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의 지명(地名)
地名의 변천은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 부계사회(父系社會)로 전환하려는 과정에서 서서히 시작됨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순(堯舜 BC. 2357~2319)때부터 점차 부계사회로 넘어오려는 조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순(堯舜)때 만해도 모계사회의 강한 영향으로 안으로는 모계사회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하(夏 BC. 2224년)나라 우(禹)임금때 와서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순(舜 BC. 2284년)임금
으로부터 대비(大費)라는 본 이름대신 현규(玄珪)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후,
순(舜) 임금의 딸 옥녀(玉女)를 처로 삼게 되었다.
이때 순(舜)임금의 성은 요(姚)였으며 옥녀(玉女) 역시 요(姚)성이었다.(海內西經 참고)
우(禹)임금이 등극한 후 옥녀(玉女)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큰 아들은 대염(大廉)으로 조속씨(鳥俗氏)며
작은 아들은 약목(若木)으로 비씨(費氏)이다.
두 아들 모두 제후왕으로 있을 당시 우(禹)임금은 주색에 놀아나고 궁녀(宮女)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부권사회(父權社會)의 권위의식이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순(舜)임금의 두 딸은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태호(太湖) 호수에 있는 동정산(洞庭山)에 들어가
선녀처럼 살았다고 산해경(山海經) 주석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필자의 저서 山海經 참고)
부권시대(父權時代)는 우(禹)임금 때부터 시작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76년)로 이어져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475~221년)에 들어와 진(秦)나라가 統一할 때까지 모권사회(母權社會)는
표면적으로 쇠약해졌다.
이상과 같은 상황 속에서 땅이름을 고치고 바꾸는 작업이 있었다.
그것은 칠웅(七雄), 즉 진(秦),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등이 난립하다 망한 후 地名의
변천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로 한(漢)나라 유방(劉邦 BC. 202年)이 건국한 후부터 더욱 地名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三國時 新羅는 12대 첨해왕(沾解王 AD. 245년)때는 사벌국(沙伐國)의 위주(爲州)를 상주(上州)라
고쳤는데 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1~536년) 11년 상주(上州)라 했다가 24대 진흥왕(眞興王 AD. 537~
572년) 18년에 주(州)를 폐지시켰다.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는 상주(尙州)로 다시 개명하고 모든 地名을 군(郡)으로 하면서
땅이름을 모조리 바꾸어 버렸다.(三國史記, 雜志地理 참고)
高句麗, 百濟, 新羅가 있을 당시만 해도 중국대륙은 모두 구주(九州)로 나누어져 있을 때 全州는 西南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新羅는 漢나라 땅이었던 낙랑(樂浪)에 있을 때 高句麗, 百濟, 新羅는 모두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全州는 西南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287쪽에 全州를 찾아보았다.
全州는 全縣을 참고하라 했으므로 全縣을 살펴보니 漢나라때 영릉현(零陵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영릉현(零陵縣)을 찾으니 漢나라때 호남성(湖南省) 영주부(永州府)라고 되어있다.
영주부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성지도집(分省地圖集)에서 찾아보니 호남성(湖南省) 남쪽에 있었다.
다시 말해 광서성(廣西省)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지금 지도에는 광서성(廣西省) 북쪽 계림(桂林)
위에 全州가 있다.
地名은 三國후 당(唐)나라, 송나라 때도 고쳐지곤 했으나 특히 대륙에 있던 高麗는 걸안(契丹)의 후예인
요(遼)의 침략과 몽고(蒙古)군의 전란으로 인해 대륙에 있던 漢字의 地名을 한반도에 점차로 옮기기 시작
했다.(고려 23대 高宗때 地名참고, 高麗史節要)
高麗가 대륙에 있을 때 한문자의 땅이름을 한반도에 완전히 옮기게 된 것은 高麗 27대 충숙왕(忠肅王 AD.
1293 ~1326年)때이다.
옛날 한반도에는 한자로 된 지명(地名)이 없던 것을 고려가 만약을 대비하여 행정(行政)을 해야 할 경우를
생각해서 한자의 땅이름을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慶尙道志 참고)
高麗 때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나라가 없었으므로 한반도에는 땅이름이 순 우리말 식이였다.
예를 들자면 뚝섬, 모래내, 밤섬, 대곶, 딱섬, 서지골, 제암부락, 볼갱이, 새섬, 밤골등의 지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釜山은 가마산, 대전은 한밭, 대구는 달구벌, 광주는 빛고을 등으로 땅이름을 갖고 있던 것을 高麗말 27대
충숙왕 때는 완전히 地名을 한자로 바꾸게 되었기에 지금 한반도 전북에 있는 全州의 이름이 생긴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全州는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남쪽 영주부(永州府)에 있던 것을 광서성(廣西省) 북부인
계림(桂林) 위쪽에 全州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그 옛날 전 지역이 百濟 땅으로써 지금도 百濟의 地名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高麗가 망한 뒤 朝鮮王朝가 한반도에 자리 잡은 후 혈족(血族)간의 족보(族譜)가 만들어진 것이
므로 이때는 한반도에 한자(漢字)의 地名이 옮겨진 것이다.
필자가 저서 한 “새 高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고려도경
(高麗圖經) 등 수많은 원전(原典)으로 고증(考證)되어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고대(古代)부터 한자(漢字)의 地名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착각에 불과하다.
옛 조상(祖上)들은 모든 歷史와 사상(思想)들을 한자(漢字)로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원전(原典)에 소상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의주(義州)
중국고금지명대서전의 기록.
• 패수현(浿水縣).
『漢置. 以浿水名. 後漢因之. 誤作浿水. 卽今朝鮮鴨綠江南岸之義州. 其地當遼東與樂浪郡治之間.』
한(漢)나라 때 패수(浿水)의 지명을 따서 설치했다…지금의 조선 압록강 남쪽의 의주(義州)를 말한다.
그 땅은 당시 요동과 낙랑군 지간에서 다스렸다.
• 의주(義州).
『後魏置. 北齊廢. 故治在今河南汲縣. 唐復置. 尋廢…』
후위(後魏) 때 설치했다. 북제(北齊) 때 폐했다. 하남성 급현(汲縣)에서 다스렸다…
동경(東京)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요동 요서의 기준을 실크로드가 있는 천산(天山)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동경(東京)은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요동 요서의 기준을 서안(西安)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안에서 1천리
떨어진 낙양(洛陽)이 동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이 극심해지자 북경(北京)으로 동경을 옮겼다.
그 후 요동 요서의 개념이 바뀌어 현재의 난하 주변인 갈석산을 기준하게 되자, 동경은 봉천(奉天) 즉
심양으로 옮겼졌다가, 명(明)나라 후기에는 일본(日本)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율곤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