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이 나가고도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던 보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타인이 인정하는 자기의 사랑을 부정하여야 하는 그것도 강하게 부정하여야 하는 자기의 입장이 처량하고 서글퍼 다시 두 뺨으로 눈물이 흐른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에 섞인 보영은 걷는다기보다 그 들의 흐름에 맞추어 몸을 맡긴다.
이들은 가슴에 무슨 사연을 품고 갈까
기쁜 사연, 슬픈 사연, 근심거리. 분통 거리, 안타까움, 즐거움 모두는 한 가지씩 사연을 가슴에 담고 가리라.
그러나 늘 같은 사연만 갖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 만나는 사람과 부딪치는 일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사연을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연을.
왜 조물주는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주셔서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심(欲)의 칠정을 느끼게 하는가.
친척 집으로 들어가는 보도에는 길가 은행나무에서 낙엽 되어 떨어진 은행잎이 불어오는 바람에 뒹굴고 있다.
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보이는 것도 허한 것인가 오늘따라 마른 낙엽이 보영의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들고
바람에 흔들리는 길가의 빛바랜 현수막이 더욱 처연하게 보인다.
다음날 등교를 하여 수업을 받던 보영은 혜선 선배 생각이 났다.
보람이 일로 해서 오해를 받고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을 떠난 혜선 선배의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의 자기의 마음을 혜선 선배는 이해할까?
수업시간 내내 강의하는 교수의 말소리는 안 들리고 현영이 어제 다그치던 말들과 희수라는 이름이 귀에서 맨 돈다.
방과 후 보영의 허전한 마음이 혜선 선배를 찾게 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보영을 혜선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게 누구야? 보영이 아니냐? 웬일로 네가 나를 다 찾아왔냐? 어쨌든 반갑다.”
“언니 미안해요. 오랜만이죠?”
“그래 오랜만이다. 한 세 달 정도 된 것 같다. 우리가 만난 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잘 지냈어요. 언니는요?”
“나도 잘 지냈지. 근데 정말 무슨 바람이 불었어?”
“갑자기 언니가 보고 싶어서요.”
“그래 잘 왔어. 어디 가서 저녁 겸 술이나 한잔하자.”
그래서 둘이는 밥집에 마주 앉았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혜선은 분명히 보영이 무슨 일이 있어 자기를 찾았다는 생각을 했으나 보영이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일상적인 짤막한 대화를 나누며 잔만 비웠다.
술기운이 오르자 마음이 흐트러진 보영은 허전함을 더 크게 느끼며 참고 있던 슬픔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여울지기 시작한다.
술잔을 든 손이 가볍게 떨린다.
“왜 그래? 보영이, 무슨 일이 있어?”
“--- ---”
말 없는 눈물이 보영의 두 볼에 흘러내린다.
“오늘 보영이 너 정말 이상하구나.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눈물을 닦은 보영이 간단히 영섭과의 일을 말했다.
“그랬구나. 그래 전에 모임에서 네가 영섭이를 보는 눈이 좀 달랐었어, 그래도 그때는 너희가 친한 친구 사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꽤나 눈치가 둔하구나. 그때 내가 알았으면 어떻게 좀 했을 텐데. 네 마음이 많이 아프겠다.
나도 그런 경험이 없지 않으니 대강은 짐작할 수 있어. 내 생각에는 사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평범하게 생각을 해. 그러면 너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하여 당장 결판을 내 버리는 것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돼, 내 경험이야.
그래 물론 말은 쉬운데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야. 특히 네 경우에는 더해 너는 아직 영섭이한테 네 마음도 전하지 못했잖아.”
“고마워요. 언니, 언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좀 편안해지네요.”
“그래 앞으로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
누가 그랬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은 보영은 영섭과의 관계를 전과같이 유지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혜선의 말과 같이 최선이고 그래도 그것이 영섭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섭을 만난 후 현영은 몇 번 희수를 찾아갔지만 한두 번 그것도 몇 마디 이야기만 하고 헤어졌을 뿐 공부를 핑계로 피하는 희수를 자주 만나 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정말 공부 때문인지 영섭이 때문인지 확실한 이유를 모른 체.
하기야 희수도 어린 마음에 그렇게 가까운 사이의 오빠처럼 자주 만나던 현영에게 영섭을 좋아해서 현영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현영이 찾아오면 되도록 피하며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만나주곤 하였다.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 영섭은 육군으로 자원입대 원서를 제출하며 2월 말이나 3월초 입대를 희망했다.
영섭이 군대를 자원입대 한다는 말을 들은 현영은 처음에는 자기도 자원입대를 하는 것이 좋은지, ROTC를 지원하는 것이 좋은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줄 몰라 고민을 했다.
영섭이 없는 동안 자기는 남아서 ROTC를 받으며 희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같이 군대를 다녀와서 영섭과 희수를 놓고 싸워야 하는지
희수가 3학년이 되면 공부를 핑계로 더욱 현영을 안 만나 주고 희수 말대로 대학입학 후부터 만나 볼 수 있다면 현영이 4학년 때부터 1년간 희수를 볼 수 있고 4학년이 끝나면 자기도 군에 입대하여야 하며 영섭이 군대 생활이 26개월이라면 자기가 군대가 있는 동안 1년 내지 1년 반 동안 영섭에게 현영이 없이 희수를 만날 수 있는 자유시간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현영은 ROTC를 받기로 하고 ROTC에 지원서를 냈다.
영섭이 없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희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영섭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방학이 끝나갈 무렵 영섭의 입대 일자가 확정되어 통보가 왔다.
입대 일자는 3월20일 소집장소는 논산훈련소.
영섭은 2월 말경 서울에 올라가서 군 입대에 따른 휴학계를 제출하고 계속해서 집에서 입대일까지 쉬기로 했다.
군에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과 친구들이 입대 전에 만나 송별회를 하자고 영섭에게 신신당부했다.
현영은 3월초 개학을 하면서 ROTC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영섭은 입대를 10여일 앞두고 신산리로 희수를 만나러 갔다.
이번 걸음은 꼭 만나야 하는 것이기에 어제저녁 희수에게 전화를 해두었다.
희수가 적성을 다녀가고 난 후 몇 번의 만남에서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어 그동안 봄의 새싹 같은 사랑의 싹을 키워 왔다.
겨울 방학 초에 찾아왔고 가끔 전화만 하던 영섭이 1개월 반 만에 온다는 전화를 받은 희수는 아침부터 설레었다.
보통은 신산리에 도착하여 전화하던 영섭이 미리 전화까지 하고 오는 것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만 희수는 예측할 수가 없다.
희수에 대한 영섭의 마음을 알고 있는 현수가 희수에게 영섭이 군대 간다는 말을 해준다는 것을 영섭이 알리지 말라고 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조금이라도 심적인 부담을 덜 주고 싶다고 입대 전에 자기가 말하겠다고.
약속시간에 약속한 빵집에서 기다리던 희수는 들어서는 영섭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섭도 손을 흔들며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온다.
우유와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밖으로 나온 희수네는 김밥 등 가벼운 점심 식사를 마련해 가지고 작년 가을에 올랐던 신산리 뒷산을 오른다.
때는 이르지만 산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나뭇가지에는 새잎을 위한 망울이 조금씩 피기 시작하고 길가에 있는 둠봉가 버드나무 가지에는 작은 버들강아지가 맺히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쑥들이 파릇한 새싹들을 피고 진달래도 진분홍 꽃을 피우기 위해서 봉우리에 한 것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으며 이편 기와집 울타리 겉에는 노란 개나리가 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이고 저 건너편 밭에는 부지런한 농부가 벌써 밭에 거름을 내고 있다.
이제 좀 있으면 들에는 아지랑이가 일고 하늘에서는 종다리가 노래를 하리라.
살랑이는 봄바람과 포근한 봄볕을 맞으며 잡아주고 끌어주며 산을 오른 두 사람은 양지바른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먹으며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빠 우리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방금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둘이는 이런 말을 하며 마주 보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가 다하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 오자 영섭은 군에 입대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희수가 놀라며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언제 입대해요?”
“이달 20일.”
“어디로 가는데?”
“논산훈련소.”
“그럼 오늘이 송별회네?”
“그런 셈이지.”
“진작 말을 하죠. 선물이라도 하나 마련하게.”
“선물은 무슨, 그냥 희수의 마음을 가지고 갈 거야.”
“그래 줄래요.”
“그럼!”
“그럼 내 마음을 이렇게 싸서 오빠 가슴에 이렇게 담아 줄게.”
희수는 자기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마음을 싸는 시늉을 하고 그것을 다시 영섭의 가슴 위에 살포시 놓는다.
영섭은 그 두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대고 다시 자기의 마음을 싸는 시늉을 해서 희수의 가슴에 대고는
“내 마음은 이렇게 희수 가슴에 담아 주고 간다.”
희수는 입에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희수야 울지 마. 많아도 3년 후면 우린 늘 같이할 수 있어. 그리고 외출이나 휴가 오면 만날 수 있잖아.”
“그래요. 이제부터는 오빠는 내 마음을 나는 오빠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으니까 우리는 한 몸이라 헤어져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냐.”
“그래! 희수야! 정말 그래! 우리의 보다 행복한 내일을 위해 잠깐 동안의 헤어짐을 서러워 말자.”
“오빠와 같이 할 행복한 내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요. 얼른 어른이 됐으면.”
“그런 설레임으로 우리의 내일을 기다리자.”
“오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오빠와 같이할 수 있다면.”
“나도 희수와 함께라면 아무리 긴 기다림도 순간이 될 거야.”
“오빠 내가 편지할게, 오빠도 편지 많이 해주어야 해요.”
“그야 물론이지.”
“대학에 들어가면 오빠한테 면회 갈 거야.”
“그러면 내가 무척 행복할 거야.”
두 손을 맞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은 이제 정말로 순수하고 천진한 사랑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서로에 가슴에는 절대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할 것 같은 사랑이 자리 잡은 것이다.
갑짜기 어디 좀 다녀 올 일이 생겨 한 일주일 쉴 것 입니다
독자 여려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구리 천리향님
무혈님
지키미님
다녀가심에 감사드립니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다시 연재를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