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신부
복음; 마태23,27-32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 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 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며칠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너무 힘듦’이랍니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1달간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기로 한 미국 신부님이 못 오신다고 해서 영어미사를 했고, 대건회 모임, 사목회의, 구역모임을 다녀왔습니다. 구역장 회의, 세례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병원방문, 포트워스 한인 성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듯이 실내는 에어컨의 힘으로 서늘한데, 바깥은 따가운 햇볕이 강해서 목감기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을 ‘너무 신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아픈 사람이 위로를 받고, 힘든 사람이 용기를 얻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이렇게 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 더하기 일’은 ‘너무 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원고 교정하고, 신문 홍보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팬데믹 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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