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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요란한 취문설개의 말을 듣고만 있던 왕질악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생각이 회오리지 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이제 그도 분명히 깨달은 상태였지만 왕질악의 입에서는 다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소. 당신의 말만 듣고 지금까지 내가 믿어왔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의식이 돌아온 후 저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사조차 안하고 당신이 사부를 죽게 했다고 믿었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네가 무엇을 조사해서 무엇을 알아내었는지는 모르지만 진실은 지금 내가 말한 것이다. 천하에 개방은 이제 너와 남은 꼴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과거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설사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지요."
취문설개의 말을 듣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왕질악의 말투는 바뀌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한 취문설개는 은근한 어조로 왕질악을 회유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왕질악의 대답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 이미 너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지. 아무도 너를 개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고---. 너의 목숨을 노리는 자 또한 부지기수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이곳에서 너는 나를 죽일 자신이 있는 것이냐?"
"당신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한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방이 하얀 눈만 보이는 설원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고 다음 순간 기합을 내지르며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앗!"
"타앗!"
녹색의 광채를 발하는 타구봉이 왕질악의 몸을 노리고 휘둘러지고, 왕질악의 손에는 푸른 강기의 막이 맺혀서 취문설개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개방의 방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타구봉법을 극성으로 익힌 취문설개의 타구봉은 아래를 노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위로 가 있고, 왼쪽으로 공격하는가 싶으면 오른쪽을 공격하고 있었다. 변화가 극심한 타구봉법에 휘말리면 공격할 기회도 잃어버리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왕질악은 아주 단순하게 앞으로 주먹을 뻗어가고, 푸른 강기가 맺혀 있는 주먹에서 일어나는 역도(力道)로 인해 타구봉의 변화는 소멸하고 취문설개는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방금 그게 무슨 권법이냐?!"
"천왕권! 제가 운룡회의 흑룡이 되면서 얻은 무공이지요!"
"아주 무거운 주먹이지만 그것으로는 타구봉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취문설개는 다시 앞으로 쏘아져 나오면서 타구봉으로 왕질악의 머리를 향해 내려치고, 일장여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구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옆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피하고 있는 왕질악의 머리카락이 허공 중에 흩날렸다.
"검기?!"
공중제비를 돌면서 옆으로 피한 왕질악이 몸을 세우고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 대신에 취문설개는 타구봉을 횡으로 휘두르고 왕질악은 허리를 뒤로 꺾어 철판교의 신법으로 투명한 검기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신의 등뒤로 이십여장 떨어진 곳에 있는 눈 언덕이 갈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질악도 피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공격을 피하면서 그 역시 취문설개를 향해 장풍을 날려 이어서 공격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취문설개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라가고 왕질악이 날린 장풍은 취문설개의 발바닥을 스치고 지나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 하나를 무너뜨렸다.
허공에 떠 있던 취문설개는 타구봉을 두손으로 잡고 철판교의 신법으로 누워 있는 왕질악을 향해 내리치고, 왕질악은 옆으로 대구루루 몸을 굴렸다.
"꽈--앙!"
폭음과 함께 바닥의 얼음이 갈라지고 북해의 차가운 바닷물과 함께 얼음이 위로 튀어 올랐다. 그 얼음을 부수고 왕질악의 주먹이 취문설개의 가슴을 향해 뻗어오는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취문설개는 발로 왕질악의 주먹을 걷어차며 뒤로 몸을 빙글빙글 돌아 빙산 위에 서고, 왕질악 역시 뒤로 몸을 날려 취문설개의 발길질이 담긴 힘을 해소하고 눈밭 위에 몸을 세웠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이십여장으로 벌어진 상태였지만, 둘 다 그 정도의 거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제 분명히 깨달은 상태였다.
빙산 위에 서서 아래를 쳐다보는 취문설개의 얼굴 위에는 감탄의 빛이 어렸다. 갓 오십을 넘긴 나이에 강기를 일으킬 수준까지 무공을 성취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평생을 무공을 연마하고 익힌 자들이라 해도 강기(綱氣)를 얻은 무림인은 극히 드물기에 취문설개는 감탄하고 놀랐다. 의형 왕소팔의 제자였고 자신의 제자였던 왕질악이었기에 취문설개는 더욱 아쉬웠다.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개방( 幇)이 사라지는 대신 구파일방이라 불리는 정도(正道)의 열 개 문파 중 가장 흥성해졌을 것이기에---.
"네 나이에 그 정도까지 무공을 연마하다니---, 대단하구나!"
빙산 위에 서서 소리치는 취문설개를 바라보며 왕질악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아직 감탄하기엔 이릅니다! 내가 운룡회에서 흑룡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이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소리치면서 왕질악은 왼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운룡회에 가입하면서 받은 흑룡환이 중지에 끼워져 있고, 오른손으로 흑룡환에 박혀 있는 검은 구슬을 잡아당기자 그것은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길고 가느다란 검은 줄이 반지에서 튀어나와 길게 늘어졌다.
"단혼사라는 이름을 아실 줄 모르겠군요! 제가 배우게 된 무공 중 가장 강한 것은 강룡십팔장이 아니라 이 단혼사로 펼치는 것이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질악이 몸을 앞으로 날리면서 왼팔을 앞으로 휘둘렀다.
공력을 실으면 흑룡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 그대로 단혼사라는 검은 실 맨 앞에 매달려 있는 구슬에서 검은 용의 그림자가 허공에 튀어나오고, 취문설개는 타구봉을 휘두르면서 앞에 검막을 치기 시작했다. 녹색의 광채가 취문설개의 앞을 완전히 가렸을 때 검은 용의 그림자가 그 막에 부딪쳤다.
"텅!"
검은 용은 뒤로 퉁겨 나왔지만 다시 취문설개를 공격하고 왕질악의 몸은 취문설개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탕! 탕! 탕!"
단혼사의 끝에 매달린 흑룡환의 구슬과 취문설개의 타구봉은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기이하게도 맑은 종소리를 계속 흘러나오게 하고---.
종소리가 멎는 순간 취문설개의 회전하던 몸도 멈추고 그의 몸 주위를 돌던 왕질악의 몸도 멈추어졌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타구봉에는 단혼사가 휘감겨 있는 상태였고 둘은 지금 진력의 싸움을 하게 된 상태였다. 타구봉에서 녹색의 광채가 피어오를 때, 단혼사에도 푸른색의 광채가 피어올랐다. 승부는 누구의 내공이 더 높은 가에 따라 결정 나게 된 것이다.
취문설개의 얼굴 위로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왕질악과 자신의 나이 차는 무려 삼십여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그 만큼의 세월 동안 취문설개는 더 많이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다른 많은 무림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내공을 높이기 위한 기약영초를 찾아 세상을 떠돈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왕질악의 암습을 받고 난 후에 먹게 된 보약들로 인해 내공이 두배로 급증한 상태였다. 당세 무림에 있어 취문설개는 내공에서 자신을 앞서는 인간들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취문설개를 바라보는 왕질악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칠호와 만나고 나서 배운 무공과 영약들로 인해 내공의 싸움에서 절대로 질 수 없는 왕질악이었다. 마도의 대부분의 무공이 그렇듯이 왕질악이 칠호를 통해 배운 내공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양을 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대성하기 위해서는 마성(魔性)에 빠지고 이성을 잃는 일과 심마(心魔)의 벽에 부딪치는 일을 겪어야 했던 왕질악이었지만 고통이 컸던 만큼 얻은 것도 컸다.
취문설개의 몸은 단혼사에 묶여진 형국이었다. 이대로 끝가지 간다면 취문설개의 몸은 산산조각나게 될 것이다. 왕질악은 이를 악물었다.
단혼사를 타고 밀려오는 녹색의 광채는 한순간 푸른 광채에 막히고 이번에는 푸른 광채에 밀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실이 다시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왕질악의 몸이 취문설개를 향해 미끄러지면서 다가가기 시작했다.
취문설개는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한순간 타구봉에 휘황찬란한 녹색의 광채가 피어오르고 다시 녹색의 광채가 푸른 광채를 밀어내고 단혼사를 타고 왕질악의 몸을 향해 밀려갔다.
'턱!'
취문설개의 바로 옆으로 다가서면서 왕질악의 오른손이 움직이고 , 취문설개는 다급하게 오른손을 뻗어갔다. 왼손은 타구봉과 단혼사라는 두 개의 무기를 통해 내공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왼손은 서로의 요혈을 노리고 근공박투가 벌어졌다.
'탁 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던 두 사람의 오른손도 어느 순간 왼손과 마찬가지로 서로 맞물렸다.
취문설개는 그 순간 이빨을 들어내며 웃는 왕질악의 얼굴을 바로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팽팽하게 밀고 밀리던 왼손의 내공 대결은 한순간 타구봉을 타고 취문설개의 내공이 물밀 듯이 왕질악을 향해 밀려들어가면서 취문설개가 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통해 취문설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이 담긴 내공이 취문설개의 몸 속으로 들어가 내장을 휘저었다.
"으 -- 악!"
한 순간의 일이었다. 취문설개는 무엇에 떠밀리기라도 뒤로 날려가며 피를 토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피를 게워내며 눈 위에 쓰러진 취문설개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눈으로 왕질악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무공은---?"
"당신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화접목, 적의 힘으로 적을 치는 수법---. 이것을 익히기 위해 저도 여러번 죽을 뻔했지요."
왕질악은 흑룡환에서 뻗어나온 단혼사를 다시 반지 속으로 빨아들이면서 말했다.
"이--이름, 울컥-- 이름을-----."
입으로 피를 토해내며 취문설개는 다시 물었다.
"내궁탄혈이라는 것입니다. 마교의 호법만이 익힐 수 있다는 무공이라고 들었지만 이것은 마교인들도 모르고 있는 무공이더군요."
"저--정말 대단한----."
말을 하다말고 취문설개는 고개를 꺾었다. 왕질악은 그런 취문설개의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목적이 이루어졌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아니 암울하기만 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사부님의 뜻을 저버리고 저는 악인이라 불리는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수 없이 무고한 사람을 제 일신의 안위와 권세를 위해 죽이고, 사부의 복수를 하려고 하다 복수의 대상을 잘못 정해 또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사부님의 뜻대로 의를 행하는 인간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인간이 되었으니---, 이제 저는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을 향해 말을 하고 있는 사이 왕질악의 두 눈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처럼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 네가 오늘 가입하게 된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의로운 문파이다. 부귀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오직 의(義) 하나만을 생각하면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네 이름은 질악(秩岳)이다. 너는 성도 없으니 내 성인 왕을 주마.'
사부가 되면서 맨 처음 협개 왕소팔이 해 준 말이 왕질악의 귓가를 어지럽히고, 부귀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오직 의로운 일만 행하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당당했던 사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왕질악이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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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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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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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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