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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0강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말씀/막6:30-56
요절/막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나 남기신 오늘 본문의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사건이 제자들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빈 들에서 오천 명 이상 되는 큰 무리를 앞에 두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경험적으로 심어주고, 가르쳐주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30,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둘씩 둘씩 보냈던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모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며 쉴 시간을 주셨습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는데 사람들은 제자들이 배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는 육지로 따라왔는데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배 타고 가로질러 온 제자들보다 호숫가를 빙 돌아온 무리들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하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양은 목자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눈이 어둡고 그다지 빨리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목자가 목초지를 골라주어야 하고 물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주어야 합니다. 양들은 맹수로부터 스스로 지키지도 못합니다. 목자가 지켜주어야 합니다. 돌봄이 필요한데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이 절실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 유리방황하며 고통하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목자가 바로 당신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에게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목자를 만나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르침, 즉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 목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치십니다. 말씀으로 도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르치시더라’ 이 말은 ‘가르치기 시작하셨더라’ 입니다. 이제 시작하셨으면 끝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인데, 전도 여행으로 에너지를 많이 쏟았고, 예수님에게 보고하느라 남은 에너지까지도 다 소진한 제자들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잠깐 쉬러 왔고 떡볶이나 순대라도 먹으러 왔다면 ‘즉시’ 먹고 쉬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오금이 저려 왔을까요? 그런데 35절을 보면, 제자들은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립니다. 날이 저물고 나서야 예수님에게 나아와 이곳은 빈들이고, 날이 저물어 간다고 알렸습니다. 오래도록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다 끝나기까지 기다립니다. 훌륭해 보입니다. 36절을 보면, 이 훌륭해 보이는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드렸습니다. 자기들도 배고프고 피곤할 텐데 무리들 걱정까지 해주니 참 대견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참 의외의 대답이 돌아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좀 전에 제자들은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제자들은 ‘우리에게 가라는 겁니까 지금?’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미 둘씩 둘씩 전도 여행 갔다가 왔습니다. 전도 여행 보고도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제자들이 쉬러 온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쉬러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무리들이 쫓아오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니 그것까지 다 견디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가야 한다고요? 당연히 저 무리들이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는 것입니다. 시장이 있는 촌이나 마을로 가야 합니다. 그다음, 빵을 사야 합니다. 다음엔 사 온 빵들을 나눠줘야 합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밧데리 방전이 다 된 제자들에게 돈이 있다 할지라도 우선은 가는 일이 고단합니다. 고단함을 극복하고 가더라도 살 돈이 200데나리온, 한화로 대략 1,600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배고파 밀 이삭 잘라 먹던 주제에 그만한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돈으로 산 빵을 무리들을 위해 먹이는데 쓰라니, 아껴 두었다가 자신들이 먹는데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해하고 잘 섬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둘씩 둘씩 파송할 때 자세한 지침들을 주셨던 것, 예수님의 권능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셨던 것, 돌아왔을 때 그들이 가르치고 행한 일들을 다 들어주신 것, 그들의 고단함을 잘 알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도록 배려해 주신 것 등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황당합니다. 쉬도록 배려하는 것 같다가, 갑자기 철회하더니 또 왔다 갔다 하라고 시킵니다. 없는 돈을 끌어 오라 하고, 그걸 또 나눠주라 합니다.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버렸을 것입니다. 상처가 되고 배신감마저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대답은 싸늘합니다.
여기서 잠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할 때 비웃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그들도 싸늘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 생명의 수여자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냉소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왜 제자들의 반응이 이렇게도 싸늘한 것일까요? 너무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고단하고 피곤한데, 또 가라고 하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3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친 제자들을 멀리 보내실 생각이 아닙니다. 200데나리온을 빌려오라는 말도 아니고, 빌려온 돈을 희생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형편을 살피고, 그다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슨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없는 것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사람이 없고, 재능이 없고 등등. 그러니 일할 의욕이 생기질 않습니다. 없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은혜의 역사, 어떤 기적의 역사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것들을 찾는 데서부터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소원을 가지게 하시고 치유의 은혜,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있는 것을 찾는 것을 통해 제자들이 무리들을 직접 먹이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별거 없는 현실일지라도 있는 것을 찾아서 먹이고자 하는 심정을 가질 때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멍하니 뒷짐만 지고 있던 제자들이 가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서 찾아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들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제자들의 답변은 말이 짧습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다섯. 물고기 둘.” 이런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다’는 반응입니다. ‘이런 걸 찾아서 뭘 하겠느냐’ 입니다. 우리의 현실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직접 먹이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뭐가 있는가 찾기를 바랐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냉소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돕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식사 대형을 갖추도록 하십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일정한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50명씩, 100명씩 대형을 갖추었는데, 저자 마가는 그들이 있는 곳이 빈들, 곧 광야가 아니라 ‘푸른 잔디’ 곧 ‘푸른 초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23편 1,2절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초장’에 양 떼들을 누이시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떡 5개, 물고기 2마리밖에 없고, 거기에 오천 명 이상의 엄청난 무리가 있다면, 그곳은 분명 황량한 광야의 이미지인데, 그런 그곳이 무리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푸른 초장이 된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수준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는 그 곁에 3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열둘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하신 예수님은 떡을 떼어 열둘에게 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각 그룹에게 나눠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는 말씀에서 ‘열둘’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완전수로, 한마디로 오천 명 이상의 무리들에게 부족함 없이 배부르게 먹였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제자들은 곁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었으나, 이제 무리들 곁에 있는 열둘은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에 동역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제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제자들 한 사람당 한 바구니씩 챙길 수 있으니 먹을 거 걱정하지 말라는 게 핵심 메시지일까요? 아니요. 5,000명 이상을 먹인 놀라운 기적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광야에서 백성들을 만나로 배불리 먹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쉬게 하시는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한 다윗의 시편 23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열왕기상의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에서 엘리야의 말대로 떡 한 덩이를 만들어 엘리야를 섬길 때, 떡을 만드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여러 날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하는 말과도 비슷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또 엘리야와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건 속에는 아까 언급한 3가지 사건의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다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푸른 초장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시장에 간다고 나타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200데나리온을 빌려온다고, 그것으로 떡을 사서 나눠준다고 광야가 푸른 초장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너무나 갈급하여 예수님께로 달려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헤롯 왕은 불의하고 음란하고 의인 세례요한을 죽이는 등 백성들의 삶에는 등한시한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가르치시고 배불리 먹이시는 목자요, 진정한 왕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또 지난주 말씀에서처럼, 의인 세례요한의 죽음을 통해, 세례요한처럼 억울하고 참담하게 죽으실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자기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영적 의미를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 되심을 나타낸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배불리 먹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혼들을 섬길 때 이백 데나리온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가서 찾아보면 오병이어는 있습니다. 그 오병이어는 우리 자신의 손안에 있을 때는 자신 한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릴 때,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하실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백 데나리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병이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넘치게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께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축복하실 때 오병이어를 가지고도 오천 명을 먹이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이백 데나리온을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 속에 주저앉아 있지 않아야겠습니다.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있는 오병이어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은 떡 몇 개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을 통해 영혼들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찾아보면서 양들을 먹이고 섬기고자 하는 심정을 덧입어야겠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덧입어야겠습니다. 오병이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들입니다. 또 물질이나 시간이나 전공도 나의 작은 오병이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캠퍼스 영혼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양들을 섬기고자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캠퍼스 상황은 빈들이고, 해는 저물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에게 이백 데나리온은 없고 우리는 약하고 피곤하고 낙심하고 지쳐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캠퍼스 영혼들의 목자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백 데나리온이 없는 우리의 형편을 주장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며 양들을 먹이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병이어를 찾아 들고 주님에게 나올 때 주님은 그것을 심히 기뻐하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이 담겨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십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놓으라고 해서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heart)입니다. 우리의 진심이 담긴 것을 주님은 축복하시고 큰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심의 오병이어’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오병이어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걸 통해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십니다(엡3:20).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우리가 앞으로도 주님 앞에 드릴 것이 여전히 작고 부족해보이는 오병이어일지라도 우리의 진심을 받으시고 축복하실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와 감격이 몰려옵니다. 우리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우리 영혼을 살찌우시는 목자 예수님을 늘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를 도우시고 축복하실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우리 또한 영혼들의 목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진심의 오병이어를 귀하게 축복하시고 영혼들을 배불리게 하실 예수님을 기대하고 의지해야겠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 매일 오병이어 기적과 같은 축제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잔치가 끝나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또는 목자로 살아가는 일이 48절의 제자들이 역풍 속에 힘겹게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가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는 고난의 역풍이 수없이 불어올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제자들과 같이 마음이 둔해지면 두려워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롭고 주위는 온통 어둠처럼 보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간에, 주님이 보기에 가장 좋은 때에 찾아오시고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삶이나 사역의 역풍 앞에서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목자가 늘 양과 함께하며 돌보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고 역풍을 그치게 하신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와도 함께 계셔 주님의 때에 도와주시고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삶 속에서, 또는 사역 속에서 이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여 제자들처럼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늘 인식하고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심을 가지고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의지하게 하소서! 우리를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시대 캠퍼스 영혼들의 목자로 살게 하소서.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과 사역 속에서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