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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영섭의 제안으로 둘은 학교 내 조용한 곳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며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나 지난 토요일 신산리 가서 희수 만났다.”
하고 영섭이 먼저 희수의 말을 꺼냈다.
이 말을 들으며 그럼 토요일 합석을 거부한 것은 희수 혼자의 생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희수가 나보다는 영섭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든 현영이
“잘했네,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보고하니. 내가 너에게 알리지 않고 희수를 만나러 다녔다고 나한테 따지려고 하는 것이냐?”
하고 영섭에게 하는 현영의 말이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다.
“그런 뜻은 전연 없고, 너 희수를 어떻게 생각하니?”
느닷없는 영섭의 물음에 당황한 현영은
“희수를 어떻게 생각하다니?”
하고 되묻는다.
“그래! 희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떻게 생각하다니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하지.”
“정말 그러냐?”
“너 나에게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하니?”
“정말 그러냐고?”
“그래! 정말 그래.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니?”
영섭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자 현영은 당황하여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희수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섭의 생각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가 희수를 여자로서 좋아한다고 하면 영섭이 아직 고등학생인 여자애를 두고 철없이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영섭의 비웃음 같은 말을 들을 것 같아 현영은 자기의 마음을 숨겼다.
영섭이 희수를 만난 것이 몇 번 안 되는데 별일이야 있었겠나 하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현영의 감정을 어느 정도 눈치챈 희수가 혹 지난번에 영섭을 만났을 때 영섭에게 현영에 대하여 무슨 말인가를 해서 영섭이 희수가 곤란해 한다며 자기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실은 너에게 양해를 구할 것이 있어서.”
“나한테 양해를 구한다고?”
“그래!”
“나한테 무슨 양해를 구해.”
“너한테 이런 말을 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나 희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영은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으며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했다.
이 자식이 이 말을 하려고 한 것을 내가 모르고 이 자식 작전에 넘어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그게 무슨 말이야? 특별한 감정이라니?”
“고등학생인 희수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좀 쑥스럽고 네가 웃을지 모르지만, 희수를 좋아하게 됐어, 여자로서 그래서 희수와 장래를 약속하려고 해. 희수가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려고.”
정말 쑥스럽고 어색한 생각이든 영섭은 한꺼번에 이렇게 말했다.
영섭의 말을 듣고 자기가 먼저 그런 말을 못 한 것을 후회하며 현영이 희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하고서 이제와서 아니다, 나도 희수를 여자로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못난 생각이 들어 뒤집히는 마음을 누르며
“희수도 같은 생각이야?”
하고 물었다.
“희수에게는 말하지 않았어.”
“희수의 생각도 확인하지 않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물론 그런 면은 있어, 그렇지만 희수도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으로 희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너에게 말하는 것은 희수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네가 나보다 희수를 만나는 기회가 많으니까 그럴 때 내 얘기를 잘 좀 해 달라고. 그러면 희수가 나에 대해 더 많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어 나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이성 문제에 대하여 영섭은 아직까지 이렇게 서툴렀다.
그리고 그만큼 친구로서 현영을 믿었다.
‘미련한 놈 웃기고 있네. 다른 데는 똑똑한 놈이 여자 문제에는 왜 이렇게 덜 떨어졌는지 모르겠어, 내가 저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희수를 자주 만나러 다니는 것을 보면 내가 희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이지 그것도 모를 만큼 그렇게 네가 숙맥이란 말이냐?
그러나 어쩌면 이놈이 이처럼 숙맥인 것이 잘된 일인지 모르지
그리고 내가 있는 한 네가 희수와 결혼하는 것 같은 일은 없어, 절대 그렇게는 안 돼.’
영섭이 희수를 좋아한다는 말과 희수도 영섭에게 좋은 감정이라는 말에 분기와 오기가 생긴 현영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야 어렵지 않지, 우리는 그야말로 불알친구이잖아. 그런데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 여학생을 데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네가 장가를 가려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5년 이상 기다려야 하잖아. 그 안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아.
희수의 생각도 확실히 모르고 또 희수가 혹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5년이면 그 생각이 안 바뀐다고 누가 보장해.”
희수를 좋아하기는 자기도 같은 입장이면서 현영은 이런 말을 어렵지 않게 했다.
아니 어쩜 현영은 희수와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건 그래, 그래도 나는 내 생각이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거야. 희수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니냐?”
“열부 났네, 그거야 네 마음이지, 그러나 희수 주위에 남자가 너와 나뿐이냐? 고등학생인 지금도 그렇고 대학을 가면 얼마나 많을 텐데.”
“나도 그런 변수를 모르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희수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내 마음을 고백할 거야.”
‘고백을 하던지 고천을 하던지 네 마음대로 해봐라. 그때쯤이면 희수는 이미 내 여자가 되어 있을 테니’
라고 생각하며 현영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누구나 자기의 계획은 세울 수 있어 그렇다고 그 계획을 모두 이루는 것은 아니지. 세상일이 모두 그렇게 뜻대로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왜 곤한 삶을 살까?”
이렇게 말하고 더 이상 영섭을 대하는 것이 싫어진 현영은 다른 볼일이 있다고 하고 영섭과 헤어져 하숙집으로 돌아오며 영섭의 작전에 말려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희수의 말을 꺼내 자기를 당황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희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하게 하고 영섭이 희수를 좋아한다는 말을 해서 자기를 꼼작 못하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그러자 분노가 치밀었다.
‘영섭이 이 자식이 꾀를 써서 순진한 척하면서 내가 희수에게 접근 못 하도록 하려는 것을 내가 눈치도 못 채고 당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그냥 당할 수만 없지.’
‘한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 오기로라도 너한테 질 수 없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보영이 영섭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니까 이 일을 보영에게 이야기하면 보영이 어떤 반응을 할까? 그것도 재미있겠다. 아마 보영이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보영이 영섭이를 잡으면 희수는 자연 내 차지지.
그러니 어떻게 든 보영이 이 일을 알리되 자연스럽게 알게 하여야지’
현영과 헤어진 영섭도 생각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현영이 한 말이 어쩜 모두 옳은 말이긴 하지만 희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는 현영이 그냥 “그러냐? 축하한다. 앞으로 잘해봐라. 내가 도와줄게” 하지 않고 이런저런 말로 부정적인 쪽으로만 말을 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또 혹시 현영도 희수를 좋아한다는 현수의 말이 참말이어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영이 희수를 좋아하더라도 희수의 생각이 어떤지를 확실히 알면, 자기를 현수 친구인 오빠로 생각하는지, 지난번 적성을 다녀간 다음에 한, 현수의 말로는 희수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했으나 그것이 확실한 것이고 정말로 이성의 감정으로 좋아하고 있는지, 현영에 관한 생각은 어떤지 하는, 그런 것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좀 더 떳떳하게 현영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아직 고등학교 학생인 희수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고 희수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하는 생각도.
그래서 답답한 생각이 든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현영은 숙영이 생각이 났다.
토요일 날 영섭과 희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뒤 돌아설 때 숙영이 보고 싶더니 지금도 마음이 울적하니까 숙영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자기가 숙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우스운 한편으로 그만큼 숙영이 자기에게 격이 없고 편안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영에게 전화를 했다.
숙영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희수에 빠져 숙영을 만나지 못한 것이 일주일이 가까워 온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저 현영이예요.”
“오! 현영이 학생?”
“네! 숙영이 좀 바꾸어 주세요.”
“숙영이 지금 집에 없어.”
“외출했습니까?”
“아니야. 그저께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미국 갔어. 치료받으러. 떠나기 전에 학생에게 알려준다고 전화기로 하숙집으로 시골집으로 전화를 여러 번 하던데 통화가 안 되더군”
아마 현영이 영섭이네를 뒤쫓고 있을 때이었는가 보다.
“아 네 그랬군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었는데---.”
“계획은 진작 잡혔는데 숙영이가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미루고 있었어, 그런데 지난번 학생을 만나고 와서 갑자기 가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서둘러 보냈어. 마음이 바뀔까 봐.”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야 우리는 학생한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 이번에 치료받으러 가는 것도 학생 때문에 결심을 한 것 같아.”
숙영 어머니의 이 말에 지난번 만났을 때 희수의 생각으로 숙영에게 좀 데면스럽게 군것이 숙영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현영은 마음 한쪽이 가시로 찔리는 것 같았다.
숙영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닌 자기의 어정쩡한 태도에 스스로 미안한 감이 들어면서 기슴이 아픈 것은 왜 일까
“저를 너무 좋게만 보시는군요.”
“그렇지 않아 우리는 사실대로 말할 뿐이야.”
“미국에 얼마나 있게 됩니까?”
“아직은 확실치 않아, 3개월이 될지 6개월이 될지 더 될지.”
“저도 숙영이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길 빌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진정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은 자기도 진정으로 대하는 가보다 현영이 숙영이네에게는 진정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아니면 숙영의 어머니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
“고마워! ”
어머니의 말에도 진심이 배어 있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 현영은 여름방학 이후 희수를 만나는 일로 또 학교 축제로 인해 동아리 모임이 연기되는 등 여러 가지 일로 참가하지 못했던 산악회 동아리에 참석했다.
영섭과 보영도 동아리에 참석해 오랜만에 세 사람이 같이 만났다.
“오랜만이다.”
먼저 영섭이 인사를 했다.
“오랜만은 무슨 지난 월요일에 만났었잖아?”
“5일씩이나 못 보았으니 오랜만이지.”
“근래 와서 언제 우리 자주 만났냐?”
“그래! 미안하다. 국가 자격시험 준비와 입대 준비를 위해 학년 마무리 정리하느라 내가 그동안 시간을 못 냈다. 앞으로는 자주 보자.”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네가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학교가 다 아는 일이야.”
영섭은 이렇게 삐딱하게 나가는 현영의 대답을 들으며 현영이 지난번 영섭의 희수에 대한 생각을 듣고서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현영도 희수에 대하여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너에게는 숙영씨가 있으니 희수는 나에게 양보해라.’ 하는 말을 하고 싶다.
이때까지 영섭은 이렇게 이성에 대하여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다.
그러나 보영이 앞이라 그런 말을 못 하고 미안한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웃고 있다.
“현영이는 왜 심기가 불편한데?”
분위기가 평소 같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옆에 있던 보영이 한마디 한다.
“심기가 불편하기보다는 그렇다는 말이다.”
영섭에 대한 보영의 마음을 짐작하는 현영은 자기가 계속 영섭에게 엇나가면 그렇지 않아도 자기를 좋게 보지 않는 보영도 자기를 더 좋지 않게 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희수의 일로 보영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그로서는 보영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눙쳐버리고
“그리고 너희들은 자주 만났냐?”
하고 보영을 보고 묻는다.
“그래!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어. 그보다도 너희들 싸웠냐? 분위기가 영 아닌데. 왜 옛날 같지 않냐?”
보영이 다시 묻는다.
“아니야, 싸우기는 우리가 싸울 군번이냐? 오랜만에 만나서 그냥 장난 좀 한거야.”
분위기가 어색하고 나빠지면 영섭이나 보영이가 방어 자세가 되고 그렇게 되면 이들과 만남이 부자연스럽게 되어 자기 앞에서는 영섭과 보영이 행동을 자제하게 되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돼 일을 꾸미는데 손해라는 생각에 현영은 다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지만 영섭의 눈에는 현영의 그 행동이 많이 어색해 보인다.
“그래? 난 너희들이 싸운 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보영이 그렇게 말한다.
“아니야. 그런 일 없어.”
이번에는 영섭이 댓구했다.
“그러면 됐구.”
“참! 오늘 토요일인데 영섭이는 오늘 희수 만나려 안가니?”
현영이 틈을 타 의도적으로 묻는다.
“오늘은 안가, 희수도 입시 준비를 하여야 하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기로 했어.”
“그렇게 만나서 정이 들겠냐?”
“정도 믿음으로 굳어지니까.”
그 말을 들은 현영은 속으로 ‘이것들이 어디까지 이야기가 됐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며
“그런가? 너는 항상 내 생각을 앞서가는구나.” 했다.
“희수가 누구야?”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보영이 묻는다.
“신산리에 사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현영이 때를 놓칠 새라 대답한다.
“그런데---” 보영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묻는다.
“현수라고 영섭이 과의 친구가 있는데 올봄에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만난 고등학교 여학생 이름이야, 영섭이 그 여자애와 장래를 설계한 데. 결혼까지 생각한다는군”
그 말을 하며 현영은 보영의 얼굴을 살핀다.
현영의 말에 쑥스러운 생각에 딴전을 피우고 있는 영섭은 몰랐지만, 보영의 얼굴에서 일시적으로 핏기가 없어지는 것을 현영은 보았다.
그리곤 자기의 생각대로 보영이 영섭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영섭이가 드디어 상대를 찾은 모양이네.”
이내 억지로 평정을 찾은 보영이 과장된 표현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숨겼다.
“아직은 몰라, 희수가 대학생이 되고 나면 내 심정을 고백하려고 해.”
말하며 영섭은 이상하게 보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된다.
“알았어, 잘되기 바래.”
이렇게 말하며 보영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를 붙잡고 놓지 않던 현영으로 영섭에게 다가가지 못했다가 현영이 근래 와서 자기에게서 멀어진 것을 영섭도 알게 되어 이제는 마음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런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영섭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못나게 굴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을지 모르는데 하고 그때, 중학교 때의 행동을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해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아무리 중학생이었더라도 어리석게 나는 왜 그녀의 말을 믿고 따랐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나타난다 해도 너무 늦었다.’
‘아니 나는 왜 바보처럼 영섭에게 좋아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까?’
‘나는 이렇게 내 마음을 영섭에게 전해보지도 못하고 끝나야 한단 말인가?’
“보영아!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상념에 잠겨있는 보영을 현영이 부른다.
“응! 아니야, 그냥 무엇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너 쇽크 먹은 것 아니냐? 영섭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니까?”
“쇽크는 무슨---”
하고 당황해하는 보영에게
“아니 너 쇽크 먹었어.”
현영이 강조를 한다.
“그래 쇽크 먹었다. 네가 좀 위로해 줘라.”
보영은 속으로는 슬프고 당황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이 농으로 받는다.
현영은 보영이가 영섭이를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게 하기 위해 농담인 것처럼 한마디 더 한다.
그래서 보영이 이성으로서 영섭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영섭이 태도가 바뀌어 영섭도 보영이를 좋아하고 희수를 단념하게 되면 자연히 희수는 자기의 여자로 남게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쇽크는 내가 위로해서는 안 되지. 영섭이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 해서 생긴 것이니까 영섭이가 위로해 주어야지.”
“그래, 영섭아 네가 나 위로 좀 해줘라.”
속마음을 현영에게 들킨 것 같아 화가 났지만, 화를 내면 정말로 자기의 속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한쪽으로는 정말로 영섭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보영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 말을 받는다.
“무슨 말이야? 너 정말 쇽크 받았어?”
영섭이 당황하여 황황히 묻는다.
“애는 농담도 못 하냐?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으면 축하할 일이지 내가 왜 쇽크를 받니? 현영이가 농담해서 나도 농담 좀 한 거야.”
“무슨 농담들을 그렇게 하니, 나는 당황했잖아.”
‘이 등신아 농담이 아니야 보영이는 정말 너를 좋아하고 있어.’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보영을 보는 현영은 안타까움이 인다.
보영이 영섭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잡아야 자기가 희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천연스럽게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는 보영을 보며 현영은 보영의 진심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까 보영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것도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 너도 너다. 그런 것 가지고 당황하면 어떻게 하니? 앞으로는 농담도 못 하겠다. 그런데 나 친척 집으로 손님이 오기로 되어있는 것을 깜박하고 있었네. 나 먼저 갈게, 미안해.”
하고 보영은 돌아섰다.
“벌써 가려고,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 좋을걸.”
영섭의 이 말을 귓가에 흘리며 멀어져 가는 보영은 영섭이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되자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가까운 지하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보영은 터지는 울음을 손으로 막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영섭이에게 애인이 없을 때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을 못 해도 자기가 영섭의 여인으로 생각하고 언젠가는 영섭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오리라 여기며 그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영섭이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자기의 사랑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왜 나는 영섭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할까. 현영이도 멀어진 마당에.’
‘지금이라도 영섭에게 고백할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면 영섭이 내 마음을 받아줄까?’
‘아니 오히려 희수라는 여학생을 좋아한다는 영섭은 당황해하고 나의 모골은 비참해질 것이다.’
‘그리고 영섭의 성격상 희수라는 여학생에게 기울어진 영섭의 마음은 나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다.’
아!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잡을 수 없는 내 사랑아!
미어지는 이 가슴에 쌓이는 슬픔아!
한참을 울고도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던 보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옷맵시를 고치고 화장을 고치고 거리로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몇 명 안되는 손님이 탄 버스 안에서 자리에 앉은 보영은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
머리를 차창에 기댄 체 멍한 눈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체에서 나온 빛이 보영의 눈에 반사되는 것뿐.
돈암동 동사무소 앞이라는 버스 안내 멘트에 정신을 차리고 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걷던 보영은 누군가가 자기의 팔을 잡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놀랬다.
자기의 팔을 잡은 사람이 뜻밖에도 현영이기 때문이다.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오늘도 너를 못 만나는 줄 알고 그냥 가려던 참이야.”
“네가 여기 웬일이냐?”
“너하고 할 얘기가 있어, 왔어.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긴데?”
“와보면 알아.”
“오늘 나 바쁘다잖아? 다음에 하자.”
보영이 짜증을 내자
“바쁜 사람이 이제 와? 내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현영이 보영의 손목을 끈다.
그래서 둘은 언젠가 전에 들어갔던 다방에 마주 앉았다.
“너 울었냐? 눈이 충혈된 것같이 보인다.”
현영이 물었다.
“울긴 내가 왜 울어. 울 일이 있어야 울지.”
“솔직히 말해봐. 너 영섭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알고 슬프고, 실망해서 운 것 아니냐?”
“소설 쓰지 마, 영섭이에게 여자가 생겼는데 내가 왜 우냐?”
“네가 영섭이 좋아하는 것 영섭이만 모르지 다른 사람은 다 알아.”
“너 말고 누가? 여기까지 그런 실없는 소리 하려고 좇아왔냐? 더 할 말 없으면 나는 일어날래.”
“실없는 소리라니? 아니지 나는 지금 심각한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본론은 지금부터야.”
“무슨 소리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영섭이를 네가 좀 잡아주라. 실은 내가 희수를 무척 좋아하는데 영섭이가 희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는 말도 못 했다. 네가 영섭이를 잡아주면 내가 희수를 잡을 수 있지 않냐.”
그 말을 듣자 아까 영섭과 셋이 만난 자리에서 현영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 현영이 자기를 떠나게 된 것이 이번에는 희수라는 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묘한 감정이 되었다.
현영이 자기를 떠난 것에 대하여는 희수라는 여자애가 고마운데 영섭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울한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차라리 현영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말하고 현영의 도움을 받을까, 현영이도 희수라는 애를 좋아한다면 희수를 현영이 좋아하게 하고 자기는 영섭을 잡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영섭을 붙잡고 싶지는 않고 영섭도 그렇게 붙잡히지는 않을 것이고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면 영섭은 자기를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문제에 내가 왜 개입하냐?”
“네가 영섭이를 좋아하니까 너는 영섭을 잡아 네 사람을 만들고 나는 희수를 내 사람으로 만들면 너도나도 서로 좋잖아.”
“그런 소리 하려면 그만 가자.”
“그러지 말아.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네가 영섭이를 좋아하는 것을 나는 알아. 전부터 네가 영섭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짐작했고 아까 영섭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네 얼굴에서 핏기가 없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어. 그리고 지금 네 눈은 운 사람의 눈처럼 충혈되어 있어. 그래도 거짓말을 해.”
“그래! 설령 네 말대로 내가 영섭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일방적으로 영섭이를 붙잡고 싶지 않아.”
“너는 한 번도 영섭이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
“영섭이를 좋아하지만, 이성으로 좋아한 것은 아니니까?”
“영섭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얼굴에 핏기를 잃고, 눈이 충혈되도록 운 네가 영섭을 이성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니?”
“네가 어떻게 보고 그러는 줄 모르지만 나는 운 적도 핏기를 잃은 적도 없어.”
“네가 정 이러면 내가 영섭에게 말한다. 네가 영섭을 연인으로 무척 좋아한다고.”
“그건 네 마음대로 해. 그렇지만 영섭에게 망신을 당할 것은 각오해야 할 거야. 내가 그 말을 할 테니까?”
“무슨 말?”
“네가 희순가 하는 애를 무척 좋아해서 영섭이를 희수에게서 떼어내려고 내가 영섭이를 좋아한다고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너 참 독하다.”
“독하다니 내가 왜 독해. 네가 헤픈 거지.”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은?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야?”
“넌 나 무시하냐?”
“난 너 무시한 적 없어.”
“너 지금 말하는 것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그건 네 자격지심이지. 나는 너 무시한 적 없어. 그리고 이런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더 이상 말이 될 것 같지 않아 멍하니 보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댓글 즐~~~감!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