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길은 험하고 멀어도 5-8
구베아 주교는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1797년 8월 15일 중국의 사천성 교구장 까라드라 주교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에게, 「윤바오로가 지금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슨 이야기든지 하십시오.」 하며 도와줄 것을 암시했다. 윤유일은, 「주교님, 저도 이승훈 베드로처럼 세례를 받고 싶습니다.」 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금 안타까운 듯이, 「세례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받아야 합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고 회개를 통해 참 신앙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면서 그에게 교리부터 배우라고 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두 달 동안 틈틈이 구베아 주교를 찾아와 신앙에 대해 상담을 했다. 교리는 북당에 머물고 있는 록스 신부에게 배웠다. 필답형식으로 배운 것이라서 물론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록스 신부는 윤유일이 매우 총명하며 나이도 어지간히 들어 세례를 주면 고국에서 큰 활약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 20이 넘었어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결혼 대신 자신의 생애를 모두 하느님께 바친다는 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윤바오로, 며칠 후에 세례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윤바오로의 북경체재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걸 고려했습니다.」 윤유일은 뛸 듯이 기뻤다. 그렇잖아도 귀국할 날이 다가와 초조해 있던 터이다. 「고맙습니다.」
「윤바오로, 사람이란 위대하게 보이지만 결국 비참하게 죽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죽음은 찾아옵니다. 이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 절대자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합니다.」 「그럼 좋습니다.」 조선에서 배웠던 성리학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교육기간에 한 달 조금 더 되었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그는 1790년 2월 9일 북당 천주당에서 교리를 가르쳐 준 록스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지요. 옛날 바오로란 사람이 형제처럼 먼 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데서 따온 이름입니다. 앞으로 형제는 바오로처럼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록스 신부는 윤유일이 동양의 바오로가 돼줄 것을 당부했다. 조선에서 북경까지 먼 길을 찾아온 그가 바오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부는 판지 수사가 섰다. 판지 수사는 이태리 출신 예수회원으로서 I773년 예수회가 해산된 후에도 북당 천주당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윤유일의 대부를 서준 것이다. 기름 바르는 의식이 끝나자 록스 신부는 참석한 많은 신자들 앞에서, 「이제 형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의 나라에 돌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증거 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 바오로처럼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록스 신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을 부었다. 거기에 참석한 중국인 신자들은 이 감격적인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오늘의 일은 내가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주님의 섭리입니까?.」 록스 신부도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대부를 서준 판지 수사는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윤유일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생라자르(지명)에 보냈고 이태리 본국 신부들에게 그 소식을 편지로 보고하였다. 윤유일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본국에서도 바오로였지만 이젠 정식 바오로가 됐다는 생각에 너무 감격했다. 짧은 교리 기간이었지만 배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제부터 본국에 돌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날 밤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 세례를 받음으로써 박해자들이 있는 본국에서 자신의 신변에 찾아들 위험을 생각하면 그리 감격에 차 있을 것만은 아니었다. 윤유일은 북경에 있는 동안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성세성사가 물로 세례식을 갖아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남의 상징이라면 견진성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 교회의 성년, 어른으로 태어남으로 상징 되는 성사다. 견진성사는 주교가 집전하는 성사라서 구베아 주교가 주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에게, 「윤바오로 형제는 두 가지 세례를 모두 받았습니다. 모두가 주님 앞의 영광입니다.」 하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윤유일은 조선인 최초로 견진성사를 받은 인물이 되었다. 이승훈이 받지 못한 견진성사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는 귀국해서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았다. 교리로 인한 무지로 인해 갈팡질팡하는 조선 교우들에게 참 교리를 알려주는 일과, 신자들의 결속, 그리고 신부를 모셔오는 일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본인의 사목서간이오. 잘 간직했다가 조선 교우들에게 전하시오.」
구베아 주교는 헝겊에 쓴 편지를 윤유일에게 주었다. 사목서간은 명주 비단에 썼는데 그것은 옷 속에 쉽게 숨겨 갈 수가 있고 비와 눈에 젖어도 쉽게 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수신인은 이승훈과 권일신이었다. 구베아 주교는 그 편지에서, 우선 신앙에 불러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착하시고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께 불명의 감사를 드리라고 신입 교우들을 권면했다. 그는 또한 복음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쓸 것과 항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함부로 사제 성직에 개입한 데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이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성제는 절대로 거행 할 수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는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려고 격려하며 미신자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히 기쁜 일을 하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꾸준히 계속하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이조실록에 의하면 윤유일이 따라갔던 이상원의 사신행차는 1790년 3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지정사 이상원은 귀국하는 도중 병이 깊이 들어 있어 임금께 복명도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있다가 1790년 4월 1일 숨을 거두었다. 동지사의 북경 나들이는 그만큼 힘이 들었던 것이다. 비교적 편안하게 다녀 올 수 있었던 정사가 이 지경이면 이들을 따라 걸어갔다 온 윤유일의 고생은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도 그 괴로운 역경을 알 수 있다.
서울에 돌아온 윤유일은 주교의 회답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승훈,권일신 등 조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간을 전했다.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최창현, 유항검, 흥낙민 등 그들은 윤유일이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석방의 이승훈 집에 모여 있었다. 외부인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이들은 따로따로 왔던 것이다. 마침내 윤유일이 큰 기침을 하고 나타났다. 윤유일의 얼굴을 보자 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을 보고 이들은 모두 반가워했다. 윤유일의 스승인 권일신이 그를 아랫목에 맞았다. 「괜찮습니다.」 「고생했는데 앉게.」 윤유일은 여러 사람이 자기를 좌상으로 모시는 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조선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사목서간을 품속에서 내보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조그만 명주헝겊에 쓴 편지를 돌려가면서 보았다. 그리고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우리들이 신부로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권일신이 운을 뗐다. 「잘못된 것은 즉시 시정해야지요,」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듣고 온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는 것 여러 선비님들이 아실 것입니다. 신부가 되는 것은 신품성사를 받아야 가능 합니다.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고 성사는 그리스 도께서 우리와 만나려는 외적 표징입니다. 성사의 거행 자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품성사를 받은 사제라야 만이 거행할 수 있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신부행세를 했던 이들은 이 말을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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