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포(薺浦)’ 한시(漢詩)편 1.> 총4편 中
제포(薺浦)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는 포구이다. 『경상도 지리지』와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는 ‘내이포(乃而浦)로 나오고,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는 ‘제포(薺浦)로 나온다. 지역민이 말하길, ’개(포구) 주위에 냉이가 많이 나 있어서 ‘냉이개로 불렀다’한다. 처음에는 ‘내이포로 차자(借字) 표기하다가 뒤에는 ‘냉이 제(薺)’자를 써서 ‘제포’라는 한자어로 굳어졌다. 일설에서는 ‘남쪽에 있는 개’로 풀이하기도 한다.
제포성지는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군만호진을 처음 설치하였고, 조선 전기 성종 때는 경상도 우수군이 머물 수 있는 군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수군은 배 위에서만 방어한다는 원칙이 성종 때에 무너지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등 22곳에 수군진영을 만들었는데, 이 성은 성종 16년(1485)에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성터는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도록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자연석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문 밖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작은 성이 있으며, 성벽 주변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못을 파서 돌렸다. 조선 초기에는 우도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어 안골포(安骨浦)·사량(蛇梁)·당포(唐浦)·영등포(永登浦)·옥포(玉浦)·평산포(平山浦)ㆍ적량(赤梁) 등을 관할하였으나, 뒤에 절제사영이 부산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수군만호가 남게 되었다.
● 1443년(세종 25)에 계해조약에 의하여 왜인들에게 삼포(三浦: 부산포·제포·염포)의 왕래를 허가하였다. 왜인들의 상주를 불허하였으나 그들이 상주를 간청하므로 포구마다 왜관을 설치하여 60여 명 정도만 거주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의 상주 인구가 점점 늘어 제포에만 500여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여러 가지 충돌이 잦게 되자 왜인들의 단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1510년(중종 5)에 왜인들이 대마도의 원병과 함께 난(庚午亂)을 일으켜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세조(金世釣)를 살해하고 제포와 웅천(熊川)을 점령하였다. 정부에서 급히 토벌군을 보내어 왜인 300여 명을 참획(斬獲)하여 제포성을 복구하였다. 그 뒤 한동안 왜인들의 거주를 허가하지 않다가 부산포와 함께 이들의 거류를 허가하였다. 제포진은 하나의 큰 성으로서 주위가 4,000여 척이나 되었다.
1) 제포 조종각 차운[薺浦朝宗閣次韻] 二首 / 김극성(金克成 1474∼1540) 경상도병마절도사 경상도관찰사
肉食何人作翰蕃 어떤 사람이 육식을 하며 울타리를 만들었나?
大城如鐵自崩奔 철옹성 같은 큰 성이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胡雛負漢誠無日 되놈이 한나라를 등지고 참으로 태양을 무시했지만
一節先須顧主恩 한마디로 천자의 은혜를 먼저 돌아보아라.
1510년 삼포의 왜노가 배반하여 웅천 제포 영등포 부산 4개 성이 함몰되었다고 전한다.(庚午 三浦倭奴叛 態 薺 登 釜四城 一時陷沒 故云)
瘴雨連陰惜未開 연일 흐린 축축한 비가 내려도 안타깝게도 날이 개이지 않는데
白梅凋盡摘靑梅 흰 매화꽃은 시들어 푸른 매실을 따노라.
樓臺到處江山好 누대가 도처에 있어 강산이 참 아름답지만
不見家書一月來 한 달 가까이 집의 편지를 보지 못했네.
[주] 조종각(朝宗閣) : 조선후기 봄과 여름에 지방관이 천자(天子)나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집.
2) 제포 조종각 차운[薺浦朝宗閣次韻] / 김극성(金克成 1474∼1540)
君王綬遠正如天 군왕은 마치 하늘같아 먼 땅까지 편안케 하니
禍患從知不在邊 재앙과 환난은 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아노라.
戍卒散爲緣畝卒 변경의 군졸이 흩어져 농사를 짓고
戰船閒作釣魚船 전선은 한가하게 낚싯배가 되었구나.
詩翁自古輕新貴 늙은 시인은 예로부터 새로운 귀인을 가볍게 여기니
醉客于茲傲瘴煙 이곳에서 취한 나그네는 축축한 안개 속에 노닐었다.
風雨一尊何處笛 비바람 속에 어디선가 한 가락 피리소리 들리는데
寸心非石不能堅 한 치 마음은 돌이 아니니 견고할 수 없다네.
● 황준량(黃俊良)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서정적인 유선(儒仙)의 풍류를 이어받아 자신의 시속에다 선계(仙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는 성현의 긴요한 말씀이 담긴, 작은 첩(帖)을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1551년에는 경상도감군어사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됐다. 다음 한시 2편은 이 당시 경상도 순행 중에 지은 작품으로써, 그의 문학적 특색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3) 제포에서 배를 띄워[薺浦泛舟] 계아 상공(백규)와 술에 취해(與季雅相公伯圭 醉和)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江天上下鏡磨光 강 위의 하늘 아래위로 거울 빛에 비추 듯하니
賓主談鋒動夕陽 주인과 손님의 대화에 ‘석양이 흔들린다’ 하네.
豈必風流無謝傅 도대체 사부(謝傅)의 풍류(風流)가 뭐라던가
方知詩賦有曹郞 비로소 시(詩)와 부(賦)가 조랑(曹郞)에 있음을 알겠네.
輕鷗緩泛隨歸楫 가벼운 비둘기가 느릿느릿 돌아가는 배를 따라오며
落絮晴飛拂豔粧 곱게 단장하느라 몸을 비트니 떨어지는 솜털이 맑게 날린다.
物色樽前輸醉墨 술독 앞의 물색들 보고 취흥에 글을 쓰는데
南來誰復歎空囊 누가 다시 남으로 와서 빈 주머니(詩囊)를 탄식하랴.
[주1] 사부풍류(謝傅風流) : 사부는 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을 가리킨 말로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퇴하여 기녀의 손을 잡고 산수를 즐겼던 일을 말한다.
[주2] 조랑(曹郞) :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제포(薺浦)는 지금의 진해(웅천)의 한 포구이다. 1551년 양 4월20일 곡우날, 마침 웅천(熊川) '곰(熊) 신(神)'이 만조를 만드니 정박한 배를 띄울 수가 있었다. 거제 영등포에선 '영동 할미' '영등신(嶺登神)'이 바람을 일으켜, 제포에서 구영등포(장목면)를 향해, 쏜살같이 나아간다. 석양 속 구름일고 바람 불어, 돛단배 깃발 나부끼며 빠르게 전진하는데 동풍에 파도일어나 갯바위와 해오라기를 때린다. 저 멀리 바라본 수평선엔 작은 섬들이 아득하게 미혹하니, 선생은 문득 이 광활한 풍경에 빠져, 속세의 모든 걸 내려놓고 "신선의 영약이나 찾아 떠나볼까?" 현혹당한 마음을 내비친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포(薺浦)’ 한시(漢詩)편 2.> 총4편 中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동 제포(薺浦)는 조선시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제포 앞 바다에는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 칠천도, 영등포가 있어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과 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제포는 웅천 뿐만 아니라 창원을 방어하고 마산포의 조운(漕運)을 돕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부근에 사화랑(莎火郎) 봉수가 있었고 보평역(報平驛)을 통해 김해ㆍ창원ㆍ안골포 등과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1908년에 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창원군에서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이후 2010년 7월에 진해시가 창원시에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로 편입되었다.
● 제포(薺浦)는 부산포, 염포와 함께 삼포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1407년 부산포와 함께 왜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이후 점차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조선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아졌다. 마침내 1510년(중종 5)에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삼포왜란), 제포첨사를 살해하고 이곳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 왜란으로 인해 삼포의 왜관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국교가 회복되면서 제포만 다시 개항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개항장들은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 관계 변화 속에서 치폐를 거듭하면서도 조선말까지 부분적으로 계속 존속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방 제포진(薺浦鎭)에 따르면, 우도 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관할하는 곳은 안골포(安骨浦)ㆍ사량(蛇梁)ㆍ당포(唐浦)ㆍ영등포(永登浦)ㆍ옥포(玉浦)ㆍ조라포(助羅浦)ㆍ평산포(平山浦)ㆍ적량(赤梁)이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는 4천 3백 13척이며 성안에 우물 둘이 있다. 첨절제사 1명이다. 안골포 영(安骨浦營) 현(縣)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는 1천 7백 14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성안에 시내 하나, 우물 하나가 있다. 수군만호 1명이다. 회원루(懷遠樓)ㆍ수항루(受降樓)ㆍ조종각(朝宗閣) 모두 제포(薺浦)에 있었다.
4) 제포로부터 영등포로 건너가며[自薺浦渡永登]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薺浦城邊穀雨晴 제포성 변방엔 때가 곡우인지라 날이 개이고
熊神江口晩潮生 웅신(熊神,곰신)이 강구에다 만조를 일으킨다.
旗翻西日山雲亂 나부끼는 깃발, 서녘에 기운 해, 산 구름 어지럽고
帆駃東風海若驚 동풍에 돛단배 질주하니 바다가 놀란 듯,
巖老舂撞稜角瘦 거센 물결에 익숙한 바위는 뾰족한 모퉁이 오뚝 세우고
鷺新澡雪羽儀明 해오라기는 물로 씻어 단장하니 날개 깃털 깨끗하다.
遙看一髮徐生島 멀리 수평선 모든 섬이 한 올의 머리카락처럼 아득한데
想得求仙採藥行 생각건대, 신선을 찾아서 약초나 캐러 갈까.
5) 제포운[薺浦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로 1581년 1590년 두 차례 순행함.
牙旌揮罷瘴煙開 대장 깃발이 휘날리고 축축한 안개가 걷히니
畫角吹殘響小梅 소매(小梅)가 부는 화각 소리 울린다.
寄語海山能記未 바닷가 산이 말하노니, “이해할 수 없어라
十年前客又重來 십년 전 나그네 또다시 왔으니“
[주] 소매(小梅) : 초라니. 나자(儺者)의 하나. 기괴한 계집 형상의 탈을 쓰고 붉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고 긴 대의 깃발을 흔듦.
6) 제포 조종각에 차운[次薺浦朝宗閣]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羈懷千里苦難開 천 리 나그네 회포,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一篴無端落盡梅 무단한 한 피리소리, 매화꽃도 다 졌어라.
賴是朝宗高閣在 머무는 여기에 고상한 조종각(朝宗閣)이 있어
海山蒼翠入簾來 바닷가 산의 푸르름 속, 주렴 안으로 들어간다.
7) 웅포의 배를 불러 제포를 우회했다[熊浦招舟 迂廻薺浦] / 윤순거(尹舜擧 1596∼1668)
亂石盤泥江路微 자잘한 돌과 진흙이 강 길을 덮고 있고
倦僮羸馬趁西暉 게으른 아이는 피곤한 말을 서쪽 노을을 향해 끌고 간다.
寒潮故逐丹霞落 차가운 조수가 짐짓 떨어지는 붉은 노을을 뒤따르니
暝帆還隨白鳥飛 저물녘 돛단배도 날아가는 흰 새를 따라 돌아온다.
8) 제포(薺浦)에서 배에 오른 뒤에 절제사(節制使) 이각(李恪)에게 써서 올림 2수 / 송희경(宋希璟 1376~1446)
聖代文明服遠人 성대의 문명이 먼 나라 감복시켜
元戎無事唱詞新 원융이 일 없어 노래가 새롭구료
綠波平漫檣竿立 푸른 물결 잔잔한데 돛대가 서니
恰似江南楊子春 강남의 양자강과 봄 경치 흡사하이
小梅芳草思依依 어린 매화꽃다운 풀 마음 설레니
正是春風二月時 때는 바로 봄바람 이월이라네
若識歌兒嫌起舞 노래하는 계집아이 춤추기 싫은 줄 알았더라면
酒杯何必擧遲遲 술잔을 어이 천천히 들었으랴
이 절제(李節制)가 술자리를 열어 전별하는데, 기녀(妓女)를 부르니 기녀가 더디 나오므로 희롱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 원융이 일 없어 : 원융(元戎)은 본디 대중 혹은 대병(大兵)의 뜻이나 여기서는 대병 즉 전쟁이 없어 대병이 태평성대를 만나 한가롭다는 뜻.
9) 웅천강을 다스리며(除熊川江) / 강호문(康好文) 고려 공민왕 時, 웅천지역 수령.
江水茫茫入海流 강물은 흘러 아득한 바다로 들어가고
靑山影裏一扁舟 푸른 산 그림자 속에 한 조각배 지나가네.
百年南北人多事 남북 백 년 동안 많은 일로 살았는데
只有沙鷗得自由 오직 모래밭 갈매기만 자유를 누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