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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러시아인들이 기행과 돌출행동으로 독일 대표단의 혼을 쏙 빼놓기도 잠시, 금방 정신을 차린 독일 대표단은 매섭게 러시아 대표단을 몰아쳤다. 특히, 독일 외무장관 리하르트 폰 쿨만은 사회민주노동당의 아픈 구석을 낱낱이 다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에서 전면 퇴각할 테니 독일군도 똑같이 러시아의 모든 점령지에서 퇴각하는 것은 어떻소?”
“그렇다면 소비에트 정부가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주민들의 여론을 받아들여 러시아로부터 해당 지역의 자주독립과 민족 자결을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할 수 있습니까? 이건 당신들 소비에트가 발표했던 민족 자결 성명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귀족인 주제에 민족 독립은 왜 저리 따지는지 러시아 대표단의 인사들은 폰 쿨만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영국 외교관들은 배짱을 부리며 원하는 걸 말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면, 독일 외교관들은 그들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약점을 날카롭게 찔러오기도 했다.
”해당 지역에 독일의 황족이나 왕족을 파견한 속국을 세우고 장차 주민들의 여론을 빙자해 독일에 합병한다는 보장이 없잖소. 그걸 어떻게 믿겠소?“
“러시아의 영토를 병합하는 것에 반대하신다면, 저희도 그렇습니다.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그 조건에 동의할 것입니다. 오히려, 저희는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발표한 그대로 독일군이 점유하고 있는 지역에 각 지역 민족의 독립 국가를 세울 예정입니다.”
러시아 대표단의 수장인 아돌프 요페는 그 말을 듣고 머리에 몽둥이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포크롭스키는 러시아의 18개 주를 통째로 뜯어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박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저희 조건을 하나도 귀담아듣지 않으신다면 협상은 중지하고 공세를 재개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대표단에 저걸 끼워서 온 당신들의 무식함은 충분히 보았습니다만.”
오스트리아군으로 보이는 장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혁명당 좌파의 대표인 비첸카를 가리키며 ‘저것’이라 칭하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단지 비첸카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웃긴다는 듯 공개적으로 웃었을 뿐이었다. 비첸카가 사회혁명당의 유명한 암살자 중 한 명으로서 러시아의 전 전쟁장관 빅토르 사하로프 부관감을 쏴 죽였다는 걸 아는 일리야와 마슬롭스키는 혹시라도 비첸카가 동맹국 대표단을 상대로 총질을 하지는 않을까 식은땀을 흘렸다.
“이대로는 진행이 어렵겠군요. 잠시 다들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폰 쿨만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치자, 다들 동의하고는 흩어졌다. 그때, 폰 쿨만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대표단에게 다가왔다. 그는 개인적으로 비첸카에게 무례를 사과하고는 악수까지 했을뿐더러, 그러면서도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요페와 바레츠노프 정도를 제외하고는 폰 쿨만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다들 당황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쿨만이 독일 외교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는 게 문제였다.
“사회민주노동당의 다수파 여러분, 우리 솔직해집시다.”
쿨만은 그리고리 소콜니코프와 일리야, 마르텔, 바레츠노프 네 명만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폰 쿨만은 미소를 짓고는 영수증을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의 망명 생활을 함께했던 네 명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이 레닌과 사회민주노동당에 자금 지원을 했다는 증거였다.
“지금 그 종이로 저희를 협박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마르텔이 유창한 독일어로 반박하자, 폰 쿨만은 테이블 위에 영수증을 턱 하고는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촛대를 가져왔다.
“이 영수증은 짐머만 장관님이 제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아시는 지난 전보 사건이 있었죠. 그 이후 비밀리에 외무부가 한번 물갈이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저희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원했다는 자료 또한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걸 가져온 것은, 협박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신뢰의 표시로서입니다.”
폰 쿨만이 그렇게 말하자 소콜니코프와 마르텔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는 평을 들었던 일리야만이 영수증을 빤히 바라보다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요?”
“저희 4국 동맹은 더 이상의 적대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전에 논의한 바가 있어서, 이 내용을 정리하여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회의장에서 보여드렸다간, 또 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종이는 싸움이 나는 걸 막는 용도에 불과했던 것이죠.”
그렇게 말하며 폰 쿨만은 영수증을 촛불에 태웠다. 사회민주노동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서가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일리야는 새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의 처지를 깨달았다. 속히 평화를 맺지 않으면, 서구 열강의 놀음에 이리저리 휘말릴 수밖에 없는 신세일지도 몰랐다.
*
1. 러시아는 서러시아 지역에서 쿠를란드,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핀란드, 베사라비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
2. 러시아는 1에 언급된 지역에 각 민족의 독립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용인할 것이며 민족국가의 원칙에 따라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를 합병하는 것을 인정한다.
3. 러시아는 자캅카스 지역에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에 할양한다.
4. 러시아는 독일 제국에게 20억 마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20억 마르크, 오스만 제국에게 10억 마르크, 불가리아 차르국에게 1억 마르크를 배상한다.
5. 4의 배상금 납부가 완료될 때까지 독일군은 드네프르강 연안에 주둔할 권리를 가진다.
폰 쿨만이 비밀리에 가져온 협상안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뒤흔들었다. 레닌은 협상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며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트로츠키는 이럴 바엔 서유럽의 혁명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며 시간 끌기에는 제일인 자신이 협상단에 참가하겠다고 냅다 열차에 올라타 달려왔다. 성명서 몇 개 뿌리고 바로 해산할 것이라던 외무인민위원회의 잔해 속에서 맨땅에 헤엄치던 요페와 바레츠노프는 어안이 벙벙했다.
급히 대표단 전체 회의가 소집되고 참가자 모두가 각자 아는 정보를 공유했지만, 대체로 피상적인 것들 뿐이었다. 독일 대양함대가 해상봉쇄를 뚫지 못해 보급 사정이 좋지 못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민족주의가 발흥해 내부사정이 복잡할 것이다. 오스만은 환자이고, 불가리아는 지역에서나 영향력을 미친다 같은 정도였다. 마침내 각자 발언할 때가 되자, 계급장 없이 군단장을 상징하는 견장을 달고 있던 솔제니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수락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150만 독일군이 밀려와 유럽 러시아의 절반을 점령해버릴 겁니다. 방독면도 없고 병력도 라트비아 소총연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부대도 없는 적위대가 케렌스키도 못 막은 독일군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 혁명의 근본은 민중에 있고, 민중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군은 지쳐 있습니다. 적군을 소집해서 막을 가망성이 그리 좋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다만….”
마르텔은 솔제니친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장중을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트로츠키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독불장군 같은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트로츠키는 부하린과 라데크 등 여러 중진의 반대 서명문을 가지고 와서는 이 협상은 절대 불가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독일군이 드네프르강에 주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소? 이건 우리가 배상금을 제때 뜯어내지 못하면 우크라이나 지역의 식량을 약탈해가겠다는 의미요. 300년 만에 우크라이나에서 약탈이 부활하게 된다는 소리란 말이오! 그런데 이 조약에 동의한다면 우크라이나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소?”
“우리 좌파 사회혁명당도 트로츠키 동무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 조약은 매국적이며 러시아 인민에 대한 배신입니다. 특히, 농민을 잔인하게 약탈하려는 도적 떼 같은 독일의 속셈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마슬롭스키가 말하자 솔제니친은 결국 미간을 짚었다.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원이 적다는 것이 이렇게 통탄한 적이 없었다. 라트비아 소총연대장 요아킴 바체티스같은 전문가는 당원도 아니었고, 세르게이 카메네프나 니콜라이 카쉬린, 아우구스트 코르크같이 솔제니친 또래의 그나마 경륜 있는 장교들은 죄다 지방에서 반-소비에트 세력이나 동맹국의 군대를 상대로 전투 중이었다.
그 사이, 트로츠키는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반박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승리의 전조 증상처럼 여겼는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제2인터내셔널과 개량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대전쟁 초기 혁명의 희망은 오래전에 지나갔소. 하지만 각국의 물자와 식량이 동나고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소. 우리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으니, 이 협상에 동의하지 않고 기다리면 자연스레 동맹국은 붕괴할 것이오!”
“외무인민위원 동무. 그것은 군사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조건을 거부했을 때 독일군이 기동전을 벌여 최대한 많은 영토를 점유한 다음 더 가혹한 조건을 내세우면 그걸 수락해야만 하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서부전선에서는 막대한 소모전이 일어나고 있고, 독일도 숙적 프랑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 러시아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합니다.”
솔제니친은 반박이 들어오지 않게 최대한 논리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설명했다.
“여기서 그냥 끝내야 합니다. 서부전선이 어떻게 끝날지는 저도 짐작하고 있단 말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식민지, 나아가 중국과 미국, 일본이라는 무한한 인력풀이 있습니다. 독일은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혁명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전쟁의 즉시 종결이었잖습니까. 혁명의 대의를 지켜 주십시오!”
솔제니친의 설득이 그럴듯해 보이자, 트로츠키의 기세에 눌려 있던 이들이 힘을 얻었다. 요페가 말없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이, 카튜셰프 또한 발언권을 얻고는 입을 열었다.
“트로츠키 동무,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인민들은 평화를 원하며. 우리는 물자도, 장비도, 전쟁에 대한 의지도 부족합니다. 나중을 기약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 거참 지긋지긋하네!”
그때였다. 트로츠키의 경호원 역할을 맡은 표트르는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며 벌떡 일어나 회의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표트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이런 표트르 4세 같은 소리가 다 있어? 내 잠깐 귀 좀 씻다 오겠소!”
“독일에 나라를 판 건 표트르 3세….”
“별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군. 페로 형! 있다가 말 좀 해주소. 누가 문제인지 말하면 당장 달려가서 무지카의 어머니를 보여줄 테니!”
“무지카가 아니라 쿠지마….”
“더러워서 정말!”
표트르가 그렇게 말하고는 회의장을 나서 버리자 사람들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 채 잠깐의 소강상태가 있었다.
*
비첸카를 ‘저것’이라고 칭했다는 건 실화입니다. 독어로, ‘Ist das auch ein Delegat?’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정확히 어느 나라 군인인지는 모르지만요. 비첸카는 사회혁명당 좌파 봉기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산당 입당까지 하지만 대숙청 때 사망합니다.
실제로 독일이 1917년 10월 1차대전 동부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117만입니다만, 여기선 150만이라고 했습니다. 솔제니친이 과장한 게 아니라, 나중에 가면 이 세계관 독일이 파리 점령도 하고 그런 걸 참작해서 전력을 좀 강화했습니다.
첫댓글
표트르가 표트르 3세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니..(감동)
이름이 같으니 알지 않을까요(...)
그때가 다시 생각나네요. 근데 쿨만 저 인간은 소설로 보니 더 밉상이네요. 아니면 없던 사람이었나요?
+ 제일 위기라 생각했던때가 조금 있으면 나올때가 되었네요.
진행때는 아마도 안 나왔던 실존인물이긴 한데, 영수증 사건은 뻥입니다 (독일의 지원은 사실이지만요)
@렌지파일 0화 댓글에서 딱 한번 등장하긴 합니다. 물론 본편이 아니라 다이알로그 형식으로 대사 한마디… ㅋㅋㅋㅋㅋ
제일 위기면… 카플란 사건인가요?
@E.E.샤츠슈나이더 예. 전개상 위기는 따로 있지만...
@dear0904 아, 그 사건이면 전개가 크게 달라질 겁니다.. 위기 규모야 더 커질테고요. 본래 역사에서도 카플란의 암살시도와 함께 사회혁명당 좌파가 봉기하는데 이양반들이 소비에트 의석수 1/3, 내각진 1/3, 체카 부총수 등을 다 장악해서 러시아가 완전히 막장이 됩니다.
완결은 배후 실세권력으로서 인민위원 평의회 의장직에 올라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인가요? ㅋㅋㅋ
+ 후후… 이걸 보니까 빨리 차기작 구상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후보 중 하나가 좀 민감(?)한 거라 고려도 해야 하고…
저도 모릅니다 ㅋㅋㅋㅋ 원작은 너무 희망차게 흘러가서, 그걸 좀 바꾸려고요 (???)
그런데 차기작 후보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카라멜 마끼아또 일단 저번에 말한 자유프랑스랑, “내 공화국에 김가네는 필요없다”가 있습니다. 그 2개가 가장 유력하고, 3위 후보로는 여말선초(가제: 육룡이 나르샤) 정도가 있네요.
@렌지파일 뽕맛을 어느정도 고려하다 보니 일이 너무 술술 풀리긴 했죠. 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저도 전쟁 참여 과정에서 하나라도 꼬임 끝이었는데 어째 다 이겨서.ㅋㅋㅋㅋ
이렇게 놓고보니 제가 비정상속의 정상인이 된 기분이...ㅋㅋㅋㅋ....
그런데 지난 화에서 물어보지 못한게 있었는데, 사람들의 설정이 바뀌었다면 저는 여기서 어떤 포지션인가요?
그대로입니다. 다만 비중 문제가 있는데, 써가면서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밌는데 이해는 잘 안가는데 재밌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