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를 탈 때 주니어 사관이 부족했다.
해운경기가 좋아 회사마다 배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주니어 사관을 모셔오기 위해 안 간힘을 쓰다가
묘안을 냈다. 당시에는 해무감독이 학교후배나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기네 회사에 오라고 술 사주고 밥 사주던 때였다.
똘똘한 젊은 부원(사관이 아니고 보통선원)들 중에서
3항사나 3기사 면허시험을 치게 하여 합격만 하면 바로 승진시키는 제도였다.
내가 타고 있던 배에도 머리가 그런대로 잘 돌아가는 친구가 두어명 있었다.
승선중에 회사에 추천하는 동시에 틈틈이 면허시험에 대비하여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명은 부산 모 전문대출신이었다.
그는 1년후 면허시험에 합격하여 3기사 발령을 받고 2~3년 근무하다가 배를 내려
부산 남천동에서 철물점을 차렸다. 철물점에서 취급하는 품목들이 다양하지만 주로 엔지니어가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므로 일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지은 상점 이름이 '희망사항'이었다.
못 하나 사러 오는 사람도 있고, 여름에 전자 모기채를 사러 오는 사람도 있고
천정에 달린 형광등이 고장나서 고쳐달라는 사람도 있고, 화장실 밸브가 고장나서 고쳐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상호 이름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희망사항'이라...
뭐든지 장사를 하려면 친절해야 되고 또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는 상호이름을 '희망사항'이라고 붙인 것은 성공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속에 희망사항이 하나 둘은 가지고 있다.
정년까지 별다른 탈없이 직장에 잘 붙어 있다가
정년퇴임 후엔 고향으로 내려가서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 차로 한 두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시골에
별장을 짓고 터밭을 일구어 일주일에 한 이틀 씩은 별장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싶어한다.
희망사항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실제로 시골에 들어갔다가 주민들과의 마찰로 도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농사도 쉽지 않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보가 완화땅에 초당을 짓고 시작에 몰두한 것처럼
나도 고향으로 들어가 조그만 오두막 한 채 짓고
겨울엔 온돌방에 군불 때고 떳떳한 방에 담요 둘러 앉아
책이나 읽고 글이나 썼으면 싶다
여름엔 바위틈에서 나는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 터밭에 가꾼 물외(오이) 따다가 맥국 만들고
조랑조랑 열린 조선 고추 한 줌 따다가 된장에 콕 찍어 먹는 게 나의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