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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 1-3)
어떤 목사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문에 들어서자 사도 바울이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와 그를 반갑게 맞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열심히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위시하여, 한 작은 교회를 2,000명이 넘는 대교회로 성장시켰다는 등의 자기 P.R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네, 네, 목사님 잘 압니다. 여기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목사님을 위한 공부는 많이 하셨지만 하나님을 위한 공부는 하시지 않았군요."라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가우뚱하자, "목사님이 하신 신학공부는 저 세상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천국에서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 보십시오. 천국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 말을 들은 목사가 둘러보니 천군천사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자 목사님 다시 세상으로 내려 가셔서 이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부를 하고 오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이 너무 아름다워 내려오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 꿈을 깼습니다. 그 후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교회가 뜨겁게 부흥하더라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
먼저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성경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왕상10:9)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하고”(대상29:20)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느9: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 1- 22)
우리가 누구에게 송축하며 송축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종으로 억압을 받던 자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6: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당부합니다. 애굽의 강대함에 대하여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십니다. 연약한 백성임에도 약속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번성하였지만 스스로 압제를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출14:4), 열 가지 재앙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들의 재물을 취하여 나오게 하셨습니다. 광야길을 통과하게 하셨고, 마침내 가나안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하는 사실은 광야의 힘겨운 과정을 자기의 힘으로 이룬 줄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동행하던 발자국이 고난의 과정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그 때는 어디에 계셨느냐고, 무엇을 하고 계셨기에 홀로 버려두셨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없어서 그 고통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럼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 베푸신 은혜를 송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그 입술에 찬양을 통해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구원하신 예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죄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는 모든 죄를 담당하심으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공평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기는 사랑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내면적인 외적 고통까지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과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셨습니다. 죽음에 매일 수 없는 감격, 새로운 생명을 얻은 기쁨을 노래해야 합니다.
셋째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송축해야합니다.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 관을 우리에게 씌워주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심으로 좋은 것으로 나의 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독수리처럼 새롭고. 힘이 넘치게 하십니다. 독수리는 매년 새로운 털 갈이를 통하여 최상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날개는 40년 정도를 사용하면 모든 것이 무디어 집니다. 다시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독수리는 부리를 바위에 쪼아서 트립니다. 새로운 부리가 나오면 발톱을 뽑습니다. 40년 동안 사용해왔던 날개의 굵은 깃털을 뽑아냅니다. 새로운 발톱이, 새로운 깃털이 나오게 되면 청년과 같이 새롭게 하늘을 누빕니다. 매년마다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청춘처럼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8-30)
모든 인생이 후패하여지지만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성도는 날로 새로워집니다. 곤비하지 아니하고, 피곤치 아니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인하여 송축해야 합니다.
이 시편은 순례자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근무하는 제사장들과 화답하는 노래입니다. 비록 길이는 짧지만 그 내용은 아름답고 웅장하기조차 합니다. 더구나 밤중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헌신하는 제사장들과 순례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열심 있고 진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몰두해야 될 때이지만 세상일에 빠져서 살기 쉬운 때입니다. 밤에도 여호와를 송축하는 제사장들처럼 늘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시147:12-14)
순례자는 성전으로 가서 성전을 지키는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향하여 하늘의 축복이 시온으로부터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그는 시온의 산 언덕을 오른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에 오른 순례자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이 날은 가을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남녀노소가 한 데 모여 산 위로 빛이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성전에는 흥분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늘을 껴안듯이 두 팔을 벌리고 산 너머를 바라봅니다.
불과 3절로 된 짧은 노래지만 예배의 부름과 설교 그리고 축도를 갖춘 노래입니다.
1절은 예배의 부름(the call to worship)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오라(Come)라는 말이 없고 Hinneh라는 말이 있는데 영어로 Behold(보라)라고 번역합니다.
RSV 성경은 “Come, bless the Lord(오라 여호와를 송축하라)”라고 시작하는데 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합니다.
순례자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라고 했는데 제사장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제사장들은 이미 하나님께 드릴 제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양들을 불에 태워 연기로 하나님께 바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서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옛날 성전에는 야간 근무를 하는 여호와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직장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종들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에게는 이런 제사장들의 모습이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밤을 지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축복한 노래가 이 시편입니다. 밤은 안식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어두움의 권세자가 활동하는 시간입니다. 어두움의 영들이 밤에 기승을 부리고 많은 죄악의 역사가 밤에 쓰여집니다. 사단은 밤을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그의 부하들은 날개짓을 하며 온 세상 어두운 골목들을 방문하여 어두움을 인위적인 빛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인생들은 이 미혹을 알지 못한 채 어둠에 빠져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런 밤에 깨어 일어나 손을 들고 송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찬양과 기도로 밤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밤에 성령께서 모든 어두운 세상의 공간들을 참된 진리의 빛으로 비추시기를 간구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어둔 밤 쾌락의 허무를 깨닫고 성전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밤을 기도로 지새우는 종들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 성전은 성령을 모신 모든 성도들의 육체입니다. 이 시대의 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성전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 처소에서 때로 우리는 밤을 지키는 전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우리의 교회,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자녀들은 이런 밤의 전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때 우리는 밤을 지키는 여호와의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2 ~ 3 절을 읽겠습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는 현재 다섯 개의 교회가 서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나병 환자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은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 바닷가에서 모래를 퍼 나르는데, 힘도 없고 불편해서 숟가락으로 모래를 퍼 담았습니다. 그것도 손가락이 제대로 없고 움직여 주지 않으니 손목에 숟가락을 붙들어 매야 했습니다. 한참 모래를 푸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다가 이 모래가 다 없어지면 어디서 또 퍼온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바닷가에 나간 할머니는 안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파도를 시켜서 더 많은 모래를 해변 가득 갖다 놓으셨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교회당을 짓는 일에 많은 정력을 쏟아왔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벽돌 한 장을 나르고 땀 흘려 노력하는 것 없이 헌금만 하면 건축업자들이 다 지어 주는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교회 건축 후에는 입당을 하고 헌당을 해도 감격이 적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고 그분을 찬양하면서 힘을 다해 노력하고 난 후에 입당해서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의 눈물이 솟을 것입니다.
2절은 설교입니다. 가장 짧은 설교지만 궁극적인 내용입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는데 바꾸어 말하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제127편의 첫 절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헛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도록 준비하라는 설교입니다.
2절에서 “성소를 향하여”라는 말씀에 유의합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지하철역이면 어떻고, 학교 교실이면 어떻고 회사 사무실이면 어떻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소를 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소를 향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향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찬양의 기쁨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소를 향하여 찬양합시다. 하나님께 이 찬양을 올려 드립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시28:2)
3절은 축도(benediction)에 해당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시온에 온 순례자들을 축복하신다는 위로의 말입니다.
성전봉사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순례하기 위해 올라온 순례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를 ‘시온’으로 언급한 것은 시온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는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시132:13, 14)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송축하는 우리 모두에게 복주시기를 언약하였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 1- 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8:1~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송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