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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찾은 페트로그라드의 집은 관리인이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방치된 티가 났다. 일리야 우스트랼로프는 꽃병의 말라비틀어진 꽃을 뽑아 버리며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그의 아내 줄리아가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옘마 골드만을 보러 간 탓에 집 청소는 온전히 일리야의 몫이었고, 일리야는 관리인이 그래도 힘을 쓰긴 썼다는 근거를 애써 찾아가며 먼지를 닦아냈다.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군가가 누른 건 그때였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니콜라이. 무슨 일이냐.”
짙게 콧수염을 늘어뜨린 콧수염이 한 손에는 가방, 다른 손에는 보드카 병을 들고 오자 일리야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주는 차르 지지자에 슬라브주의자인 니콜라이가 7월 혁명 소식을 듣고 막 귀국한 그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리야와 니콜라이는 먼 친척이고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견해 차이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평가하는 대로 니콜라이는 너무나 급진적이었고 일리야는 너무 이상적이었다.
“무슨 일이긴요, 축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저는 이제는 입헌민주당 당원이 아니니까 안심하시죠.”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니콜라이는 자연스레 거실의 테이블 위에 가방과 보드카를 올려놓았다. 그래도 5년 만에 만난 친척을 박대할 수 없었던 일리야는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찬장을 뒤졌다.
“차라도 내줄까? 그 보드카 마실 거면 잔을 주고.”
“잔 주시죠. 그리고 원래 그런 건 여자가 하는 것 아닙니까? 형수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순간 니콜라이를 향해 유리잔을 던질 뻔했던 일리야는 심호흡을 하고 두 개의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큰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니콜라이는 왜 일리야가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일리야를 바라볼 뿐이었다. 니콜라이의 열린 가방 안쪽으로 ‘조르주 소렐’이라는 이름이 적힌 책이 몇 권 보였다.
“형님은 여전하시군요. 이만 솔직해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잔 받아라.”
일리야는 니콜라이의 잔에 보드카를 따라주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잔에 담긴 보드카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일리야의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지금은 다들 혁명의 광풍에 미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압니다. 러시아와 같이 후진적인 사회에서 공산주의란 불가능해요. 마르크스도 비웃었을 겁니다. 결국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주체가 차르인지, 자본가인지, 볼셰비키인지만 다르겠죠.”
“너는 10년 동안 변한 게 없냐. 일관적이다. 일관적이야.”
“결국 러시아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남을 겁니다. 자본주의로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 반대파를 전부 죽여 혁명을 계속하거나, 자본주의에 굴복하거나. 저는 전자로 갈 거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전자를 좋아합니다. 이제 볼셰비즘은 러시아를 이끄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쓸데없는 적을 만들려 한답니까? 차르가 있으면 어떻고, 교회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동원해서 자본주의를 막는 데 힘써야죠. 아, 자본주의도 이용하면 더 좋겠네요!”
“너, 말조심해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누구도 동원하지 않아. 모든 것은 노동계급의 자발성이 해결할 거다.”
“그래서,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군대는 모병제라고 합니까?”
니콜라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깔깔 웃으며 남은 보드카를 병째 혼자 다 마셔버렸다. 일리야는 술을 별로 마시지도 않은 자신보다 대부분을 마신 니콜라이가 더 멀쩡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갑니다, 형님. 하지만 명심하세요. 신화 없는 혁명은 사기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일리야 본인이 매번 부르짖는 화해가 더는 진심에서 그런 것인지, 혹은 니콜라이의 말대로 모두를 동원하기 위해서인지 이젠 자기 자신 조차 확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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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목록을 확인해보겠소. 아, 요페, 바레츠노프, 둘은 먼저 들어가서 쉬시오. 둘은 일선 외교관이니까. 다른 이들은 잠깐만 남으시오.”
튜닉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외무위원 레프 트로츠키는 안경을 한 번 더 올려 쓰고는 참석자 명단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은 선원 대표단이 움찔거렸지만, 트로츠키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한 손을 들어 행동을 제지하고는 마저 목록을 확인했다.
“적위대 대표로 이반 솔제니친 대령.”
“여기 있습니다.”
“공교육위원회 미하일 포크롭스키 위원 동무와 사샤 카튜셰프 동무.”
“여기 있네.”
“사회혁명당 좌파 중앙위원 아나스타샤 비첸카 동무, 세르게이 마슬로프스키 동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수파, 초좌익파, 이하 각종 분파의 대리인으로 일리야 우스트랼로프 동무.”
“여기 있습니다.”
“소콜니코프 동무는 여기 있고, 카메네프 동무는 불참했고, 선원 대표 두 명에….”
문서를 읽어내리던 트로츠키는 이윽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 사이, 대표단은 아직도 익숙해지기 힘든 서로의 면면을 흘긋거리며 쳐다보았다. 대부분은 거의 혼자서 7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3계급 특진을 한 솔제니친을 흘긋거리며 바라보았고, 그 외에는 평화조약에 반대하면서 왜 이제 와 끼어드냐는 식으로 연립여당 대표단을 노려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 사이, 트로츠키는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농민 대표가 없군. 표트르 동무, 근처에서 농민 동무 한 명만 데려오시오. 소작농이면 더 좋소.”
“예, 예? 안 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먹질은 절대로 안 되고, 전쟁을 끝내는 회담 자리에 간다고 하면 아마 올 것이오. 절대로 주먹질은 해선 안 되오, 알겠소?”
트로츠키의 옆에 경호원처럼 서 있던 거한이 쿵쿵거리며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트로츠키는 명단을 접어 담당자에게 넘기고는 주의를 환기하려는 듯 손뼉을 쳤다.
“자, 다들 열차에 탑승하시오. 지금도 당회의에서는 이 문제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부디 그 불길이 여러분에게 번지지 않기만은 바라겠소. 아마 번지겠지만!”
마침내 트로츠키의 일장 연설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하나둘씩 열차에 올랐다. 이윽고 모든 대표단의 인원과 표트르라는 사람에게 끌려온 로만 스타쉬코프라는 농민까지 탄 뒤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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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히 30시간을 걸려 도달한 브레스트 중앙역은 폐허에 불과했다. 한때 차르 알렉산데르 3세가 축사를 하며 개관하고 170개에 달하는 전구를 달아 최초로 전기로 불을 켜는 역이라던 중앙역이었다. 그런 역은 2년 전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생긴 폭발의 흔적으로 절반쯤 무너지고 새까맣게 그을린 상태였다. 열차가 지나다닐 선로와 승강장 정도만 잔해가 치워진 정도였고, 이마저도 정말로 치운 상태에 불과해 열차는 사람 달리는 속도보다 느리게 승강장에 진입해야만 했다.
“독일 놈들 기세등등하군. 그렇지 않나?”
“예, 위원 동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다들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보기에, 우리 대표단이 저 양반들 혼을 쏙 빼놓을 거야.”
포크롭스키의 말에 일리야는 어리둥절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 대표단은 온갖 기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바레츠노프 대표. 좀 더 짧게 설명해줄 수 있겠소?”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국가로만 이 지구가 꽉 찬다면, 영원한 평화가 도래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저희는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누구보다도 지지합니다.”
와인이 놓인 담소 자리에서 알렉세이 바레츠노프는 요페의 대견하다는 눈빛 속에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상대는 동부전선의 동맹국 최고사령관인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대공이었다. 일생에 이런 기이한 경험을 처음 해본다는 표정을 짓는 레오폴트 대공은 손가락을 비비며 긴장된 티를 드러냈다.
“그, 바레츠노프 대표. 우리는 러시아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소. 그러니 러시아도 우리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길 바라오. 특히 우리에게 소수민족의 자결권 같은 것을 계속 요구한다면 평화는 불가능하오.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면 다음 열차를 타고 돌아가는 게 좋겠소.”
“아. 그렇습니까.”
바레츠노프는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레오폴트 대공에게 마치 사과하려는 듯 눈을 맞췄다.
“우리가 대공 전하의 나라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레오폴트 대공이 거기서 노발대발하며 협상을 파투 내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중에 파우코이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추측을 말한 것에 따르면, 독일은 한계에 몰렸으며 사실상의 군사 독재 체제로 물자와 식량이 점점 동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독일이라 이 정도를 버틴 것이지 오스트리아는 각 민족의 분열로 산산조각이 날 위기라는 소문까지 널리 퍼졌다고 했다. 파우코이의 그럴듯한 추측이 덧붙여지자 바레츠노프의 기행은 레오폴트 대공을 시험하려는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바로 다음 날과 그다음 날에도 기행은 계속되었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본국에서 전달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대령 동무.”
솔제니친은 당원 한 명이 전달해 준 통신문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 내의 계급을 없애고 직위만 남길 것이며 솔제니친을 군단장의 직위에 임명시킨다는 통신문이었다.
읽고 그냥 넘어갔다면 모르지만, 혈기 넘치는 솔제니친은 어깨와 옷깃에 붙어있던 대령 계급장을 악력으로 뜯어냈다. 실밥이 터지고 옷이 찢어지는 광경을 보던 레오폴트 대공은 그동안의 건강 유지가 무색하게 목덜미가 당겨와 손으로 뒤통수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다 떨어져 나간 대령 계급장이 바닥에 떨어지자, 솔제니친은 벌레를 본 것처럼 군홧발로 계급장을 밀어 테이블 밑으로 집어넣었다.
“실례했습니다. 이제 시작하시죠.”
그쯤 되어서 포크롭스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일리야는 혀를 내둘렀다. 이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설마 기행과 운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닐까 아는 걱정, 아니 기대 또한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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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목만 보아도 아시겠지만(...) 지난 9월 샤츠슈나이더님 및 여러 참가자분과 함께 진행한 RPG를 소설화한 글입니다.
아무래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용이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으며, 제 캐릭터를 포함해서 많은 캐릭터가 너프되었습니다. 캐릭터들의 설정과 이름도 일부 변경되었습니다. 특히 연령대가 대폭 올라갔습니다. 표트르, 카튜셰프, 우스트랼로프는 5살이 올라갔고 바레츠노프는 10살이 올라갑니다.
또한 아무래도 쓰는 사람이 저인지라 제 캐릭터가 주인공이고(활약이 주인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원래 캐릭터 설정에 충실하게 더 아싸가 될 것 같습니다.), 시작 시점도 그래서 1917년 7월이 아니라 1917년 8월이 되었습니다. 다른 캐릭터 시점도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파우코이와 레오폴트 간의 에피소드는 실제는 요페입니다.
솔제니친의 에피소드는 실제는 알렉산드르 사모일로 장군입니다. 실제론 훈장도 다 떼서 던졌는데,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솔제니친이 러시아 제국의 훈장을 한 달 동안이나 계속 달고 다니진 않았을 것으로 보이니….
참고로 부정기 연재입니다. 제가 여유 있을때 올라옵니다 (??)
첫댓글 참고로 저는 웹소설작가가 아니라서 웹소설적인 재미가 매우 모자라게 글을 씁니다. 문피아에 '페트로그라드의 한국인' 과 '소련의 천재 혁명가가 되었다' 라고 몇배는 재밌는 작품 있으니 그 두 작품을 추천드립니다.
페트로그라드의 한국인은 거의 문피아 연재 시작하자마자 챙겨봤는데, 원래 디씨 대역갤에 연재되던 작품이라더군요. 전개방향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가령 독일 혁명이라던지…
@E.E.샤츠슈나이더 아 저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
솔제니친이었던지라 아찌 묘사할지 기대되네요.ㅋㅋㅋㅋ
아마 이 멤버들 중엔 가장 똑똑하면서도 현실적인 사람으로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탈인간급으로..
@렌지파일 전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았던걸로 기억하는데.ㅋㅋㅋㅋㅋ
아무튼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전 여기서 2015년에 죽나요?
그럴것 같네요 ㅋㅋㅋ
@렌지파일 그런데 제 이름이 알렉세이라고 되어있네요?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고 수정했습니다.
아니 이게 소설로 나온다고?(..)
심지어 재밌네요 ㄷ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어서 다음편을!(?)
오늘 올리겠습니다
와... 기대되네요. 다른 사람에게 행동이 어떻게 보였을지도 그렇고, 연대기가 소설로 바뀌는것도 그렇습니다.
일단 저는 샤츠슈나이더님이 게시글마다 만든 요약을 보지 않고 댓글만 보면서 소설을 쓰고 있어서 내용이 꽤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
하긴 등장인물들의 연령대를 상향할 필요가 있어보이긴 했습니다. 계획했던 것보다 다들 일찍 떡상해서…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부하린이 88년생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되는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올려야 더 그럴듯한 것 같아서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전 30대도 너무 늙은거 아닌가 해서 "처음에 나이 설정을 1890년대 후반(1897~)이나 1900년대생으로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