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1-07-25 21:09 조회 : 2033 |
| | | 부채에 담긴 그 어진 마음
임 병 문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은 내 집 문지방을 넘고 나는 40살 쥘부채의 화폭에 담긴 한 점의 시화(詩畵)를 보면서 입하(立夏)의 새 여름을 맞는다. 성하(盛夏)의 부채는 예로부터 선비의 풍류라 하였으니 일찍이 조선의 선비들은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한 쥘부채 합죽선에 스스로 낙인을 넣어 가문의 영광으로 소중히 다루었다. 이런 접이식 부채는 접혀지는 대오리의 살 수에 따라 그 값에 차이가 났으니 살이 많을수록 고급으로 쳤던 것이다. 이 여름, 은사께서 보내주신 그 40살 쥘부채의 변죽을 가만히 펼쳐들면 당신께서 손수 그리시고 글을 써 낙관하신 한 폭의 산수화가 아련한 향수처럼 내 앞에 펼쳐진다. 화폭 가득 초여름의 산에는 녹음이 우거졌고, 산자락 아래로 굽이도는 풀 섶에는 방죽배미가 은밀하다. 늪가에 선 한 여인의 모습이 숨은 듯 보이고, 창포 숲에서 금방 머리를 감고 나온 듯 쪽을 진 머리에 민부채를 들고 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적삼 속 물기를 은근히 거두는 형상이다. 이렇듯 쥘부채의 풍광 속에도 여름은 그렇게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여인의 가슴을 파고 든 것이다. 추사(秋史)는 일찍이 가난한 부채 장수의 30살 쥘부채에 글을 써주고 이를 팔게 하여 그의 병든 노모를 도왔거니와, 백호(白湖)는 이미 어린 기생 월선(月仙))에게 칠언절구 시를 쓴 부채를 주었으니,
‘ 한겨울 부채 선물 이상하게 생각마라 /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냐만 / 한밤중에 서로의 생각에 불이 붙게 되면 / 무더운 유월의 염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위의 시에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읊었던 고시조가 진즉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 한겨울 부채 보낸 뜻을 잠간 생각하니 / 가슴에 타는 불을 끄라 보내시었는가 / 눈물로도 끄지 못하는 불을 / 부채인들 어이하리.’
하였다. 부채를 놓고 주고받은 음양의 이치가 자못 곡진하고 우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랬다. 한 자루 부채 속에도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그 뜻은 물이 되어 흐르고, 그 뜻은 바람이 되어 불었다. 부채는 이렇듯 단순한 풍구를 넘어 인간의 삶에 큰 의미로 다가 섰던 것이다. 이에 조선 후기의 이유원(李裕元)은 임하필기에 부채를 팔덕선(八德扇)이라 적었으니, 그 효용과 소통의 풍류는 자못 고아하고 운치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나는 옛 스승이 보내주신 합죽선을 받아 들고 새삼 몸가짐을 정히 하는 좌표로 삼을 수가 있었으니, 그 쥘부채 한 자루의 가치는 내게 어떤 소용보다 더 했다. 옛 스승과의 기억은 사십년 세월을 거슬러 내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는 모든 것이 암울하고 헐벗은 처지여서 학비를 제때에 내기가 힘이 들었다. 그 시절 담임으로 부임해 오신 미술 선생님을 나는 몹시 선망하였는데, 그것은 예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서무과에 납부할 내 학비를 선생님께서 직접 받아 가신 일이 있었다. 종종 담임이 대납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서무과로부터 밀린 돈을 내지 않으면 진학원서를 써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납된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추궁하는 서무과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고는 번뇌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졸업식 날 선생님은 그 일에 대해 어떤 말씀도 없으셨다. 다만 내 어깨를 감싸고 한동안 하늘만 응시했을 뿐이다. 그것이 선생님과의 전부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몇 해 전 어느 날, 나는 화가로 활동하는 옛 친구로부터 옛 스승이 보낸 한 자루의 부채를 전해 받았다. 그간 전주(全州)에서 노후를 보내신다는 선생님이 늦깎이로 문단에 등단한 내 소식을 접하고, 쥘부채 한 자루를 곱게 포장해 보내신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받는 내 손은 떨렸고,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던 옛 기억이 떠올라 나는 당혹과 수치로 전율했다. 마침내 포장지를 뜯자 은은한 침향 속에 무소뿔 손잡이의 40살 합죽선이 그 모양을 들어냈다. 미려한 양 대모에 국화무늬 낙죽이 화각으로 들어갔고, 손잡이 끝의 은고리에는 장식 매듭이 달려있었다. 변죽을 펴니 진경산수 시화 한 점이 화폭에 가득했다. 한 눈에 귀품이었다. 그 황홀하고 당당한 부채의 기색에 나는 감정이 북받쳐왔다. 선생님은 그 칙칙하고 어두웠던 과거를 거슬러, 지금 내 앞에 품위 있고 떳떳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선생님과 내가 그 암울했던 시대의 흑백필름 앞에 엑스트라로 같이 서야 했던 사실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어두웠던 과거사를 화두처럼 뇌고 있다. 선생님은 왜 그때 사모님을 퇴원시키지 못하고, 병원에 치료비의 인질로 두시었던가. 나는 왜 그때 해서는 안 될 말을 털어 놓고 말았던가. 그리고 선생님은 왜 사십년 묻어온 회한을 이제야 부채로 보내시어 제자를 울게 하시는가. 더불어 부채 속 여백에 그 어려운 고시(古詩) 한 수를 적어 보내시어 기어이 그 뜻을 제자 스스로 풀게 해, 다시 한 번 어리석은 제자를 부끄럽게 하시는가.
‘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을 하여 / 비로소 자식을 낳았으니 / 그것이 바로 부채의 맑은 바람일세.’
깊은 밤, 부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은사께서는 이 고시 한 수를 통해서 어쩌면 내게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채의 맑은 바람이 인간에게 덕(德)이기위해서는 대오리와 종이, 서로간의 배려와 협조가 있었기에 비로소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랬다. 옛적부터 이기적인 내게 스승께서는 그 부채를 통해 숭고한 삶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신 것이다. 은사의 깊은 뜻을 한없이 되새기는 이 시간, 내게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모른다. |
| 강승택 | 11-07-25 22:18 | | 풍류를 아시는 임선생님, 40살 합죽선에 얽힌 스승과 제자의 정이 애잔하고 아름답기 이를데 없구료.. 부채를 놓고 주고 받은 음양의 서신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나름대로의 확실한 색채를 구축하고 계시는 임선생님께 응원의 박수, 짝,짝~ | |
| | 임병문 | 11-07-27 08:28 | | 강 선생님, '언제 한번 마음 놓고 웃어볼 수 있을까' 그 소망에 언제나 기꺼이 동참해주시는 선생님의 여유를 존경합니다. 뵈울 날을 기대하며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김용순 | 11-07-26 08:49 | | 한국수필 7월호에서 읽었습니다. 임선생님만의 독특한 글 재주가 느껴집니다. 사실 임선생님 글을 읽고나면, 내글도 글인가 싶어 글쓰기가 싫어집니다. 나같이 글 못쓰는 사람 용기 꺽지말고 한 수 가르쳐 주시든지, 아니면 보이지나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더운 날씨지만 운동 많이 하십시요. | |
| | 임병문 | 11-07-27 08:34 | | 김 선생님,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 그리 하시는지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리 느끼셨다면, 그리 생각하고 읽으셨다면, 저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하옵고 다시 한번 크게 웃을 날을, 웃을 일을 기대합니다. 강 선생님은 '그 건'에서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김영월 | 11-07-26 14:42 | | 은사님이 그려 보낸 부채에서 정말 맑은 바람이 느껴지네요. 어둡고 힘들었던 시절에 사제간의 맑은 정이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 집니다. 요즘같이 어지러운 교육 현실에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닌듯 싶네요. 언제나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시니 든든합니다. 작가회의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 | |
| | 임병문 | 11-07-27 08:39 | | 김영월 부회장님, 여러 일로 분주하실텐데 졸작읽어주시고, 그 암울했던 시대상에 공감하시며 잠시 마음을 쉬어가시니, 이 또한 더운 여름의 여유가 아니겠는지요.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김자인 | 11-07-27 11:01 | | 임병문 선생님,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쥘부채에서 은은하게 풍겨옵니다. 한 폭의 그림이 연상되어지는 고풍스런 분위기까지 잔잔하게 연출하셨네요. 부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글귀에서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채에 담긴 어진 마음' 잘 읽었습니다. | |
| | 임병문 | 11-07-27 11:39 | | 김자인 선생님, 그간 통 뵈울수가 없어 궁금하던차, 얼마 전 최복희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의 근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몹시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읽어주시고, 걱려의 말씀까지 해 주시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더위와 힘든 일 이겨내시고 하시는 일 마다,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건강하시기바랍니다. | |
| | 박원명화 | 11-07-27 19:33 | | 부채와 함께 풍류에 젖어 있을 임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스승과 제자간, 끈끈한 사랑이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준 게 아닌 가 싶습니다. 임선생님의 따뜻한 마음만큼 감성의 글에도 그 따뜻함이 묻어납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바람을 맞은 듯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 | 임병문 | 11-07-27 21:16 | | 박원명화 선생님, 선생님을 뵈면 언제나 반갑습니다. 그것은 제가 작가회의 모임에 나갈 때 느끼는 설레임과 즐거움 같은 것이 겠지요. 차츰 정이 쌓이고, 그 정만큼이나 좋아지는 면면의 모임, 그것이 바로 작가회이고 선생님의 자취일 것입니다. 항시 건강하시고 항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
| | 양순태 | 11-07-28 08:03 | | 40살 쥘부채에서 풍겨나는 사제간의 정이 깊고도 은근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온기를 느끼게 합니다 임병문 선생님 작가 되시어 만방에 감동을 전하시니 훌륭하신 스승에 보답하는 훌륭한 제자가 아니실런지요 다시한 번 수필작가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수작 중에 수작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 가슴에 오래토록 기억되리란 좋은 예감입니다 | |
| | 임병문 | 11-07-28 18:38 | | 양순태 선생님, 다시 뵙게되니 한층 반갑습니다. 뵙고, 다시 뵙고, 저에게는 그 면면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값진 인연들입니다. 선생님의 격려말씀 염두에 두고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고르지 못한 날씨에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김창식 | 11-07-28 12:46 | | 스승과 제자의 관계. 누구에게나 회한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임병문 선생님. | |
| | 임병문 | 11-07-28 18:39 | | 김창식 선생님, 부족한 작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
| | 일만성철용 | 11-07-30 09:47 | |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찡- 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저도 제 칠순에 김홍자 화백으로부터 받은 동양화 한 폭이 그려져 있는 합죽선을 쓰기엔 너무 아까워서눈으로 보고만 살고 있답니다. . | |
| | 임병문 | 11-07-30 17:17 | | 일만 선생님, 情物로 간직하신 그 합죽선, 가벼히 다룰 수 없음은 부채를 통해 오고간 그 情들이 사뭇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기바랍니다. | |
| | 변영희 | 11-07-31 13:05 | | 선생님 글은 소설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 |
| | 임병문 | 11-08-01 20:28 | | 변영희 선생님, 어줍잖은 글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박계용 | 11-08-01 18:20 | | 부채에 담긴 스승님의 마음과 화답하시는 제자, 임 선생님의 마음에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저에게도 부채에 얽힌 이야기가 되살아나네요.
고르지 못한 장마철 여름 날씨에 건강 하시고 귀한 작품 기다리겠습니다. | |
| | 임병문 | 11-08-01 20:33 | | 박계용 선생님, 멀리서 졸작보아주시고, 격려말씀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쳐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뵈울 날을 그리며 내내 건강하시기바랍니다. | |
| | 최복희 | 11-08-01 18:47 | | 이미 이 글은 읽고 제 느낌도 드렸지만 다시 읽어도 가슴이 저릿합니다. | |
| | 임병문 | 11-08-01 20:40 | | 최복희 선생님, 여전히 바쁘시지요. 이열치열이라고 어차피 겪어야할 더위, 피할 수 없다면 선생님다운 그 패기와 부지런하심으로 가을을 기약하심은 어떨런지요. 항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 | 장명옥 | 11-08-02 02:31 | | 책꽂이에 놓여있는 귀한 부채를 펴놓고 선생님의 글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요즘은 신작수필들 보는 재미에 흐르는 시간들도 아깝지 않은 듯 합니다. 언제나 귀한 작품들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먼 곳에서도 살아가는 맛을 보배롭게 해 주시는 작가회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 |
| | 임병문 | 11-08-02 08:21 | | 장명옥 선생님, 멀리 있다는 것, 가까이서 뵈울 수 없다는 것, 그 자체가 궁금함이고 기다림이고 그리움일 것입니다. 시절을 보내고 시절을 기다리는 그 길목에서 선생님을 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그 느낌은 돌아오는 계절처럼, 다시오는 시절처럼 신선했습니다. 부디 평안 강건하옵소서. | |
| | 이희순 | 11-08-03 10:51 | | 스승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고아한 '부채'를 선물하시어 그 제자가 그 부채처럼 품격 높은 인생을 가꾸어 사람들의 답답하고 지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바람이 되라는 '부채'를 안겨주셨군요. 이처럼 격조높은 선생님의 글을 대하니 스승님의 '부채'가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느낍니다. | |
| | 임병문 | 11-08-03 13:09 | | 이 선생님,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요. 이렇게 졸작을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까지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시고 뵈울 날을 그리겠습니다. | |
| | 하재준 | 11-08-04 07:05 | | 이미 당에오른 분의 글이지만 언제 읽어도 또 읽어도 새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문학의 폭은 한 없이 넓고 깊음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한 번 느낍니다. 부디 큰게 정진하시어 한국 수필의 거목이 되소소 | |
| | 임병문 | 11-08-04 07:29 | | 하재준 선생님, 참으로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요. 하옵고 어줍잖은 글 읽어주시고, 과분한 말씀까지 해주시니 감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여름, 후학를 보듬는 그 큰 그늘 아래 후배는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르지못한 일기에 부디 건강하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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