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읍시를 빛낸 인물 50인’선정 추천서
∘ 문화재 주소지 : 전라북도 정읍시 월영2길 27(쌍암동 560-3번지)
〇 인물 :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의병장(義兵將) 이허량(李許樑)과 열녀(烈女) 고흥 류씨(高興柳氏)
충신(忠臣) 봉산인(鳳山人) 이허량(李許樑)의 자(子)는 경언(擎彦)이고 봉산 이씨(鳳山李氏) 시조(始祖) 문정공(文靖公) 이수(李隨)의 11세손이며 종사랑(從仕朗) 민효(敏孝)의 아들로 1567년에 출생하여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왜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의병활동 중에 전사(戰死)하였다.
열녀(烈女)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이허량의 처로 고흥인 영밀공(高興人英密公)의 후손이고 류청신(柳淸臣)의 딸로 출생하여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 중에 전사한 남편을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왜적(倭賊)이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침략으로 겨레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이허량(李許樑)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정읍(井邑) 사현(沙峴)에서 진(陳)을 치고 적의 침략을 막고 있었다.
특히 왜군이 공격해 올 때마다 진두지휘(陣頭指揮)하면서 의병들을 격려하며 계속되는 전투에서도 지치지 않도록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여 수많은 왜군을 무찔러서 왜적들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쪽에서 한양(漢陽)으로 진격(進擊)해 가는 왜군들의 진격 속도를 지연 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던 중 수차례의 전투 후에 의병대의 전열(戰列)을 정비하고 있을 때 수많은 왜적들이 동시에 기습 공격해와 치열한 전투 끝에 창상(創傷)을 입고 장렬히 전사(戰死)하였으니 이날이 1597년 9월 16일이다.
부인 고흥 류씨(高興柳氏)도 당시 적의 포위 안에 있었는데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自決)하려는 순간에 왜적들이 들이닥쳐서 항복하라고 협박하니 “난(亂)을 당하여 국가에 목숨을 바친 것은 장부(丈夫)의 지절(之節)이요.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부인의 조행(操行)이니라, 차라리 네놈들의 칼에 맞아 죽어 혼(魂)이 될지언정 네놈들에게 항복(降伏)할 수 없다”하고 꾸짖으니 적이 부인을 세 도막으로 베어져 순절(殉節)하였다.
이허량은 유년시절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호걸스러운 성격으로 도량이 넓어서 사람들이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송을 많이 들으면서 성장한 인물 이였다.
왜적들이 물러간 후 가족들은 충신(忠臣) 이허량(李許樑)과 그의 부인 열녀(烈女) 고흥 류씨(高興柳氏)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월영산과 불갑동에 장례(葬禮)를 치렀는데 무덤 위에 청백색의 빛깔이 무지개처럼 며칠간 가시지 않으니 사람들이 충열(忠烈)이 지극한 소치라고 했다 한다.
부부의 장렬한 전사 사실을 유림(儒林)들이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여 이허량 의병장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인 고흥 류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각각 추증(追贈)하고 충열려(忠烈閭)의 은전(恩典)을 1623년(仁祖 元年) 8월에 내려 정읍시 상동 사현에 세웠고, 1873년 10월 자손들이 사는 현 정읍시 교암동 458번지로 이건(移建)했다가, 1988년 3월에 선대(先代)의 묘(廟)와 그의 묘(廟)가 있는 정읍시 월영2길 27(쌍암동 560-3번지)으로 다시 이건(移建)했다. 묘가 있는 이곳을 지금도 충신산 열려등(忠臣山烈女嶝)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이곳은 위국헌신(爲國獻身) 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고 있다.
현 위치에 있는 비문행적(碑文行蹟)과 충열려(忠烈閭)는 교리(郊理) 윤행직(尹行直)이 글을 썼고, 비문(碑文)은 문경공(文敬公) 송래희(宋來熙)가 글을 썼으며, 묘지(墓誌)는 문경공(文敬公) 이채(李采)가 썼고, 정려 이건기(旌閭移建記)는 문간공(文簡公) 기정진(奇正鎭)이 지은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의병장(義兵將) 이허량(李許樑)과 충열려(忠烈閭) 고흥 류씨(高興柳氏)의 사적(史蹟)은 기정진 노사집 23권(奇正鎭 著, 蘆沙集 二十三卷)*1)에 “숙부인 유씨 정려 이건기(淑夫人柳氏旌閭移建記)” 내용, 김평묵 저 중암집 46권(金平黙 著, 重菴集 四十六卷)*2)에 “묘갈명 예빈사 직장(墓碣銘禮賓寺直長) 유공(柳公景仁)과 함께 향인 이허량(鄕人 李許樑)으로 의병을 일으켜 참여한 내용(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정읍군지 김동수 교감 역주, “호남문화연구총서 13 호남절의록(井邑郡誌 湖南節義錄)”, 한국민족정신진흥회(韓國民族精神振興會), 한국 의병인물사(韓國 義兵人物史), “제2장 조선중기의 의병활동”, 전라북도지 호남삼강록 충의효열록(全羅北道誌 湖南三綱錄 忠義孝烈錄) 등에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부인 유씨도 왜병의 칼에 순절하여 이허량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부인 유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봉하여 정려(旌閭)를 내린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정읍시를 빛낸 인물로 추천합니다.
2022년 12월 일
봉산이씨 좌랑공파 정읍종중 회장 이승호 외 종중 회원 일동
〇 증빙 자료:
1. 이허량과 부인 류씨의 사적은 기정진 저(奇正鎭著)『노사집(蘆沙集)』23권(二十三卷)*1).에 “淑夫人柳氏旌閭移建記”란 내용으로, 김평묵 저(金平黙著)『중암집(重菴集)』46권(四十六卷)*2).에는 “묘갈명 예빈사[直長墓碣銘] 류공[柳公景仁]과 함께 향인[李許樑]으로 의병을 일으켜 참여한 내용(墓碣銘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幷序)” 등이 기록 되어 있다.
2. 『호남문화연구총서(湖南文化硏究叢書)』제13권의「호남절의록」에 그리고, 한국민족정신진흥회의『한국의병인물사(韓國義兵人物史)』「제2장 조선중기의 의병활동」편에, 전라북도지『호남삼강록 충의효열록』등에 이허량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고흥 류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봉하여 정려(旌閭)를 내린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奇正鎭,『蘆沙先生文集』卷之二十三, 記。
∘ 奇正鎭, 蘆沙先生文集卷之二十三, 記, 淑夫人柳氏旌閭移建記: 楚山縣東沙峴之下。里曰上里。舊有綽楔焉。其榜曰贈通政大夫李許樑妻贈淑夫人高興柳氏之閭。正鎭未老時。追逐友生。屢次經由其下。隨衆起敬焉。顧以謏聞。柳氏成節首末及夫家鄕貫未之詳也。今年癸酉。綽楔移于縣南九巖。後孫家戶所在也。役旣竣。李君奎烈,台植,秉瓘。抱牛峯李司禦,恩津宋祭酒筆墓誌若表。來徵記事之文。正鎭老。廢文墨。顧以聞昔所未聞爲快。不敢默。謹按通政公字擎彥。系鳳山。文靖公隨。其十世玄祖。生員貞仁,從仕郞敏孝。其祖若考也。柳夫人英密公淸臣後。希渚女也。通政公性至孝有志節。萬曆丁酉。倭奴再突。覆於稷山。奔而南。沿路恣殺害。公憤忿。不爲避賊計。團結閭里少年。期於遮截剿戮。始也殺數十賊。而末以賊勢浸大。不能支。遂遇害。夫人時在圍中。賊欲進劫之。夫人大罵曰。有死義之男子。豈無死節之女子乎。斥以犬羊不絶口。遂倂命。家僮收二屍體。葬于縣東佛覺山。墓上有靑白氣經日不散。土人嗟異焉。事聞。贈公通政。夫人從夫職。且有旌閭之命。噫。非死爲難。處死爲難。男子猶然。况於婦人乎。此朝家所以旌贈而褒美之也。不有顯刻楣端。何以昭示來許。如昨日事乎。今日諸君之事當矣。(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호: 蘆沙, 初名: 金賜, 全羅道 淳昌 出身, 諡號: 文簡)
∘ 번역본: 노사선생문집 권23, 기(記), 숙부인 류씨 정려 이건기: 초산현(楚山縣)의 동사현(東沙峴) 아래 상리(上里)라는 마을에 옛날 정려가 있었다. 그 방(榜=木牌)에 ‘증통정대부 이허량 처 증숙부인 고흥류씨지려(贈通政大夫 李許樑 妻 贈淑夫人 高興柳氏之閭)라고 쓰여 있었다. 정진(正鎭)이 어려서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차례 그 아래를 지나면서 여럿이 공경심을 자아내었으니, 뒤돌아 보면 약간의 명성이 있었는데 류씨가 지조를 지킨 이야기와 부군(夫君)의 향관(鄕貫)은 자세히 알 지 못하였다. 금년 계유(1873년)에 현(縣)의 남쪽 구암(九巖) 정려를 옮기니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일이 끝나고 이규열(李奎烈), 이태식(李台植), 이병관(李秉瓘)이 우봉(牛峰) 이사어(李司禦)가 쓴 묘지(墓誌)와 은진(恩津) 송좨주(宋祭酒)가 쓴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일의 전말을 기록한 글을 요구하였다. 정진이 늙어 문묵(文墨=문장)이 쓸모가 없게 되었으나, 옛날에 듣지 못했던 것이 명쾌해져 가만히 있지 못하였다. 통정공(通政公=李許樑)의 자는 경언(擎彦)이고 봉산 이씨(鳳山 李氏)이다. 문정공(文靖公=李隨, 1374~1430, 자: 澤之, 호: 深隱․寬谷, 鳳山 李氏 始祖)는 그의 10세 현조(玄祖)이고 생원(生員) 정인(貞仁)과 종사랑(從仕郞) 민효(敏孝)는 그의 조(祖)와 고(考)이다. 류부인(柳夫人)은 류청신(柳淸臣, ?~1329, 본관: 高興, 시호: 英密)의 후손으로 희저(希渚)의 따님이다. 통정공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만력(萬曆) 정유(丁酉=1597년) 왜노(倭奴)가 재침하여 직산(稷山)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밀려오면서 도로에서 사람을 방자하게 살해하였다. 공(公)이 화가 나서 적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적을 차단하고 섬멸하기 위해 기다렸다. 처음에 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마지막에는 적이 대거 밀려와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피살되었다. 그 때 부인은 포위되어 적이 겁탈하려 하자 부인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의롭게 죽은 남자가 있거늘, 어찌 절개를 지키다 죽은 여자가 없겠는가? 斥以犬羊不絶? 마침내 함께 목숨을 잃었다. 가동(家僮)이 두 분의 시신을 거두어 현(縣)의 동쪽 불각산(佛覺山)에 장례를 치렀다. 묘 위에 청백(靑白)의 기운이 태양을 가로질러 흩어지지 않으므로 지역 사람들이 기이함을 탄식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공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증직하고 부인은 부군의 직책을 좇았으며(숙부인 증직), 또한 정려를 하사하는 명(命)을 내렸다. 아! 안죽기도 어렵고 죽는 것도 어렵도다. 남자도 오히려 그런데, 하물며 부녀자임에랴. 이것이 조정에서 정문을 내리고 상을 내려 아름답게 여기는 이유이다. 처마 밑에 새긴 것이 분명하지 못하니, 어찌 지난 날의 일과 같은 것을 장래에 소상히 알겠는가? 오늘에 여러분들의 일도 당연하다. - 기정진(1798~1879) 자: 대중, 호: 노사, 초명: 금사, 전라도 순창 출신, 시호: 문간 -
*2). 金平黙, 重菴先生文集卷之四十六, 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 金平黙, 重菴先生文集卷之四十六, 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父子君臣之道。天之經地之義。而所謂民彜者也。自古篤於忠孝者。其心固儻然。無所爲矣。然自主張世敎者言之。所以采掇而旌褒者。不可有漏珠之歎也。今柳公景仁。與其弟成仁,克仁。一心忠孝。足以範俗。而至今數百年。寥寥乎無聞。可勝惜哉。尙幸楚山邑誌。湖南節義錄。有可考故。心齋宋文敬公。據以表章於前。就加撮要。而昭揭墓道。可以無媿詞矣。公字士榮。自號松隱。高興之柳。始於高麗戶長諱英。盛於高興府院君淸臣。其世麗史詳焉。自其下仍士大夫不絶。監察淵。參奉懷荃。參奉檣。學生天祥。於公爲高曾祖禰。妣朴氏。籍尙州。學生三孫女。公生於嘉靖戊午。天姿魁桀。慷慨有志節。以薦授禮賓寺直長。不就。兄弟漁樵養親。竭誠供歡。親癠。晝宵禱天。求以身代。夢神人指山蔘一根。旣覺至其處。取以已疾。萬曆壬辰倭寇至。兄弟負親逃難。遇諸塗。賊犯其親。號泣翼蔽。多方求哀。賊感而舍之。癸巳。遭內艱。情文咸備。旣葬。廬墓終制。丁酉倭鋒再逞。公兄弟相謂曰。始吾未能擧義擊賊者。以吾親在也。親今不在。死於長上職也。乃具糧械。赴笠巖城。與奉事尹軫。同爲城守計。族父春苾。族兄弟希津,潤根,添根。鄕人李許樑。僧將徽墨等。皆義而從之。乃率鄕丁百餘人。家僮五十餘人。出據要害。賊猝至。公挺身而戰。斬數十級。身亦被五六創。俄而一賊。從積死中放丸而卒。時十月三日也。得年四十二。弟殊屍戰。少頃賊挫而走。一方賴以安堵。於是。鄕人懷之。指其所居之里曰三孝村。指其廬墓之崗曰三孝山。指其兄弟曰三義士。忠孝之實如此。可無傳乎。配晉州河氏。將仕郞大海。其考也。墓在楚山龍巓洞負艮之穴。而河氏之葬。亦同崗。一男畢。僉樞。二女朴師孟,宋善後。孫僉樞男震華,震秀。側出震行。宋壻男東奎鼎奎震奎。今爲十餘世。不可悉書。其以三家之述。乃來請銘者。十代孫鼎相也。念昔朱宋二夫子。當中國陸沉之時。至誠惓惓。在於扶植人紀。表著天理。故如唐衛士李士龍之流。雖微必書。其心可悲矣。况公之兄弟。又是衣冠士夫。其始終一心。旣無媿於古人。至如今日所値。則西洋之橫流稽天。其慘不但如彼時之陸沉也。區區如鼓幣之救蝕。又烏可已歟。惟其人地望。實萬萬不似。爲可媿恨也。銘曰。
天降生民。與飛走異。父子之仁。君臣之義。有或敗闕。所異何事。伊狼與蟻。顧或有愧。世衰敎弛。欲火恣熾。遺親後君。盖無不至。肫肫松隱。兄弟同德。責孝課忠。謂是性職。祥幕致雀。革愿感賊。旣憂乃吉。移以死國。原隰之裒。同氣斯惻。矢不俱生。卒靖疆域。瞻彼日月。明有遺照。南人誦之。其名亦耀。有誌有錄。有闡有詔。維龍有阡。睾如其墳。虔薦石章。勉爾後昆。西鯨揚波。殄玆彝倫。曷惠其極。我心之熏。尙兾夙夜。光大家傳。(金平黙, 1819~1891, 朝鮮 末期 學者, 本貫: 淸風, 京畿 抱川 出身, 字: 穉章, 號: 重菴)
∘ 번역본: 김평묵(金平黙. 2003) “묘갈명 예빈사 직장 유공(柳公景仁)과 함께 향인(이허량)으로 의병 참여(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내용, 중암집 46권(重菴集 46卷), pp 7∼10
김평묵(1819~189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 청풍(淸風), 경기 포천 출신, 자: 치장(穉章), 호: 중암(重菴).
첫댓글 감사합니다.
장성 봉산이씨(鳳山李氏) 대종가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6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