는 활동에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 강승원 신부(이하 강 신부) : 한때 해외선교는 외국인들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된 삶을 따라, 다른 문화 안에 들어가 다른 민족 형제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해외선교사로서의 기쁨은 어려운 환경을 잘 버텨내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줬다는 등의 단편적인 결과가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함께’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 본 선교사들은 한국에 돌아와도 신자들의 마음을 읽고 대하는 태도가 권위주의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해외선교는 한국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 정신철 주교(이하 정 주교) : 그런데 우리는 왜 해외선교를 우리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선교를 학문적으로만 배웠고, 나 자신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의식을 미처 키우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중요하게 성찰해 볼 부분은 한국 교회가 선교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 교회 사제들부터 스스로가 선교사라는 의식이 부족합니다. 한 사제가 어떤 본당에 파견된다는 것은 그 지역 사회 선교사로 파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를 하는데 그 지역에서 본당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됐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 복음화를 위해 어떤 선교 역량을 펼칠 것인가를 최우선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지요. 하지만 현실을 보면, 사제 스스로는 선교사라는 의식을 잃어버려 선교는 신자나 다른 선교사들이 하는 것이고, 사제는 그것을 운영하고 행정적인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모습이 비일비재 합니다.
# 해외선교사로서의 삶에서 어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먼 곳의 이웃을 찾아갔을 때는 그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근본이 돼야 하는데, 한국 교회 선교 활동은 물질적 지원과 외적 활동에 너무 치우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정 주교 : 하느님 중심인가, 일 중심인가. 선교사들과 대화할 때면 늘 반문하며 강조하는 부분인데요. 많은 선교사들이 낙후된 지역 등을 찾아갔을 때 ‘여기서 선교라는 것은 복음말씀을 나누는 것이냐? 건축을 하는 것이냐?’라는 갈등도 종종 하게 됩니다. 사실 한국 교회도 다른 교회의 지원을 통해 외적 면모를 갖추고 성장해 온 부분이 있습니다. 다양한 선교 역사 안에서 선교지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지역 개발에 나서는 등의 일들은 종종 갈등과 고민을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과 똑같이 오로지 가난하게 사는 것도 어렵고, 그들에게 당장 시급한 물질적 지원을 하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가 물질적 지원을 하게 되니까 한국인 선교사들도 본의 아니게 우월의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지만 계속 올바른 성찰과 식별을 이어가며 하느님 뜻대로 판단하도록 힘쓰는 것 또한 선교 여정입니다.
김 신부 :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다보면 ‘빵’을 안 줄 수는 없습니다. 나만 빵을 갖고 또 먹으면서 이웃에게 안준다는 것은 안 될 일이지요.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빵을 나누니 기쁘고, 그러다 보니 또 빵을 얻어다 나누게 되고…. 그렇게 한국과 몽골을 오가면서 한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하고, 모금한 것을 현지인들과 나누는 일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금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매우 교만한 선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지에서 저는 늘 베푸는 사람, 이른바 ‘왕’과 같은 입장이지요. 반면 한국에 오면 저는 신자들 앞에서 ‘거지’가 됩니다. 낮아지는 체험이지요. 뿐만 아니라 한국 신자들의 정성 어린 나눔에 감동을 받아 저의 굳은 마음을 치유하고 제가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얼마를 모금해서 얼마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좋은 마음이 잘 쓰일 수 있도록 그들과 또 다른 이웃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 해외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내외적 활동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시는 것만큼은 되지 않겠지만, 일반신자들 중에는 ‘해외선교는 돈 없이는 안 된다’라는 의견과 ‘돈을 지원하는 것은 그들의 자립을 도리어 저해시키는 행동’이라는 의견 등이 분분합니다.
정 주교 : 한국 교회가 해외선교에 투자하는 물질적 나눔은 아직 미미한 수준입니다. 돌아보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명동대성당을 비롯해 각 교구 수많은 성당들이 외국 교회 신자들이 동전 한 닢도 아껴 모아 보내 준 덕분에 지어졌습니다. 과거에 받은 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주는 것은 매우 미미하고 앞으로 얼마든지 더 풍성히 나눠야 합니다. 선교사를 통해 물적 지원을 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 선교사를 쓰시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강 신부 : 네, 또 다른 예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모습을 되짚어 보면, 그들은 수많은 땅과 성당을 마련하고 한국 신자들이 자립할 때가 되자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남기고 빈손으로 돌아 나왔습니다. 한국 교회 성장도 나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민족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쓰시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해외선교를 펼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다른 교회와 희망을 나누는 축복으로의 초대입니다.
김 신부 : 저는 선교지 아이들이 한국 교회 신자들이 베푸는 건강한 사랑을 실컷 받고 우량아로 성장했으면 합니다. 나눔의 뜻을 체험한 아이들은 커서 하느님 뜻에 따라 더욱 넉넉히 베푸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적으로는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지원을 받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이른바 ‘거지근성’을 키운다고 고민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선교는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관심이, 체험과 체험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이들은 자연스레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 국내선교와 해외선교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해외선교를 활성화하면 국내선교의 내·외적 활동도 힘을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실제 각 본당 사목현장 등에서는 해외선교 현황을 듣고 선교사들의 삶을 접할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변 신부 : 특히 교구 사제들은 해외선교사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만 고민하게 둘 것이 아니라 해외선교를 나갈 예정이거나 다녀온 이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내외적으로 해외선교사로서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가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해외선교사들의 경험과 의식을 일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신자들과 나누는 장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일반신자들도 단순히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벗어나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필요로 합니다.
김 신부 : 특별히 평신도들은 선교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사제·수도자들은 할 수 없는, 이해도 부족한 부분을 같은 평신도들로서 보다 쉽게 나눌 수 있지요. 현지 신자들도 평신도 선교사들에게 더욱 편안하게 다가가는 면이 있고요. 앞으로 평신도들이 보다 전문적인 양성 지원을 받고, 해외선교 역량을 한국교회 안에서도 보다 폭넓게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강 신부 : 특별히 평신도들은 선교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사제·수도자들은 할 수 없는, 이해도 부족한 부분을 같은 평신도들로서 보다 쉽게 나눌 수 있지요. 현지 평신도들도 평신도 선교사들에게 더욱 편안하게 다가가는 면이 있고요. 앞으로 평신도들도 보다 전문적인 양성 지원을 받고 활동하고, 해외선교 역량을 한국교회 안에서도 보다 폭넓게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 선교가 우리 삶 안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고 특별히 해외선교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시대 해외선교사가 꼭 갖춰야 할 의식, 태도, 역량 등에 관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김 신부 : 해외선교사들이 구체적인 활동에 나서기 전에 현지어를 익히고 현지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길 바랍니다. 선교사가 현지에 파견된다는 것은 곧 그 선교사가 새로 탄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지요. 머리 큰 어린이로 살기보다는 머리도 마음도 언어능력 등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현지인들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우선적인 마음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 신부 : 네, 무엇보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준비가 필수적입니다. 특별히 본인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더욱 잘 발휘하자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해외선교를 나가게 되면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잠재력도 발견할 수 있는데요. 힘겨운 상황을 겪어 내며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등의 과정에서 그러한 잠재력은 더욱 큰 힘이 됩니다.
변 신부 : 하느님께서 우리 일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돕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확신하는 마음을 더욱 단단히 가지길 바랍니다. 또한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에서도 신자들이 해외선교사들의 활동에 관해 더욱 잘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 만나고 경험 등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더욱 다채롭게 마련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입니다.
정 주교 : 우리 스스로가 먼저 복음화돼야 합니다. 설사 해외선교에 나서지 않더라도, 어떤 소명을 실천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내가 바로 선교사’라는 의식이 부족하면 올바로 활동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 사제들의 선교의식을 보다 확고히 해야 할 때입니다.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되새기고 먼저 복음화되어 사목을 실천할 때, 어디에서든 기쁘게 사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와 문화] 현대 세계의 종교적 흐름: 세속화, 근본주의, 뉴에이지
밀레니엄이라는 새 천년기의 변화 속에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가 도전받고 있다. 그중에서 종교가 변화의 가장 큰 관건이다. 형태와 내용에 있어 크게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변화의 세 가지 축을 꼽으면 세속화, 근본주의, 뉴에이지이다. 각각 독립된 주제이면서도 상호 연결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이런 현상들을 직시하지 않으면 미래 후손들은 하느님의 영역을 의심하거나 종교적 제도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이 세 가지 종교적 흐름을 살펴보자.
* 먼저 세속화 현상을 보자. 물론 세속화는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실제 종교가 위치하는 곳은 성(聖)과 속(俗) 양자 사이의 어디쯤이다. 인간이 영적인 가치를 따라가면 성의 영역이 넓어지고, 세속의 가치를 우선시하면 속의 영역이 넓어지는데, 세속화란 바로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곧 종교가 지니는 영적 가치보다 육체적, 물질적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 신앙인들에게 주말은 신앙을 통해 신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주5일 근무제 실시 이후 주말은 운동과 여가 활동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산업화와 과학화를 통해 인간은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시공의 탈성화(脫聖化) 현상은 극단적인 인본주의 경향을 노출하면서 속에 다가갔다. 신의 영역이 자꾸만 줄어들더니 어느 날 “신은 죽었다”고 외치자 사람들은 이제 신에게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한 학생이 아버지가 출장을 가자 해방감에 쾌재의 콧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의 존재와 가치가 집안에서 제거되기를 바라는 이 아이와 하느님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려는 현대인들이 무엇이 다를까? 세상에서 하느님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하느님이 창조하지 않은 생물들이 인간의 조작으로 생겨나 창조 질서가 어지럽혀진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는 감자가 열리고 줄기에서는 방울토마토가 열리기를 희망하는 세대이다. 황금을 좋아하다 껍질마저 샛노란 황금수박을 만들었다. 신의 비밀로 여겨지던 유전자 지도도 해석해 냈다. “하느님! 만약 계시더라도 안 계신 것처럼 조용히 계셔 주십시오. 우리 인간들, 잘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현대인은 세상을 인본(人本)의 영역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어느 광고 문구가 이를 잘 나타낸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 신의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세속화이다.
* 종교적 근본주의는 신앙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고정시켜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를 이데올로기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보수 경향을 띤 사람들이 미래와 진보에 대한 극단적인 염려 속에 과거 지향적 광신을 주장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 농후한 이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에 더디고 변화에 둔감하여 현대 질서와 가치 체계, 곧 자유, 개성, 개인, 대화, 쇄신, 쾌락, 물질 등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인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39)
동서의 냉전이 사라진 현대 세계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문제되는 것은 두 근본주의, 곧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이다. 새 천년 벽두부터 이 양대 세계의 근본주의자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폭력, 테러, 전쟁 등을 벌이고 있다. 9.11테러, 보복 전쟁, 탈리반, 민족 청소, IS의 폭력과 문화 혁명, 무함마드 만평과 그에 따른 만평성전 등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이 대두되는 이유는 신이슬람 세력의 증가와 확대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시대를 제2전성기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는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 공포증)라는 신조어까지 낳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이슬람 인구는 약 16억 명으로 보고 있는데, 세계 인구의 25%를 차지하면서 종교의 두 번째 위치를 확보했다. 2025년이 되면 무슬림이 20억 명이 되어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며 첫 번째 종교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현상에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위기의식을 표출하면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로 맞불을 놓고 있다.
* 다음으로 직시해야 할 문제는 뉴에이지이다. 뉴에이지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가치를 제거하려는 신영성운동이다. 21세기의 새 시대 별자리는 물병좌이다. 한 남자가 물병을 기울여 물을 붓는 모습의 별자리이다. 과거 물고기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가 새 시대에 부어지고 있으니 새 포도주를 마셔라.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겨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뉴에이지 추종자들이 말하는 가치와 정신은 인간의 자아 성취를 말한다.
뉴에이지는 현상이다. 현상이니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음악, 춤, 연극, 명상 등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 뭐 그리 큰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신과의 합일, 자연주의, 반전 평화 운동 등은 더욱 그렇다. 수녀원이나 신학교에서 아침 묵상 시간에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이나 엔야의 음악을 틀어 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겉으로 들리는 느낌은 평화스럽고 잔잔하니 영혼이 고양되는 것 같고 평화로운 마음이 솟아나는 것 같다. 그러나 뉴에이지 문화의 폐해는 생각보다 깊고 넓다.
그렇다면 뉴에이지 현상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종교는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종교와 신앙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의 말씀이다. 타볼산에서 느낀 평화, 신비, 안락함,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이 종착해야 되는 가치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에 이르는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이것에 취해서 천막을 치고자 하는 베드로 사도를 주님께서는 사탄이라고 부르셨고, 엄하게 꾸짖으시며 내려가자고 말씀하신다. 이 뜻은 인생은 참된 평화와 행복, 평안과 휴식만을 취하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나아가야 하는 ‘파스카적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뉴에이지의 음악이 지친 삶의 현장에서 돌아와 잠시 듣는 음악이라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추구하는 가치가 무사안일이요, 나만의 평화라면 수도자의 삶은 사치일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겪는 땀과 노력, 경쟁, 위험, 불안 등이 빠진 위안, 평안, 휴식, 영혼의 고양은 자기 속임수일 수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듣다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어 보아라. 삶이 그렇게 녹녹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세계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그 신이 바로 나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 추종자들의 정신세계는 바로 극단적인 이기주의, 불간섭주의, 무정부주의, 무신론적 유물사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동체, 친교, 희생, 사랑이라는 가치와 질서가 우습게 들릴 것이다. 내가 구축해 놓은 재물과 시스템에 해를 입힐까 두려워 통일, 민족의 화해와 공존, 공영이라는 가치를 외면하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뉴에이지의 추종자가 된 셈이다.미래 세대에 종교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걱정된다. 종교의 변형과 세속화는 불 보듯 뻔한데, 거기에서 종교가 어떤 모습으로 생존을 추구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그 변화의 추이를 지켜보며 올바로 대처해야 한다.
[선교와 문화] 종교 간의 대화, 정말 가능한 것인가?
어느 대학에서 주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주제는 종교 간의 대화였다. 각기 다른 종교의 대표자들이 나와서 입장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발표는 주제에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모두 자신의 종교에 대한 선교 전략과 호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말했지만 대화를 위해서 양보하고 타 종교의 신발을 신어 보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교 간의 대화 역시 넓게는 선교 전략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각 발표자들과 함께하는 토론의 장이 열렸다. 그러나 토론을 하는 중에 다툼이 있었다. 먼저 기독교 측에서 불교의 신관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하면서 스님의 화를 돋우어 놓았다. 토론은 점차 격렬해지다가 급기야 삿대질까지 벌어졌고 결국 국제적 망신을 당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 세미나는 끝이 났다. 그때 느낀 것이 종교 간의 대화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말은 종교 간의 대화라 하지만 그 속에는 각자 자신의 종교를 우선시하는 우월주의가 숨어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배타주의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각기 자신의 선교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간의 대화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또 한계성도 있음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부부 간에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경우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푸는 방법을 통해 종교 간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부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부가 상대의 인격과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가정이 평화로워지듯이 종교 간의 대화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긍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각자의 개성 속에서 공동선,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부부는 각자의 종교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지만 가정에 돌아와서는 가족이 지니는 존재와 삶의 방식에서 공통점을 찾고 실현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종교가 지향하는 종교적 진리, 가치, 이상을 가정 안에서 강요하거나 배우자의 종교를 폄하해서는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 제사 문제로 명절 때마다 갈등을 겪고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 종교적 행위는 근본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도 공존과 평화를 위해 공통분모를 찾아내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나 평행선 속에서 긴장과 대립을 겪게 될 것이다.
셋째, 자녀의 종교 선택 문제이다. 부모의 종교가 다를 때 자녀의 종교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양쪽 모두 평행선일 경우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자녀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종교를 선택하도록 성숙한 자세로 기다리는 게 좋다. 타 종교와의 대화에서 결국 선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아전인수식의 태도나, 비방, 모략 등의 선교 전략은 세상을 평화로 이끌 수 없다. 타 종교와의 선의의 경쟁은 서로 존중되고 인정되어야 하지만 결국 자유로운 의사 결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를 전략적이고 공격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종교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원론적인 측면 같지만 이것이 종교 간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 스승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친분 관계에서 종교 간 대화의 원칙과 실제를 읽어낼 수 있다. 우선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속한 종교적 가치와 삶의 방식에 충실하였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고 인류애라는 공동선을 지향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고 평화를 견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대화와 존중의 길에서 서로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석탄일에는 성당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성탄절에는 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현수막을 서로 내걸었다. 길상사 개사식 때는 법정스님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축사를 했다.
길상사의 관음상은 종교적 심성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절제된 여인의 미를 승화시켜 경건하고 단아한 한국적 아름다움이 우러나오는 석조각상이다. 그런데 절에 세워진 관음상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면 성모상을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난 1999년 법정스님이 천주교 신자인 동갑내기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의뢰해서 길상사 마당에 만든 것이다. 법정스님이 종교간 화합을 위해 천주교 조각가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종교계를 포함해서 세상에는 이런 저런 경계와 벽이 있지만 위 두 분에겐 종교 간 갈등과 편견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종교 간 대화를 실천하신 모범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사용한 ‘종교 간의 대화’ 문제가 타 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학자들도 이러한 주제 아래 논문을 발표하였고 세미나도 적지 않게 열렸다. 그러나 본인 역시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글을 쓰고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바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단어가 지니는 한계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이론과 실제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폭넓게 문화라는 영역에 편입될 수 있다. 문화는 유기체이기에 생로병사 현상을 지니고 있으며 각 종교마다 지니는 감성 지수 역시 다르다. 어떤 종교는 타 종교 문화에 대해 비교적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inclusivism) 어떤 종교는 매우 배타적인(exclusivism)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은 각 종교는 본성상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장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종교는 선교적이고(propaganda) 전략적이라는 말이다. 제도적 종교일수록 그 지수는 확산성 종교에 비해 강하게 표출된다. 한국의 5대 종단들이 모여 종교 간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예외 없이 모든 종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확대하려는 선교 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 간 대화를 논할 때 그 개념과 범위를 제한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만물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나와 너’는 상호관계에서 자아를 인식하고 타자를 인식하는데 다름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것을 ‘부동이화(不同而和)’라 말할 수 있다. 곧 서로 다르지만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할 때 만남이 이루어지고 ‘나와 너’는 성숙되며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만남의 시작이요, 관계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종교의 두 요소인 초월과 내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초월적 요소는 그 종교의 정체성(identity)을 결정하는 교의를 말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매우 민감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종교 간 대화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면 해결보다는 충돌의 여지가 많다. 반면, 내재적 요소는 종교 문화, 곧 전례를 말한다. 이것은 가변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이다. 각 종교 간 공통분모는 여기에 있고 이것이 종교 간 대화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다름이란 정체성, 곧 각 종교마다 지니는 불변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를 말하는데, 교의(dogma)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반해 조화는 모든 종교가 지니는 보편적인 요소로서 공통분모(공동선)에 해당되는 정신적 가치들과 이를 표현하는 문화적 요소(祭儀)를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상황적이며 가변적이다. 그러니까 종교 간 대화를 할 때 정체성에 해당되는 불변적인 요소를 피하고 유연성이 많은 주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교 전략을 접고 동일한 삶의 공간인 사회에서 공존하려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만남이 깊어지고 승화되면 비로소 다음 단계인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치를 이루고 있지만 역시 다름을 발견하고 인정할 때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문화의 만남에는 충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충돌 안에서 융합되기도 하지만, 대체(replace)되기도 하고, 극복(overcome)하기도 하며, 정복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그러나 화이부동으로 존재할 때 인류의 문화는 더욱 더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진정한 종교 간 대화는 세상에 다른 꽃들이 함께 피어 더 아름다워진다는 진리를 배우면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