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서너 번 정도 미국의 흑인 교회 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한 일도 있구요. 그런데 이 흑인들이 굉장히 아주 emotional하고 감정적이고 그래서 예배 시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굉장히 당황하기도 했는데 제가 설교를 할 때 한 마디를 하면 회중석에서 성도들이 두 마디, 세 마디씩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옳소, 맞습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나갑시다, Ye brother, preacher, let's go. 막 그냥 떠들고 그러니까 당황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너무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그러다가 한국 교회에 와서 하려고 하니까 너무 조용하고 심심하고 그렇더라 구요.
흑인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흑인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이런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한 흑인 성도가 걷게 하소서 그랬다 말이죠. Let it walk. 다른 성도들이 일제히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목사님도 계속 말씀하시면서 오늘 교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간은 너무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달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또 그 성도가 달려가게 하소서. Let it run. 달려가게 하소서. 달려가게 하소서. 달려가게 하소서. 일제히 막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이 계속 설교를 진행하면서 지상명령의 성취를 세계 복음화의 과제는 우리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교회는 달려가는 것 정 도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날아가 야 합니다. 뭐라고 그랬을까요? 날아가게 하소서. Let it fly. 날아가게 하소서. 날아가게 하소서.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명령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선교에 헌신해야 되고 특별히 선교 헌금에 헌신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 다 이 선교 헌금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그 말을 시작했던 흑인 형 제가 갑자기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돈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 얘기라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 얘기를 하셨을까요 안 하셨을까요? 하셨어요. 적게 하셨을까요 많이 하셨을까요? 성경 읽어 보셨습니까?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한 신약학자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교훈의 6분의 1은 돈과 관련된 교훈들이라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읽어보시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1은 돈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 이 달란트가 화폐 가치거든요. 또 포도원 품꾼의 비유, 품삯을 받는 돈에 대한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 이 비유 가운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거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것은 돈에 대한 관리를 뜻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트라는 영성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목사님은 그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가 있다. 그 분은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침례교의 신학자인 헤롤드 피케트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출발점은 바로 십일조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 십일조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장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이 창세기 14장은 소위 팔레스타인 땅에서 요단강 동쪽 편으로 있었던 4명의 왕이 그돌라오멜이라는 사람을 맹주로 해서 요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을 침범하는 데서부터 창세기 14장의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14장1절을 한 번 보십시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그돌라 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이것은 다 바벨론 파사 지역의 지명들의 이름입니다. 그 지역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동쪽의 왕들 4명이 연합해서 그 돌라오멜 이라는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이 요단 강을 넘어와서 팔레스타인 땅 가나안 땅을 침입했는데 특별히 사해 남쪽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섯 도시 국가의 왕들을 침략했습니다. 2절에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왜 전쟁이 일어나느냐? 우리는 전쟁의 동기를 4절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자, 14장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한 지라"
어떻게 배반했을까? 상대적으로 약소한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큰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섬겨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느 날 아마도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편에서 볼 때는 반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서 가나안 땅을 침략해 들어와 다섯 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 저 유명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자, 창세기 14장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 고 연습한 자 삼 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조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헤브론 지역에 있었던 아브라함도 일종의 도시 국가의 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군대, 자기가 길렀던 일종의 사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 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저 북쪽의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15절에 보시면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일종의 기습작전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밤중 에 쳐들어오니까 아브라함의 군대가 얼마인지 모르는 당황했던 사람들이 이제 막 서로 좌충우돌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입니다. 기적적인 전쟁의 승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한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개선의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그 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7절 "아브람이 그돌라 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18절에 보시면 그를 맞이하고 환호하던 행렬 가운데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19절 축복했어요. 개선 장군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을 때 20절에 보시면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 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감격해 하며 그가 얻었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쳤더라. 성경에 최초의 십일조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 이래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여전히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십일조를 할까요?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해야 할까요? 십일조의 영성이 주는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에 승리했습니다. 그 자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개선의 여로에서부터 만났던 살렘 왕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다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무얼 깨달았을까? 아! 나는 축복을 받는 자로구나. 왜냐하면 이 때 특별히 등장했던 멜기세덱 이라는 사람은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쉽게 어떤 사람이라고 연 상이 됩니까?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 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내가 전쟁에 승리했고 또 승리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맞아주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들을 환영하고 있는 이 풍성한 대접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축복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 사건의 출발점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만남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맨 처음 만나시는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이미지가 많아요. 하나님의 역할이 다양합니다. 창세기 에 보시면 맨 먼저 만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을 창조하시고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 1장에 그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우리가 성경에서 맨 처음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축복하시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 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생존하는 것, 우리가 호흡하는 것, 우리가 일할 수가 있는 것, 우리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미고 그리고 오늘 일을 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 축복을 깨닫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영성이고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저와 여러분들은 너무 나 쉽게 축복을 망각합니다. 쉽게 잊어버려요. 그래서 시편 103편2절 에 보시면 "너희는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여기 아브라함을 환영하고 축복하는 멜기세덱 이라는 존재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그가 살렘 왕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름은 멜기세덱, 세덱이란 말은 본래 의라는 말입니다. 의의 왕.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설명을 읽어보면 히브리서 7장3절에 특별히 이 사람은 처음도 마지막도 없다 족보도 없는 존재다. 이상한 인물이예요. 그는 영원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약 성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답하기를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 그림자가 된 존재가 바로 이 멜기세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재미난 것은 오늘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신약에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도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실 때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떡을 나누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이 떡은 너희들을 위하는 나의 몸이다. 또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 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다. 너희가 이 떡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Remember me. 나를 기억하라. 나를 잊지 말아라. 나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그의 피 흘리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축복, 우리가 구원받은 것 이예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원뿐만이 아니라 삶의 여로에서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우리의 생존, 우리의 존재 그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드림이 시 작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에서 증가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래요? 십일조가 늘어나는 것은 내 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십일조 하는 사람은 그것을 실감해요.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은 그걸 몰라요. 그냥 헌금을 내는 사람은 잘 모르죠. 그러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십일조가 늘어나는 것이 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물질이 증가하고 있는 하나의 사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십일조가 늘어가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싫어요? 십일조 느는 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하는 거란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어떤 사람은 축복은 증가하는데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 증가하는데 헌금은 그대로예요. 그런 사람들은 실감을 하지 못할 거예요.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십일조가 증가하면서 내 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이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젊은 청년 하나가 십일조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십일조를 내자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 당시에 한 달 월급이 10불이었어요. 10불이니까 십일조 얼마 내야 합니까? 1불. 1불 내는 것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한참 내다보니까 드디어 이 사람의 한 달 월급이 100불이 되었습니다. 얼마 내야 할까요? 10불. 조금 힘들었지만 내었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 이 사람의 한 달 월급이 드디어 1000불이 되었습니다. 얼마 내야 됩니까? 100불. 좀 떨려요. 100불 내기는 힘들었어요. 이 악물고 100불을 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자 드디어 이 사람이 한 달에 10000 불을 벌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얼마 내야 됩니까? 1000불. 여러분, 1000 불내는 것 쉽지 않죠? 1000불 내려니까 떨리기 시작해요. 도저히 낼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이 순진한 청년이라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십일조를 서약하고 결심한 이래로 지금까지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한 달 월급이 10000불이 되고 나니까 1000불 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십일조 서약을 cancel하면 안 될까요?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cancel은 안되구요 형제가 십일조를 쉽게 낼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어떻게요? 그러면 형제가 옛날처럼 한 달에 10불만 벌도록 제가 기도해 드리죠.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한다는 것 그와 동시에 십일조가 증가한다는 것, 저는 신앙 생활의 재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 감사의 응답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 있어서 한 평생이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의 생이 펼쳐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일조는 바로 축복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십일조는 우리의 성취의 원인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성취, 우리의 성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헌금 행위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십일조는 신앙 고백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제사장의 축복을 받으면서 다시 제사장은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전달합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게 무슨 메시지입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아군은 불과 318명. 성경학자에 따라서 그 당시 적군의 숫자는 1만 명에 가까웠다고 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300명 정도 갖고 승리한 거란 말이죠. 기드온처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프라이드 가 생겼을까요? 내 전략이, 기막힌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정말 조심해야 할 순간이 있다면 성공 다음입니다. 우리가 성공한 다음에는 어느 정도 자만심이 생겨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만심. 성공 다음에 우리는 죄를 짓기 쉽습니다. 어떤 죄를 짓기가 쉬울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 어떤 우상숭배의 죄일까요? 자기를 높이고 싶어합니다. 내가 이렇게 놀라 운 일을 했단 말이야.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 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그런 유혹을 누구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내 전략은 얼마나 기막힌 전략인가! 나는 드디어 성공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인 이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네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 메시지의 핵심은 뭐예요? 너 의 승리의 원인은 네가 아니다. 나야. 하나님이 너를 도와 준거야.
여러분, 헌금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아깝죠, 돈? 왜 아깝습니까?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땀 흘리고 내가 어떻게 열심히 일해서 벌었는데 그런데 내가 일할 수 있었던 건강, 누가 주셨습니까? 나의 지혜,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주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께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주께서 도와주셨다면 나의 삶은 전적으로 그 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나의 성공의 원인, 나의 성취의 원인,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이예요. 그것을 기억하자마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나는 그냥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였어. 그러나 도구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본래의 이유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 그런데 축복의 근원이라는 말 이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옮기면 축복의 통로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에 불과해요. 내가 쓰임을 받았다. 나 같은 사람도 쓰임을 받았다. 얼마나 기뻐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감격이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고 하나님이 하셨고 그러나 다만 나를 도구로 쓰셨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나간 한 주간 동안 미국 가서 참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구나 실감을 할 수 있었던 기적 적인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날 미국 워싱턴 공항에 딱 도착을 하니까 저를 마중 나오신 분이 메모지 한 장을 전해줘요. 메모지에는 워싱턴 지역에 사는 목사님 한 분이 아주 긴급한 일로 저를 꼭 만나야 하겠다는 전화번호가 그 안에 적혀 있었어요. 제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피곤한 상태 속에서 떠났기 때문에 너무 너무 피곤했어요. 다른 아무 생각도 없고 자자 그 생 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무언데 이렇게 만나자고 그러나 우선 나는 쉬고 봐야 되겠다 그래서 가서 우선 쉬었습니다. 하룻밤을 푹 잤습니다. 며칠 후에 연락하고 싶었습니다. 하루 딱 자고 일어나니까 그 이튿날 새벽에 그 메모지가 왔다 갔다 해요. 뭐가 그리 긴급 하길래 나를 꼭 만나자고 했을까? 그 이튿날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꼭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토요일 날 만났습니다. 이 분은 은퇴를 앞에 두고 둔 목사님이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목회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도 전에 워싱턴에 있을 때부터 교제하던 분이고 저하고 성경 공부도 하던 목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은퇴를 앞에 두고 한 수년 전에 워싱턴 버지니아 쪽에 미국 교회가 쓰던 아주 좋은 땅을 얻었습니다. 7.5에이커. 7.5에이커면 어마 어마하게 큽니다. 8000평이 넘어요. 아주 큰 땅 이예요. 워싱턴의 한 복판에 그리고 1000석이 들어가는 본당과 교육관이 다 있는 빌딩을 땅과 함께 인수했어요.
그런데 이제 이 분의 은퇴가 가까워지는데 교회가 생각처럼 부흥이 되지 않았고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 은 와서 이 분에게 목사님 그걸 팔라고. 팔면 어마어마하죠. 땅 값만 해도 500만불 이상을 받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의 양심으로 이걸 팔 수는 없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 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버지니아 지구촌 교회가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좀 의탁하고 싶은데 버지니아 지구 촌 교회의 장세규 목사님, 저하고 같이 있던 목사님인데 잘 몰라요. 젊은 목사님이고 그래서. 이동원 목사가 생각이 나더래요. 내가 이동원 목사하고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그래서 저를 만나자고 그런 거예요. 이 분이 제 정신으로 말을 하나 안 하나. 여러분 7.5에이커면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화요일 날 만났어요. 장세규 목사님이랑 저랑 제 와이프랑 그 목사님이랑 다시 그 교회당에서 만났어요. 워싱턴의 한복 판 금싸라기 같은 곳에 있는 아주 넓은 땅을 딱 보자 저는 생각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요 땅을 딱 가지고 한국의 수지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같이 손을 잡고 교회당에서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셨어요. 이제 이 목사님이 증인이 되시고 이 목사님이 축복하시고 이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저는 조건 없이 오늘 이 시간이 교회를 지구촌 교회에 위임하겠습니다. 그래서 다 끝났어요. 3월 첫 주에 버지니아 지구촌 교회가 옮겨요. 그 장소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여러분 실감이 안 나요? 제가 가만 히 비행기 타고 오면서 이번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구나. 나를 쓰셨구나.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쓰임을 받는 기쁨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 줄 아십니까? 내가 주인이 될 필요가 없어요. 나는 통로가 되면 돼요.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내가 겸허하게 통로가 되기를 원할 때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 그리고 한 평생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축복을 위임해 주시는 하나님. 저는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도 이런 놀라운 축복이 경험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십일조부터 내셔야 되요. 우리의 성취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의 영성 무얼까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십일조라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 헌신의 상징인 것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명령한 일 없어요. 너 드려라 이런 명령한 것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드렸어요. 자발적인 것이었어요. 자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어도 자원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브라함 이후에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창세기 28 장22절에 보시면 야곱이 베델의 들판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원하구요. 그리고 저는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십일조 서원을 해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 어도 이것이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이후에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가서 모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세 시대에 십일조가 율법의 한 부분이 됩니다.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 데 십일조가 신약적이 아니다 복음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시면 그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었고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거기 십일조를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의 핵심이 뭔 줄 압니까? 십분의 일 드리는 것 아니예요. 절대로 아닙니다. 십분의 십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수(滿數)를 말합니다. 꽉 찬 수. 옛날 숫자를 셀 때 손가락으로 세는 것이 가장 기본이었다는 말이죠. 열 그러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예요.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전체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드린 것은 이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드릴 때 십분의 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십분의 십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체의 상징으로, 내 존재를 드리는 표시로, 내 인생을 드리는 표시로 십분의 일을 주 앞에 드립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가 강조가 안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신약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신약 성경에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기본이었다. 그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분 의 일 이상 얼마나 더 드릴 수가 있느냐가 그들에게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들은 전체를 드리기를 원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드리는 정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체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십분의 일을 드리되 그 속에 전체를 드리는 헌신이 어떻게 고백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시면 돼요. 우리 주님 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주님, 그의 생명을 나를 위해 드려 주신 바로 그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멜기세덱 제사 장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그 장소가 창세기 14장17절에 보시면 왕곡이라는 장소였어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고. 왕곡이란 말은 왕의 골짜기란 말입니다. King's valley 왕의 골짜기. 성경학자들은 이 왕곡이 그 감람산과 예루살렘 성전 사이에 있는 계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것이 기드론 계곡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그 분은 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지 직전에 최후 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마치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을 만나주던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 때 예수님 심정이 어땠을까요? 떡을 돌리면서 이 떡은 말이야 너희들을 위해서 내일 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말이야 내 일이면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게 될 나의 보배로운 피야. 이런 심정으로 잔을 나누시던 우리 주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제 자들을 위해서 그 전체를 내어주신 주님. 그의 피흘림, 그의 자신을 내어주심, 그의 전부를 내어주심, 그의 희생 때문에, 그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858년 영국에서부터 독일로 건너와 유학하고 있었던 여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22살 먹은 여학생, 목사님 딸이었어요. 그러나 많은 목사님의 딸이나 재직의 자녀들이 그런 별로 뜨겁지 않은 신앙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자매도 소위 nominal Christian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하다가 병이 들었어요. 자기 친구가 초청을 했습니다. 독일의 뒤셀도르프라는 친구의 별장 같은 저택에 초청을 받아서 왔을 때 친구의 집 복도를 걷다가 그림 한 장이 이 자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유명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에크 호머,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을 맞고 가시의 면류관을 쓰고 고난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그림이예요. 갑자기 그림이 자매를 끌고 있었습니다. 잡아끌고 있었습니다. 얼어붙듯 그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림 아래 글귀 하나가 있었어요. 이 글귀가 자매의 가슴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이 글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갑자기 자매의 눈에서 는 눈물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망각하고 살았구나. 주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자매는 붓을 들어서 그 그림에서 받았던 감동과 자기 헌신의 결심을 한 편의 찬송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을 주느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 그 자체를 주셨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앞에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주를 위해 드려지는 전체에 대한 헌신, 그 헌신의 시작은 십분의 일에 대한 헌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 헌신을 주님께 드리셨습니까?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