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심 11화 - 하나님의 시간표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 11
드디어 한국에 가게 되었다. 오래 기다려 온 순간이었기에 여러 가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영사관님처럼 훤칠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 만 살고 있을 것 같은 한국에 간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두 번의 환승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피로도 지루함도 없는 오직 꿈과 희망뿐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사복 입은 국정원 사람들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게이트를 이용해서 나온 우리들은 공항에 대기 중이던 검은 봉고차를 타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국정원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체 말이다. 처음 국정원 생활은 오전, 오후 번갈아 가며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게 하는등 운동하는 시간도 주고, 저녁이면 TV도 자유롭게 보게 하고 소등이 되면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라디오 방송도 틀어 주곤 했다. 또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과자들을 나눠 먹는 것이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한국 과자는 정말 맛있었다 (그때 먹어본 과자에는 고소미, 오징어 땅콩, 양파링, 자갈치 등등이었다.).
또 매일 밤 자그마한 창문 밖에 보이는 빨간 십자가들을 세어보며 무료함도 달래보았다. 처음엔 그 많은 빨간 십자가 사이에 초록 십자가를 보며 어디가 병원인가 했는데 누가 빨간 십자가는 교회라고 알려줬다. 나는 설레기 시작했다. 교회는 자유의 몸이 되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순자 이모도 주일이면 가시던 곳이었기에 교회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에 교회가 이렇게나 많다니 생각할 수록 가슴이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조사도 시작되었다. 국정원은 우리 가족이 함께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각자 독방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A4용지 한 뭉텅이를 앞에 놓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 들을 모두 쓰라고 했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하게 쓰라고 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다”부터 시작해서 고향, 친구, 학교 선생님 이름, 지역, 단짝의 이름 등등 빠짐없이 쓰라 고 했다. 나는 독방에 홀로 앉아 나의 일대기를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시콜콜한 내용을 다 써야 한다는 것이 너무 지겹고 힘들어서 빨리 쓰고 나갈 심정으로 몇 날 며칠을 밤새 종이를 붙들고 앉아 써 내려갔다.
그렇게 국정원에서는 우리 세 모녀의 글이 다 취합될 때까지 기다렸고, 취합된 글을 다 검토한 이후, 다음 단계인 일대일 취조로 들어갔다. 아마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각자 다른 방에서 다른 시간에 취조하는 것 같았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와 여 동생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와 마주 앉은 취조관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과 말투로 취조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기억 속의 나는 죄를 짓고 남한에 들어온 죄수와 같았다. 영화에서처럼 담배 연기와 니코틴 냄새로 가득 메운 방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이름… 생년월일…” 한 여름인데도 차가운 공기 속에 컴퓨터 타자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존칭, 호칭 다 생략하고 다짜고짜 시작된 조사에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약 보름이 넘도록 독방에 갇혀 누구와도 말을 섞어보지 못했던 나는 얼마 만에 하는 사람과 대화가 기뻐 그만 자동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고 지금 웃을 분위기냐며 호통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취조가 이어지던 중 소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이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 이름을 모르는 게 말이 돼 이 녀석아?!” 라며 분위기가 더욱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기도 했고, 소학교 1학년 당시 담임 선생 님은 잠깐 계시다가 출산휴가를 가셨고, 다른 선생님이 임시로 담임을 하시는 등 담임 선생님들이 몇 번 바뀌어서 담임 선생님 성함이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에게 그렇게 잘 해주셨다는 선생님 의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나도 답답했다. 문제는 질문 하나 답변하지 못한 것이 내 정체성을 의심하는 추궁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긴 침묵과 함께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조사관은 이런 가설을 내세웠다. “너는 중국인이고 북한에서 학교에 다녀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보다는 중국을 더 잘 알고 말하는 억양과 발음도 중국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순간 나조차도 내 정체성이 흔들릴 만큼 혼란스러웠다. 몇 날 며칠을 똑같은 질문에서 제자리걸음이 이어졌고, 그 문제에 완전히 꽂혀버린 담당 취조관은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놓으면 중국에 잘 보내 주겠다는 식으로 반 협박식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답답함에 차라리 죽고 싶었다. 죽어서라도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속 시원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여군 출신이셨던 어머니는 스파이가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으셨고, 여동생과 나는 중국에서 주워 온 아이들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럴듯한 소설 하나가 뚝딱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약속이나 한듯이 유전자 검사를 하면 모든 것이 명백할 것이 아니냐며 당당히 말했고 거짓말 탐지기 까지 기꺼이 응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 한 달이라는 긴 조사 끝에 최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결국 취조는 잘 정리가 되었지만, 말도 안되는 억지와 거짓으로 뒤집어진 우리 마음의 뒷수습은 온전히 각자가 이겨내야 할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취조관은 A4용지를 내밀며 앞으로 한국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써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래서 네 꿈이 무엇이라고?” 하며 묻는 그 얼굴에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저는 앞으로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업신여기는 당신같은 사람들을 혼내줄 거예요.” 취조관의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정원 취조관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국정원은 탈북민으로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되는, 환영받지 못하는 곳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제 우리 모녀는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나오게 되었지만, 허탈하기가 그지없었고, ‘하나원’이라는 기관이 남았다는 것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하나원은 남한 정착에 필요한 절차를 밟는 곳이었고 그곳을 거쳐야만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하나원에서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며 모범생처럼 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와 여동생은 선생님들께 말썽 한번 안 부리고 열심히 임했다.
나는 호기롭게 국정원 취조관에게 ‘변호사’가 될 것이라 고 했던 말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법대는 기초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가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았고, 변호사가 되려면 많은 준 비와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능력을 쌓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공부를 해 야 했고, 이를 위해 시간적·금전적 투자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미성년자인 나에게 브로커에게 갚아야 할 돈에다가 학원에 갈 돈까지는 없었기에 법대는 깔끔하게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꿈에만 그리던 대학 생활이 눈앞에 있었다. 빨리 대학교에 가서 모두가 이야기하는 캠퍼 슬라이드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심리가 3개월 만에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어떤 정보도 없이 단 지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나는 대안학교에 있던 선배들에게 들은 ‘외대 중국어학과’가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중국어’는 남한 아이들과 경쟁했을 때 자신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참에 대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외대 재외국민 특별전형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재외국민 특별전형이라고 해도 아무 준비 없이 딸랑 검정고시 합격증만 가지고는 대학교에서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리가 없었기에 떨어졌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검정고시 패스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 외의 준비를 하지 못한 나의 실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힘이 쭉 빠졌지만 그렇다고 내년에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종일 PC 방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려 가며 대학교들의 수시와 정시 마감 일정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숙명 여자대학교의 정시 마감이 내일 오후 5시까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해의 마지막 정시 마감이 숙대였던 것이다. 하루 만에 급하게 서류들을 준비하고 자소서와 추천서까지 받아 원서를 제출하였고, 다행히 1차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두 번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준비하는 가운데 외국어 특별전형 지원자들의 면접 날이 다가왔다. 다섯 분의 교수님들께서 면접관으로 앉아 계셨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약 4분 가까이 준비해 온 자기소개에 중문과 교수님들은 높은 점수를 주셨고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여대생이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뛰어든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와 같았다. 맨 땅에 헤딩 하듯 공부 잘하는 그녀들을 쫓아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수강인 청에 월~금요일까지 들쑥날쑥 지혜롭지 못한 시간표를 들고 하루 종일 학교에 대기 했다. 1교시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아침 7시부터 출근길에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곳에 몸을 싣고 아침부터 부리나케 오르막과 계단을 뛰어다녔던 기억은 참으로 행복하고 두 번 다시 없을 소중한 캠퍼스 생활이었다.
그렇게 4년 동안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났고, 좋은 학우들을 만 났다. 숙명여대를 대표하는 앰버서더(ambassador) 활동도 참여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졸업할 때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중간에 휴학도 하고 교환학생으로 외국에도 다녀오고 스펙을 쌓고 컴퓨터 학원부터 랭귀지 학원까지 다닐 때, 나는 그저 학교생활을 쫓아가기에도 바빴다. 그제야 나는 정보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나같은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부 어 이 땅을 밟았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 불리한 조건(disability)을 가진 이 사회의 낙오자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곳에 뿌리가 없음이 불만(handicap)이었다. 알량한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당당하게 말도 못하고 살았다. 대학교 4년 내내 탈북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도 없었고, 몰라도 아는 척 넘어가야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에 그지없었다. 그나마 나의 공허함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건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생활 동안 나는 매주 교회는 나갔다. 청년 부에서 찬양 부에서 섬기며 예배를 참석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깊이 없이, 사모함도 없이,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했다. 웃고 떠들고 마냥 좋은 사람 인척 하며 온갖 가면들을 쓰고 교회에 나오는 나란 사람을 바라보면 다시금 회의감에 빠졌다.
일주일 중 주일에는 행복한 척 웃고 떠들었지만, 월요일에서 토요일을 쳇바퀴 속에 살았고, 집 학교 도서관이 나의 최대 활동 영역이었다. 교회에 가더라도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기도하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나는 온통 거짓 속에 감추어 져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뿌연 안개 속에 나는 갇혀 있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배경도 없었던 나는 우리말로 쓰인 성경일지라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그의 나라는 무엇이고 그의 뜻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목사님께 여쭤보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믿음이 더 커지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알게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아마도 목사님은 나에게 장난처럼 하신 말씀이겠지만 나는 시험에 들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도태되었다.
나는 분명 꿈으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인생에 대해, 신앙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누구에게도 묻지 못 했다. 또 그 자격지심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종교니 뭐니 다 제쳐두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대학교 4년 동안 내가 잘한 일을 꼽아보자면 학교를 대표하는 앰버서더(ambassador)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선배님들께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통역하는 자리에 참석하다가 선배님을 통 해 주로 중국 여행객의 국내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 여행업계에서도 상당히 큰 여행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좋게 보신 대표이사 님의 빠른 결정으로 순탄하고도 빠르게 정식 가이드가 되었다. 뒤에서는 나에 대해 최소 조선족이 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족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은 매우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그들이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기로 더 버텼다. 나이도 어렸고 여자라는 이유로 또 조선족이라는 오해로 나의 입지는 좁았기에 실력으로 인정받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서러움에 많이도 울었다. 어떤 날은 ‘조선족인 주제에 한국인 척하고 다닌다’라는 말을 듣고 억울함에 한숨도 못 자고 운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는 탈북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도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난 사실 북한에서 왔어’라고 밝히면 너는 북한에서 왔기 때 문에 안 된다는 시선이 두려웠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싫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데, 차별 받는 것이 싫었기에 더 밝히기가 싫었다.
그렇게 악바리 기질을 발휘하여 인정받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고객의 컴플레인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 날밤을 새워가며 준비했다. 고궁 투어가 있는 날에는 드라마까지 되감아 보며 재미나는 고궁 관련 에피소드를 준비해 갔다. 만나기 전부터 손님들 이름과 나이를 외우고 첫 만남부터 고객들 이름을 일일이 외워서 불러주면서 얼굴과 매치하여 그들을 기억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이 식사를 잘 못 하면 밤새 죽을 만들어서 다음 날 가져다주는 등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디테일을 나만의 무기로 만들었다. 그렇게 애쓰자 고객들의 평가는 자연스럽게 좋았고 나를 자랑스러운 가이드로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여행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고 몇 년 뒤 좋은 조건에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 옮긴 여행사는 비록 신생 회사였지만, 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고 쉬는 날 없이 여러 대형 행사들로 정신없이 일정이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도중 발생한 고객의 사고가 나에게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손님이 화장실 가던 중 넘어지면서 골반 뼈에 금이 가는 사고 가 발생했다. 통상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 직원들 이 직접 나와 수습해야 하지만 회사의 여력이 부족하여 인력이 부족했다. 환자의 입원 수속과 나머지 관광객 행사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부닥친 나는 과부하가 걸릴 뻔했다.
그런데 회사 대표는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대책 없이 이번 일을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알아 서 처리하길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 너무 무책임 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히 행사는 큰 차질 없이 마무리 되었고, 다친 고객도 잘 수습 하여 귀국시켰다. 이번 일은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에 게 일종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던 나는 3개월 쉬겠다 고 통보하고 힐링을 핑계로 한국을 떠나 먼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휴가는 3개월에서 시작한 것이 점점 늘어져 결국 1년을 온전히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주 잊고 살았다.
한국에 가기 싫을 만큼 그곳이 좋았다. 나중에는 정식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고 외국 에서의 소위 말하는 욜로(YOLO,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뜻의 신조어)의 삶을 살았다. 외국에서는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쌓은 가이드 내공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연봉이 증명했다. 나는 결핍과 공허함을 돈과 커리어로 채웠고, 겉모습만 우아한 ‘한 마리 백조’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두 발을 휘젓고 있는 것과 같은 백조 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뒤처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악착같이 자기관리를 해가며 인간관계를 넓혀 나갔다. 나의 언어 능력은 큰 장점이 되었고, 나중에는 유명 인사들과 대기업 임원들을 모시는 VIP 특별 의전 가이드까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자아도취에 흠뻑 취해 살았다. 이렇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믿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살아도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고독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화려함 속에서 일이 끝나도 텅 빈 집에 아무도 없는 어두움만이 나를 반겼다. 자다 가 일어나면 베개를 껴안고 서럽게 울기도 많이 울었다.
어디에 있어도 내 마음 한편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결핍을 일욕심으로 채웠다. 그렇게 코로나19 팬데믹이 밀려오기 전까지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제 나는 과거의 교만과 알량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내 자아가 얼마나 부끄럽고 거짓 이었는지 말할 수 있다. 조선족이라고 오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나는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했던 결핍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나의 죄에서 왔음을 인정한다.
수년 동안 나를 발목 잡고 있었던 출신에 대한 핸디캡(handicap)이 나에게 불리한 조건(disability)이 아니었음을,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 능력(power),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사망 의 골짜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생명으로 옮겨 주신 구세주이셨다. 육체적으로 가진 장애는 없었지만 이 사회에서 스스로 장애(disability)를 겪고 있던 나를 놀랍게도 변화시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내가 가진 그 틈(gap)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셨다. ‘탈북 민’이라는 수식어를 나에게 불리한 조건(handicap)이라고 여겼던 것에서 감사함(grateful)으로 바꿔주신 것도 예수님이셨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고, 깨지지 않는 자아 속에서 고집스러움과 피로가 나를 가득 지배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부정했던 과거를 회개하며 나아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전 5:17) 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남을 덧입었다. 돌고 돌아 이제야 하나님의 시간표에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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