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성한 삶을 위한 원리-태도의 문제다(마 8장28-34)
성경본문: 마태복음 8:28-34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연예인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람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김병만’이라는 개그맨을 선택할 것입니다.
예전에 개그 콘서트에서 ‘달인’이라는 코너를 했는데,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
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재능이 많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노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를 통해 더욱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그가 쓴 책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습니다]에 보면 정말 은혜가 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챕터 제목들인데 이런 것들이죠.
* 단점을 탓하기보다 단점 때문에 더 노력한다.“
* 시도하는 것이 가능성이다.“
* 실수는 해도 포기는 안 한다“.
* 세상의 중심에는 노력한 자가 있다“.
*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 달인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 도전은 한계를 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사실 김병만이라는 사람은 연예인으로서 핸디캡을 가진 사람이죠. 키도 작고 잘 생기지도 않고,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부족하다고 노력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연예인도 이 세상에서 성장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데, 우리는 주어진 삶에 헌신하기 위해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이재기 목사의 [하나님의 사역레슨]에 보면 그가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인 1992년 텍사스 레인 저스의 투수 놀란 라이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텍사스의 새로운 에이스로 왔을 때 나이가 만으로 44살입니다. 야구선수로서 고희를 넘긴 나이죠. 그런데 그 선수가 그 나이에 2년 연속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습니다. 한 게임에 스트라이크 아웃을 열 몇 개씩 잡고 완봉승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 때 스포츠 캐스터가 중계방성을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선수는 그저 나이만 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
가장 멋진 칭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신실함이 아닐까요?
정말 프로다운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우리가 프로가 된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늘 좋아지려고 애쓰는 프로다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죠.
대충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늘 신실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생각해 봄 직한 일입니다.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이 일주일에 6일은 아주 성실하고 하루만 빼먹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쓸 수 있을까요?
우리가 타는 차를 생각해 보세요.
6일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딱 하루만 문제가 생깁니다.
그 차를 믿고 탈 수 있을까요?
지난 해 차를 바꿨습니다.
요즘 차는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전자 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10년 가량 탔는데, 그렇게 많이 타지 않았는데, 갑자기 전자 장치에 문제가 생겨 주차장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견인을 해서 고쳤는데,하루는 운전을 하는 중에 의자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기저기를 누르다 보니 운전 중에 의자가 앞으로는 당겨졌는데, 더 이상 뒤로 가지 않아 핸들을 붙잡고 바짝 붙어서 운전을 했습니다.
두 번 그런 일을 당하고는 차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실함’과 ‘신실함’이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서론이 무척 길었는데,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8장 28-34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 두 명을 만나셨고 그 귀신들을 쫓아내는 장면입니
다.
문제는 예수님은 귀신을 그냥 내 쫓은 것이 아니라, 돼지 떼에게로 귀신을 몰아내신 것입
니다. 그러자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바다에 들어가서 몰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일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자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 귀신들린 자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 귀신들린자들은 사납고, 때로는 벌거벗은 채로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귀신의 문제를 해결하셨을 때 이들은 그리 기쁘지 않았습니다.
34절 말씀.“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 하더라”
오히려 예수님을 찾아가 떠나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그들이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떠나 달라고 하는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 진대 돼지 떼에 들어보내소서 한 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 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귀신은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돼지는 결코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돼지들이 몰사하자, 자신들이 귀신들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 일은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이 눈에 들어온 것이죠.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돼지 떼가 몰살한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들의 삶에서 적용할 부분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중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이죠. 또한 문제를 직면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댓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풍성함’을 누린다는 것은 모든 환경이 우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 가운데 어떻게 풍성함을 누릴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그 풍성함의 원리 가운데 ‘태도의 문제’는 그런 것입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만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한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문제는 은혜를 구하지만 은혜를 받을 만한 삶을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지만 그 구원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을 담그면 늘 구더기가 생기기 마련인데, 우리는 구더기 없는 장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사단은 ‘내려오라’고 말합니다. 굳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가 없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풍성함이 문제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일이 가져다주는 결과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우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시고자 해도 우리는 늘 거부해 오거나 미루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셔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함은,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풍성한 삶의 원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감수해야할 대가를 치루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인데,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손실로 생각하기에는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28절과 29절에서 나타난 귀신들의 행동 에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자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무슨 의미일까요?
귀신들이 지금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예수님이 자신들을 쫓아 내려고 하느냐는 불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귀신에게 이 마을 사람들은 더 할 수 없는 사냥감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단순히 싫고 좋고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가 살고 있는 현실이 “전쟁” 이라는 말입니다.
귀신들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괴롭게 하는 상황에 처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제가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 귀신들이 그 사람의 몸에 들어갔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회 현장에서 귀신들린 사람과 한참을 이야기 하고 몇 번이나 그 귀신을 쫓아 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도, 그 귀신이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셨는가?
아마도 그 귀신을 쫓아내면 다른 사람에게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 거하는 귀신들이라면,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도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적 가치 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교회 성장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가끔 세미나에 강사로 가서는 참석한 사람들에게교회성장의 비결을 아는 대로 이야기 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엄청난 성공의 비결들을 알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방법을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 희생하거나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는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나,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못해 마을에 오신 예수님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깨끗할 수 있다면 경제적인 손해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이 바라보고 살아가는 나라가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는 손해를 감수해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요?
자! 문제는 비결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것을 위한 값을 지불하였느냐 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라!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삶의 가치와 방식을 바꾸는 훈련입니다.
영적인 것을 바라보며 육적인 것을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만큼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진 터니(Gene Tunney)라는 사람은 1차 대전 중에 양 주먹이 부서졌습니다. 더 이상 권투 선수로서 강펀치를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주치의이자 매니저였던 사람이 더 이상 권투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 시합에서 쓰던 권투의 패턴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늘 강펀치로 이겨왔는데, 이제는 기술적으로 머리를 쓰는 권투를 구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삐 움직이면서 점수를 따내고, 요리조리 교묘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작전으로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꾼 것은 작전 기술이었지 그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과 성공을 향한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져야합니다.
때로는 나의 강펀치 가지고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강펀치가 부서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위기나 중요한 순간을 지날 때, 하나님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대학에 실패했다는 이유 때문에 신앙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방식은 이런 위기 가운데서 우리가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삶의 환경이 우리를 포기하도록 몰아갈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방식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며 결단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타이핑을 하는데 자꾸 ‘사탄’이 ‘사탕’으로 쳐지네요. 몇 번을 고치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탄은 사탕이구나!”
사탄은 늘 우리들에게 달콤하게 찾아옵니다. 달콤한 유혹은 우리의 이를 썩게 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우리의 영혼을 썩게 할 것입니다. 달콤함은 우리로 하여금 비만하게 하여,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당뇨병을 가지고 와서는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우리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살찐 사람이 훨씬 많은 나라입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일하던 사무실에 있는데, 같이 일하던 흑인 여자 하나가 무척이나 시무룩하게 앉아있습니다. 이유를 물어 보니까 목사 안수를 받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이유인 즉 이 흑인 여자는 너무나 살이 쪄서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해서 살찐 사람이 어떻게 우리들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사탕”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와 우리들의 삶을 망쳐 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분명하게 목격한 것이 있는데, 잘 사는 도시일수록 좋은 학교에 갈수록 날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기관리’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첫 번 쨰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살찌고 안찌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체질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어떤태도를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삶의 비상구를 두지 말아라!
이제 본문 말씀과 연결점을 하나 더 찾아 보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타협보다는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인식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삶의 비상구를 두지 말라’는 말로 연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 가운데 하나는 늘 ‘비상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입니다.
풍성한 삶을 위한 원리로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만져지고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비상구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비상구를 두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서 ‘육체의 소욕’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서는 늘 ‘비상구’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17절 말씀에 나와 있는 사도바울의 태도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17-나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얼마나 멋있는 사람,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삶의 의논자가, “혈과 육”이 아니었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굶주림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외로움의 땅 이었습니다. 자연적이 여건이 좋지 않은 땅, 더워서 미쳐버릴, 얼어 죽을 수도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하나님이 바울 안에 있기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은혜로 나를 부르셔서” “이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확실한 준비가 바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인생입니까?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성공적인 인생을 위하여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치러야 하는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합니다.
저희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태권도를 막 배우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도장에 다녔는지 모릅니다. 방학 동안에 새벽반에 다닌다고, 자명종을 울려놓고 혼자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갑니다.
노란 띠를 따고, 파란 띠를 따고 검은 띠를 땁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대가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도 인생의 목표가 세워지니 잠을 덜 자고 삽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태권도를 그만 두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태권도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승단 시험을 보면 늘 국기원에서 주일에 치룹니다.
그 때는 아이가 어려서 부모의 말에 잘 순종할 때죠. 태권도 단 수가 올라가는 것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결국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포기’와 ‘결단’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게으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이루어지기 위해 얼마나 우리의 잠을 줄여 봤습니까?
얼마나 우리의 시간이 투자되었습니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얼마만한 기쁨이 있어왔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분명한 결단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의 열매들 기쁨들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에게 분명한 목적이 설정되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 절대로 이차적인계획이나, “비상출구”를 허락하지 마십시오.
“비상출구”가 있는 한 우리는 늘, 그곳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2차적인 계획”은 늘 사탄의 생각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저는 아내를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어떤 분이 그런 간증을 한 모양입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깨달아 졌다는 것입니다.
“첫 번 째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두 번째 생각은 자신의 생각” “그리고 세 번째 생각은 사탄의 생각”이 분이 헌금을 하려고 하는데, 처음에 백 만원을 하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어 깎고 깎다가 두 번을 깎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신이 어떤 아는 사람의 컨설팅을 하는데, 5백 만원 정도를 받아야 하는 일인데, 2백만원에 해달라고 하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라는 겁니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깎는 친구의 요청에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하나님의 것을 흥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생각 때문에 3백 만원을 손해보고 해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분명한 생각,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지배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흥정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비상 출구가 열려있는 한 늘 여러분들에게 유혹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직까지 열려있는 “비상구”를 완전하게 제거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어느 성도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 성도들의 실제 생활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설교하고 교인들을 야단친다고 말입니다.
그 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요”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몰라야 할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활을 이해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모두 이해하고, 알면서, 어떻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모를 랍니다..
그래요! 오늘 여러분들이 가지는 분명한 사정들과,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들으면 눈물 날
사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면, 올바로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이해할만한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하고 그런 부차적인 이유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절대적인 원칙”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분명히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핑계나 이유거리가 아니라,왜 여러분들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분명하게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아직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고, 사탄도 원하지 않고, 분명한 대가도 지불해야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30절까지 나와 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같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도로서 성공적인 사역과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기꺼이 지불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비상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환경이 자신의 편이 아닐지라도, 오히려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