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과 사극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黃源甲 <소설가, 역사연구가>
새로 나온 영화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이 양만춘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다는 설정이 있다고 해서 한심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당 태종 이세민의 말에 “전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양만춘이 동조하지 않아서 치려다가 못했다.”는 말을 두고 그런 설정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설정이다. 연개소문은 당시 최고위급인 막리지 벼슬의 강력한 실력자였고, 양만춘은 지방 성주로서 벼슬이 하위직인 모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 거느린 군사도 적어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연개소문이 나당전쟁 안시성전투 때 심복부하인 고죽리를 보내 적정을 염탐하려던 사실을 넣는 게 나을 뻔했다.
언젠가 서점에서 한 작가가 쓴 <대무신왕>이란 소설 첫머리를 보다가 실소했다. 부여왕이 “너는 누구냐?”하고 묻자 대무신왕이 “난 대무신왕이다”라고 한 것이었다. 대무신왕은 사후에 바쳐진 존호이지 본인이 생전에 스스로 지어서 부른 왕호가 아닌 것이다. 망발이다.
몇 년 전에 고구려사를 소재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주몽>과 <연개소문>, 신라사를 그린 <선덕여왕>, 발해 건국사를 다룬 <대조영>,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다룬 <불멸의 이순신>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그린 <명량>이란 영화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주몽>에서는 나이가 주몽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과부 소서노를 처녀로 그렸고, <연개소문>에서는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종노릇을 했고, <대조영>에서는 대조영이 연개소문의 종노릇을 한 것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선덕여왕>에서도 진흥왕 때 죽은 미실궁주가 아직도 살아서 미모를 자랑하는 망발을 자행했다.
또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에는 참전하지도 않은 배설이 등장하여 전함을 불태우려다가 화살에 맞아 죽는 터무니없는 설정으로 경주 배씨 문중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때맞춰 이들 드라마와 영화의 주인공을 그린 역사소설도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나왔다.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서 책을 많이 팔아보려는 상업적 목적이었지만, 어쨌든 역사를 그동안 무관심했던 대중 속으로 끌어내는 점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겠다.
역사소설이든 사극이든 역사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특히 동북공정이니 탐원공정이니 해서 중국의 고구려사와 발해사, 나아가 부여사와 고조선사의 탈취 기도가 노골화해가는 형편에 우리 역사를 널리 알리고 자부심을 고취하는 면에서 역사소설과 사극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역사소설이든 사극이든 역사적 실체를 작가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왜곡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역사소설은 역사책이 아니므로 작가적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있지만, 그 상상력이 지나친 나머지 있었던 사실은 없었던 듯, 없었던 사실도 있었던 양 역사적 실체를 마구 비틀어서야 되겠는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비하해서야 될 노릇인가.
역사소설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양식과 지식은 갖춘 다음에 쓰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기본사료 등 관련 자료를 충분히 섭렵하고 역사소설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본사료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지엽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파면당해 서울로 잡혀갈 때 그를 체포해간 사람을 금부도사라고 한 <칼의 노래>(25쪽)는 고증이 잘못되었다. 이순신을 끌고 간 사람은 금부도사가 아니라 선전관이었다. 이는 기본사료인 <선조실록>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소설을 썼다는 반증이다.
이처럼 고증을 제대로 안 하니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거북선이 진수 당일 저절로 침몰했다는 무지무식하고 터무니없는 망발이 나온 것이다.
전에 최인호의 <제4의 제국>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가야의 비밀을 파헤친 장편 역사소설인데,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수레, 역설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 때까지 그 어떤 수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5세기에 민족대이동을 감행한 가야 유민들의 핵심세력인 하세족들이 이미 그 무렵 이와 같은 수레를 만들어 토목공사에 사용하였음에도 막상 본토인 조선에서는 수레는커녕 바퀴가 달린 그 어떤 물건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제가의 탄식대로 18세기에도 바퀴가 달린 수레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원시적인 미개족 조선, 그러나 가야인들은 이미 그보다 1300년이나 앞선 5세기에 벌써 이와 같은 수레를 사용하여 '싣고 태우는' 혜택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제4의 제국> 2권 64쪽)
참으로 당황스러운 대목이었다. 최인호가 인용한 박제가의 <교통기관을 발달시킬 용차론>이란 글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우리나라가 단군왕검의 개국부터 18세기까지 5천 년 간 수레건 바퀴건 아무것도 없었던 미개국이란 뜻이 아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중국에게 수많은 소와 말을 빼앗기고, 국토는 비좁고 험해 수레를 널리 사용하지 못했으므로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한 소리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상업을 농업과 공업보다 천시하던 조선시대에 뛰어난 운송수단인 수레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우리나라가 18세기까지 '그 어떤 수레바퀴도 이용하지 못한 미개국'이라고 표현한다면 이야말로 자기비하요, 자학적 역사관이 아니고 무엇이랴. 최인호는 생전에 오회분5호묘와 덕흥리고분 등 수많은 고구려고분벽화에서 그 많은 고구려의 수레와 바퀴를 정말로 한 번도 보지 못했는가. <삼국사기> '잡지' 첫머리에 나오는 신라의 수레에 관한 조항을 못 읽었는가. 거기에는 수레의 재목과 장식에 관한 제한규정까지 있지 않은가.
또 <삼국유사> 신라 제3대 노례왕(유례왕) 조를 보면 ‘보습을 만들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를 짓고, 사람 타는 수레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못 보았는가. 뿐만 아니다. <고려사>를 보면 강조가 거란 침략군과 싸울 때 검차라는 전투용 수레를 만들어 숱한 적군을 무찌른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수레를 사용한 가야의 유민들이 어디에서 건너갔는가. 본인이 말한 대로 김해 등 한반도 가야 땅에서 고구려와 신라에게 쫓겨 왜로 망명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김해에서는 없었던 수레를 일본으로 망명하여 갑자기 발명했다는 말인가. 참으로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글이요 역사관이다.
그러나저러나 역사소설 가운데서 역사 왜곡의 가장 대표적 경우는 <바람의 화원>이다. 멀쩡한 남성 화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둔갑시켰으니 평산 신씨 문중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소설가든 역사소설가든 자격도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역사소설가가 많이 나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책 읽는 재미와 더불어 역사공부도 되고, 얼마나 좋은가. 다만, 덜된 공부를 바탕으로 역사소설을 잘못 쓰면 독자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게 된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등단한 지 수십 년이나 된 원로급, 중견급 소설가들도 역사소설을 쓰기가 어려운 일이다. 젊은 역사소설가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손끝이나 머릿속에서 나오는 잔재주가 아니라 공부를 제대로 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춘 다음에 역사소설을 쓰는 것이 좋겠다. 잘못된 역사소설을 쓰는 것도 독자들을 농락하고 속이고 역사에 죄를 짓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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