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어려움도 삶의 일부
저녁 무렵 바닷가로 나갔다.
새 한 마리가 붉은 노을을 가슴에 안고 드넓게 펼쳐진 검푸른 바다 저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동해 위로 왜 새가 날아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지난 겨울이었다.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면서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의 모래 위에 새 한 마리가 죽어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양다리를 단정하게 아래로 접고 잠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새에게서 나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다 살아낸 숙제를 다한 평안함 같은 걸 느꼈다.
어미 새에게서 작은생선 몇 마리 얻어먹으면서 잠시 보호받던 새는 둥지를 떠나
일생 천적 속에서 살며 자기의 가족들 돌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일생도 조용히 죽어 있는 그 새의 운명과 비슷하지 않을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라는 둥지 안에는 가난과 외로움이 공기같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이 가난할 때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
부유해 본 적이 없으니까 가난을 자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그냥 밀려왔다 물러가는 일상의 파도일 뿐이었다.
다만 꼭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때 우리집에 돈이 없는 걸 알았다.
더러 우리보다 더 궁핍한 판자집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부자 같은 착각에서 미안해 하기도 했었다.
둥지를 떠나 사회에 나가면서 나를 잡아 먹으려는 많은 천적을 만났다.
잡아 먹힐 뻔 했던 몇몇 씁쓸한 장면은 머릿속에서 삭제가 되지 않는다.
초급장교시절 육군본부에 소환되어 뇌물죄로 조사를 받았었다.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결백이 인정되는 과정에서 받은 모멸감이 지금도 앙금이 되어 남아있다.
변호사를 하면서 이따금씩 악마의 방문을 받았다.
한 변호사 부인의 사건을 맡았던 적이 있다.
금세 아주 질 나쁜 여성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거절하자 그녀는 이렇게 사정했다.
“변호사가 일을 그만 뒀다고 하면 재판장이 나를 나쁘게 볼 수 있으니까 서류상으로만 그냥 변호사로 있어 주세요”
그 요청을 끊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일년 후 내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소장이 날아왔다.
그 서류에는 내가 소송을 맡고도 법원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악덕 변호사로 되어 있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내 인생에 깊이 들어왔던 또 다른 고통이 있다.
내게 이혼소송을 맡겼던 한 여성은 변호사인 내가 소송의 상대방인 남편으로부터 돈을 먹고 회유당했다고 의심했다.
편집증 환자였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공격하니까 대법관까지 그녀의 편이었다.
그녀의 병적인 집착은 이십년간 나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혔다.
독이 묻은 화살촉이 박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 때 성경 속의 십자가는 상징이자 은유였다.
예수는 너도 나같이 한번 그걸 져 보라고 했다.
십자가는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어려움을 견디고 수치를 겪는 현실이라고도 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의뢰인이 시효를 하루 앞둔 사건을 변호사를 개업한 친구에게 가지고 왔었다.
다른 일로 바쁜 친구가 무심히 그 시효를 넘겨버렸다.
그걸 알게 된 친구는 바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 손해를 배상할 생각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나중에 확인된 실제의 배상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다른 경솔한 죽음을 보았다.
턱없는 모략과 비난으로 궁지에 몰린 선배 변호사가 있었다.
법관시절부터 개결한 자존심을 가졌던 인격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죽었다. 그런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뻔뻔스럽게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변호사는 업무상 알게 된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고의적으로 그 비밀을 폭로한 경우가 더러 있다.
벌을 받더라도 폭로하고 싶었다. 업무상 기밀누설죄로 고소가 되어 피의자가 되기도 하고 재판을 받은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형사가 검사가 주는 모멸감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의 하나였다.
그들의 말이 내 얼굴에 내뱉는 침 같기도 하고 뺨으로 날아오는 주먹 같기도 했다.
그 비슷한 굴욕감을 못 견디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다.
노회찬 의원은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날렸다.
박원순 시장은 산으로 가서 죽었다.
그들의 죄가 목숨과 바꿀 만한 중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목숨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경우도 봤다.
자존심상 소송에서의 패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
감옥에서 십오년 만에 출소한 죄수 한 명은 일자리가 없고 내가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묵는 실버타운 옆으로 십일호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굵은 빗방울이 총알같이 창으로 떨어지고 있다.
넓은 바다가 성을 내면서 흰 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내고 있다.
폭풍 속에서도 배는 견디면서 떠 있어야 한다.
어려움을 참아내며 삶을 살아내는 것도 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